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따라 구하기
사랑을 따라 구하기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 14:1, 13-19).
은사의 약점은 방언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너는...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그 이유는 은사가 유익을 끼치기 위한 봉사임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일만 마디 방언보다 다섯 마디 예언이 낫다" 입니다.
이는 방언(한 은사)이 다른 은사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혹은 방언(어떤 특정한 은사)에만 이같은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은사가 가진 일반적 위험성이, 그 가능성이 가장 많은 방언을 통해 드러났다는 의미입니다.
은사는 다른 성도,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사용을 통해 은사를 가진 자의 우월함, 특별함이 드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은사를 말하는 가운데(12장, 14장) 사랑을 끼어 넣은(13장)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은 베푸는 자 아닌 받는 자가 기준입니다. 마찬가지로 은사도 받는 자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은사가 사용하는 자 위주로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사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한 자를 위해 사용해야 하며, 그가 만족할 때까지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주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롬 5:6-8).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필요성을 알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살고 있는 줄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권세와 영광을 비우고 낮은 처지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형편에 처하셨습니다. 심지어 오해, 비난, 모욕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모독적 발언을 한 자를 벼락으로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은사는 이런 식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은사는 사랑과 똑같은 목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 고 말합니다. 이는 방언과 같은 은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 생활의 전반적인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교회에서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오해와 핍박을 받으며 좁은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핍박하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용서하며 살게 됩니다. 이같은 믿음에 대한 보상은 이 세상에서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려면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맡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무한한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맡겨진 것입니다. 사랑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감격, 기적,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것입니다. 이같은 기적이 넘치는 가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