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전도전략] 하나님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4)

행복자 2018. 8. 22. 13:10

[전도전략]

                                      하나님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라(4)

                                                                                                                                     - 허윤욱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눅 15:11~).


   지난번에 우리는 아버지를 버리고 나간 아들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을 하였는가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갖는 의미와 오늘날 육신의 아비에게 대한 행동지침에 관하여 이중적 의미로 청소년들에게 전할 것을 생각해 보았다. 또한 이것은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이번에는 이어서 아들이 나간 후에 당한 일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잘못된 결과를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아들이 잘못된 모습의 첫째는 아들은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질서가 없고 생각도 없고 기준도 없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집에서는 아버지라고 하는 가장이 모든 것을 통제하여 곁길로 가지 않게 하는 버팀목이 되었지만 집을 떠난 그는 당장에 모든 질서와 활동 기준을 상실하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집에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고 활동 지침이 있고 거기에 따른 질서와 조직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울타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자기의 마음대로 살아가게 된 형편이 어떠하겠는가. 아버지를 떠나니 당장에는 자유를 얻은 것 같아 좋았겠지만 그것은 곧 방종과 방탕의 길로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남의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는 본능이 있다. 이것은 반항본능인데 아담의 때로부터 물려받은 죄인의 근성이다. 탕자는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떠났다  그는 자기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은 소망을 실천하여 마음대로 살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목적도 방향도 가치관도 없는 삶으로 허랑방탕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창세기에서 인간 타락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해 놓은 바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통제를 버리고 자유를 부르짖으며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 결과는 죄악의 나락에 떨어져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생각과 가치관을 따라 고통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아이들을 전도하는 전도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선하게 통제할 수 있는 완벽한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단이 저들의 영혼을 통제하여 죄를 짓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사단의 종이 되어있는 것이다. 사단이 저들을 통제하지 않으면 저들은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천년왕국의 모습은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여 준다. 사단이 무저갱에 갇힌 상태에서 천년동안 행복한 시간이 주어지다가 사단이 잠간 놓일 때에 믿음 없는 자들의 반항이 일어난다.

   오늘날 아이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려는 현상은 온전히 사단의 장난감이 되어있는 상태이다. 그러한 것을 어떻게 깨우칠 것인가는 교사들의 몫이요 기도의 몫이다. 실제 아이들이 사단에게 잡혀 있는 실체를 정확하게 깨닫기만 한다면 아이들 전도와 양육은 훌륭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놓인 이 탕자는 허랑방탕한 삶으로 말미암아 통제할 수 없는 나락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사단의 노리갯감이 된 것이다.


   둘째로 탕자에게 임한 잘못된 결과는 허랑방탕 후 비참한 지경에 놓였다는 것이다. 돈은 떨어지고 직장도 없고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고자 하나 주는 이가 없는 슬픈 상태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부잣집 막내아들이 이 무슨 꼴인가. 얼마나 불쌍하고 처량하고 더러운 모습인가.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이해하게 해야 할 필요가 전도자들에게 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불의한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자신들은 선하고 착하게 살아야 할 것을 강요받고 있지마는 실제로 세상은 선한가? 착하게 사는가? 혹 착하게 산다하여도 그러한 사람이 인정받는 삶인가? 이러한 문제를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주교사들은 아이들과 함께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실제적인 토론을 하여 보는 것이 매우 좋다. 아이들과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를 보는 관점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하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배후에 사단의 간계와 음모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이들로 하여금 복음만 강요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 말고 복음의 실제적인 부분이 사회 현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토론과 대화를 통해서 이해시켜 나가면 어려서부터 성경의 핵심을 접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주입식 전도의 폐단을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이러한 문제는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주 메스컴에 등장하는 시사 문제가 있을 때 그러한 문제를 통하여 서로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기 바란다.

