[54장 예배와 기념]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수치
[54장 예배와 기념]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수치
- 다니엘 스미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밷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50:6).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이루어질 일을 말할 때, 이 예언을 인용하셨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눅 18:31-33). 이같은 예언의 성취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만이 이룰 수 있다.
주님의 하나님으로서의 위대함을 기억하라.
이사야는 메시야의 여러 이름들을 말한다.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이 같은 이름 중 한 가운데 있는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주 앞에 와서 외치는 자는 "너희 하나님을 보라" (사 40:9)고 외친다. 그리고 주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을 때, 천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3).
이사야는 메시야가 직접 하실 말씀도 예언해뒀다.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사 50:2-3).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지극히 높고 영원에 거하시는 거룩한 자, 만물을 창조하시고 육체로 오셔서 지상에 사는 사람과 함께 거하며 대화하신 분이다. 주님은 본질상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육체로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 되심을 일순간도 그만 두지 않으시고 혹은 어떠한 하나님의 속성도 젖혀두지 않은 채, 주님은 진정하고 합당한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주님의 하나님 되심은 주님의 인간되심 속에 놀랍게 나타나 있다. 주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셨다. 이 일들이 주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한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실 때가 그 때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 완벽함, 탁월함은 주님의 놀라운 인격에서도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육체로 계신 날 동안 "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으로서 빛났다. 영광의 하나님이 주 예수 안에서, 비록 인간의 육체로 숨겨졌지만, 온전하게 그리고 가장 명백하게 나타났다.
주님의 고난을 우리를 대신한 것으로 기억하라
이사야 50장은 매우 날카롭게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언하는 데서 더 나아가 6절에서 그 열정을 드러낸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50:6). 이보다 더 주님의 고난, 주님이 당한 비참한 상태를 잘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이는 위대한 겸손이다. 몸과 영혼이 다 관을 받았다. 어떤 말로도, 어떤 상상도ㅡ 주님이 겪은 바를 표현활 수 없으리라. 그같은 고난 속에서 겪은 깊은 갈등은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에서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신 말씀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이 고난은 주님만이 견딜 수 있는 것이었다.)
"나를 때리는 자에게 내 등을 맡기며."
주님이 맞은 채찍은 소가죽에 양의 뼈 조각을 매달아 살을 찢어 속이 드러나도록 만든다. 이사야 53장 5절에 나오는 채찍은 단수이다. 이는 마치 주님의 등이 채찍의 뼈에 찢겨져 하나의 넓은 자국이 생긴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아가서 5:13에서 신랑은 신부에게 "(당신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는 신부 얼굴의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부들 같은 부드러운 뺨을 갖지 못하셨다. 그러나 "꽃밭"이 상징하듯 주님의 얼굴에는 털이 있었을 것이다. 주님의 얼굴은 은혜롭고 권위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에서 주님을 대부분 엄마 품에 안긴 아이로 묘사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그림이다. 주님은 온전한 사람으로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며, 뺨에는 털이 난 남자답고, 용기 있는, 담대하고 진중한, 고귀하고 권위가 있는 분이다. 뺨에 털이 있는 것은 남자로서 성숙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털을 뽑기 위해 괴로운 고통과 아마 얼굴이 망가져야 했을 것이다.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시 52:14).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다른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처럼 수치를 주는 행동은 없다. 주님은 그 복되신 얼굴을 그같은 수치에서 피하지 않으셨다. 등을 때리는 자에게 등을 자발적으로 맡긴 것처럼, 얼굴도 털을 뽑는 자에게 내밀었다. 주가 누구신지 기억하라. 하늘을 흑암으로 입히는 분이다. 이는 하나님이 자연에서 밤에 하시는 일을 말한다. 또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온 땅을 어둡게 하여 인간의 수치를 덮는 것처럼 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같은 모독에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몸 전체가 사랑스러운 분의 복된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것은 어떠한 모독인가! 그같은 자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에 가 마땅할 것이다.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치스런 행동이다. 이는 지옥의 어두운 구덩이에 해당하는 도덕적 타락이다.
우리 구주로서 주님의 위로를 기억하라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는 절기로 모일 때,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백성들 가운데 주님의 사랑스러운 임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시원하고 위로가 되는 일인가! 주님의 희생은 우리 영혼에 얼마마한 위로를 주는가! 주님이 믿는 모든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축복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을 잠재운다.이 진리가 성령에 의해 마음에 강력하게 적용될 때, 가장 위대한 위로와 신선함이 나타난다.
주님은 고난 받는 자를 가장 잘 위로하신다. 교만하고 높아진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위로를 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당하지 않은 고난이 우리에게 주어진 적은 없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하실 수 있다. 주님만이 애통하는 자, 고난으로 깊은 갈등을 하는 자, 감옥에 갇힌 자, 중상과 모략을 당하는 자, 육체적 고통을 견뎌야 하는 자를 위로하실 수 있다.
주님이 기꺼이 자신의 등을 때리는 자에게 맡겼는데, 우리는 불평하고 투덜댈 수 있는가? 주가 수치와 침 뱉음에서 얼굴을 피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전도와 증거를 피하고자 하는가? 주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 구주, 중보자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본이기도 하다. 우리를 대신한 주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주님을 위한 고난을 감당할 용기를 부여한다. 사람은 단지 이 땅에서만 침 뱉을 수 있다. 그들은 주님의 얼굴에 지금 침 뱉을 수 없다. 그들이 우리 얼굴에 단지 짧은 이 지상에서만 침 뱉을 수 있다.*
구름 없는 날이 가까이 오고 있네.
주님, 오,주님께서 오시는 날이네.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입으시고
주님 백성을 집으로 데려가시려고,
주님 주위의 수만의 빛나는 천사들이,
주님의 살아있는 빛을 반사하네.
주님을 만난 모든 자들이
이제 새 노래로 찬송하네.
그 수많은 천사 중
어떻게 주님을 찾아낼 수 있을까?
거기서 나에게 보일
주님 사랑의 증거는 무엇인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가장 뛰어난,
순결한 광채가 빛나나,
주님 임재의 영광을 넘을 수 없네.
주 예수님의 상처, 그 상처,
그 깊고 깊은 상처는 말하네.
그 희생이 나를 해방했음을.
자아, 죽음, 지옥에서.
이 모든 게 주님을 단번에 영원히 묶었네.
은혜를 소유한 모든 자와.
이 연합을 끊을 손이 없네.
이 흔적을 지울 손이 없네.
_ C. A.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