   전도는 아이들의 생각과 사상을 읽어서 저들의 생각이 성서적이도록 이끌어가는 훈련을 하게 될 때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예컨대 탕자가 자기 통제 능력을 잃고 허랑방탕하여 삶의 균형을 잃고 망할 길로 간 것처럼, 메스컴에 나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래해볼 수 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하고 싶었겠는가? 진정 그 사람의 범죄가 그 사람의 뜻이었겠는가? 그가 화가 나서 사람을 죽이거나 기타 죄를 지었을 때 왜 화가 날 수 밖에 없었을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이러한 문제들을 놓고 진지한 토론을 한다면 아이들의 수준이 향상되어 갈 것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범죄 문제뿐만 아니다. 부자가 더욱 부자가 되기 위하여 탈세를 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문제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평생 써도 다쓰지 못할 돈이 이미 있는데 또 돈을 벌기 위해 불법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얼굴을 고치고 여러 가지 성형을 하는데 이러한 것이 꼭 중요한가?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예쁘게 보인다는 것이 꼭 행복한 것인가? 예쁘기 때문에 성범죄를 당한 다거나 또다른 불행한 경우가 되는 것도 많지 않은가? 그러한 것을 연구하여 예쁘거나 돈이 많거나 잘생겼다는 것이 꼭 행복이 아님도 토론하여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필자가 얼른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열거하여 보았거니와 교사들은 이밖에도 많은 주제들을 개발하여 토론하여 나간다면 사랑받고 인기 있는  좋은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아이들에게도 인격이 있다. 아이들의 인격적 사고를 끌어내어 대화하여가면 좋은 결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입력한대로만 할동하는 기계나 전자제품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인격이다.  자연스러운 토론을 통하여 아이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성경의 가르침을 기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공하여 간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튼 탕자는 허랑방탕 후 슬픈 현실에 직면하여 고통을 당했다. 돈을 사용할 때에 많았던 친구들은 다 떠나고 지금은 오직 홀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사단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다. 지금 탕자는 모든 것을 도적질 당한 형편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앞에 있는 것은 오직 외로움과고통과 절망뿐이다. 이제 아무의 도움도 없이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외로움이 그를 엄습하고 있다. 직장을 알아보았지만 직장도 없다. 도시에서 그래도 후할 것  같은 시골로 가 보았다. 그러나 거기서도 길은 없었다. 왜냐하면 거기도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상은 흉년이 들어 있다. 수많은 사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여줄 그 무엇을 찾으나 찾을 길이 없다. 기쁨의 흉년이요 사랑의 흉년이요 웃음의 흉년이요 진리의 흉년이요 진실의 흉년이다. 정직의 흉년이다. 사람의 흉년이다. 디오게네스가 말한 대로 사람을 찾으나 참 사람을 찾지 못하는 흉년이다. 진실한 사람, 의지할 사람, 문제에 해답을 줄 사람, 모든 문제의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흉년이 든 것이다. 탕자는 모든 가진 것이 다 떨어지고 이제 엎친데 겹친다고 흉년까지 경험하고 있다. 부모를 떠난 날부터 고생은 시작이다. 부모를 떠난다고 하는 것부터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부모를 떠난 것이 바로 비극이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후다. 탕자는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이제 그는 시간을 낭비하였음을 알았을 뿐이다.

   아이들이 이 탕자의 이야기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알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며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이제 세 번째로 잘못된 결과는 무엇인가. 탕자의 마지막 탄식은 "죽는구나"였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하여 죽을 사람도 살리는 힘이 있는데 아버지를 떠난 나는 여기서 주려죽는 것이다. 아이들이 알게 되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여기에 있다. 이 탕자는 죽지 않아도 되는 죽음 앞에서 이제 무서워 떠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임을 아는 것이 아이들 수준에서는 깨닫는 게 쉽지 않으나 여기 탕자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죽음의 이유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 탕자는 지금 스스로 죽을 길로 간 것이다. 집에 있으면 아무일도 없이 고통도 없이 근심도 없이 잘 살 것인데 단지 부모를 떠났다는 이유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와서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모습임을 잘 가르쳐준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고통이나 죽음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임을 알리는 작업이 전도자의 할 일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예레미야 애가 3:39) 아이들에게 이러한 진리를 가르침이 쉽지 않으나 탕자의 이야기는 이와 같은 진리를 가르치는데 적합하다고 본다.

   또한 죽음은 결국 무엇인가. 지옥의 형벌인 것이다. 사람이 지옥에 던져짐보다 더 무서운 일이 없음을 이 부분에서 알게 함이 좋다고 여긴다. 탕자의 마지막 탄식은 "죽는구나" 인데 실제로 모든 인생이 마지막에 하는 말은 "죽는구나" 이다. 이것을 아이들에게 새겨줌이 중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것은 인간이 택한 길이다. 죽음은 망하는 것이요 영원한 절망이다. 그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서움의 극치에 다다름을 의미한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돌이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님도 돌이키게 하셨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일에 증인이로다" (행 3:32).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다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 일을 하신다.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역할론도 분명하게 이해시킴이 중요하다. 어느 주일학교에서 "예수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을 들었는데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분명치 않은 이야기를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조심해야 한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상황이 잘못되었다. 절망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모든 고통 위에 죽음의 위험에 놓인 것이다. 하나님을 떠남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요 망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 탕자의 이야기를 잘 배우면 자신들이 후에 가출하고픈 욕망을 억제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탕자의 이야기를 가르쳐 나가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아이들의 인성교육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 대부분 부모와의 갈등을 겪고 있는 경우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이 탕자의 이야기는 당장의 자기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맞다. 유념하여 기도하고 전하여 아이들을 바르게 인도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교사들이여, 전도자들이여, 아이들의 전도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한 번 더 말하는 것은 교사들 중에도 아이들 전도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듯하여 말하는 것이다. 아이들 전도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심는 것이다. 여러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그 나라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 나라에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지금 살기를 기도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