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양육-7] 부모로서의 책임을 직시함 (1)
[자녀양육 - 7]
부모로서의
책임을 직시함 (1)
- 존 그랜트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함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욥 1:5)
욥의 자녀들은 더 이상 연소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가정이 있었고, 가능한 대로 그들의 생일에 각자의 집에서 잔치(파티?)를 베풀었습니다. 그 때 자기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초청했습니다. 자식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려 할 때 부모가 염려어린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이런 장면은 얼마나 흔한지요. 이것은 부모가 감내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상황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녀를 향해서 아직도 커다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때는 무력감도 더불어 느끼는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동원할만한 방법이 거의 없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자녀들이 그들의 행위에 있어서 죄를 범하고 있었다는 암시는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사귐을 나누던 친구들이 불량했다는 지적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욥이 진실로 알았던 사실은, 그의 자녀들은 위험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었습니다.
위험요소는 그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욥은 그들이 거리낌 없이 죄를 지을까봐 염려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할까봐 염려했습니다. 욥에게는 그가 늘 마음에 두는 두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에게서 그토록 수없이 들어온 하나님을 마음으로 저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아들들의 행동은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곧 드러낼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욥은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그는 "그들 모두의 수대로" (흠정역)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들 각각을 위하여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에서 지켜지기를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그들이 지은 죄가 있다면 그것을 용서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주님 앞에서 기도로 지키는 것은 얼마나 절실한 일인지 모릅니다. 절망이 마음 속 가득히 차서 기도하기도 어려운 때들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처에 널린 유혹들에게서 자녀들을 지켜달라고 끊임없이 그들에 대해서 아뢰십시오. 자기 가족이 일생생활을 지속해나가는 동안 욥은 그들을 위하여 그침 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는 맡은 책임이 별로 없고 따라서 기도할 시간을 많이 확보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욥은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농부에다가 상인에다가 대토지의 소유주였습니다. 그에게는 관심을 쏟아야 하고 시간을 온통 내주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식들의 영적인 풍요로움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이미 자녀 양육을 끝냈고 그들은 자기 손을 떠났다는 생각 가운데 어깨나 으쓱거리면서 흡족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위해서 쉴 새 없이 기도했습니다.
자녀들의 질문에 대답해줌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출 13:14).
어린 시절에 자녀들은 부모가 해주는 말을 무조건 받아들입니다. 어떤 것이 "나쁘다"고 하면 그런 줄로 압니다. 비록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을 때에도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상황이 달라집니자. 자녀에게 있어 부모는 더 이상 오직 하나의 스승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차츰차츰 자신들이 가르침 받은 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즉시 물음들이 생겨나며,그것들은 거짓 없이 명확하게,십대가 이해할만한 방식으로 답변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던져지는 모든 질문에 그 질문은 항상 있어왔기에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아이들은 질문을 던지도록 가르침 받으며, 만족스런 답변을 주지 않는 것으로 그 질문을 물러가게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즉시 답변을 들려줄 수 없다면,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서 가능한 한 빨리 대답을 찾아내야 합니다.
당신이 믿고 있는 바의 근본 원리들에 관련된 질문들에 답해줄 수 있나요? 이 점을 확실히 하는 것은 최우선적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집회들에 참석할 때, 이러한 많은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 역시 성경이 탁월하게 가르쳐지는 곳이 되어야만 합니다. 자녀들이 자라갈수록, 그들은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한 문제들을 가정 안에서 물어볼 것입니다. 혹은 보다 어렸을 때에 가르침 받았는데 그 때는 완전히 이해할 능력이 없었던 사항들을 들고 나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내려주신 교훈들을 보면, 수많은 질문이 어린 자들에게서 나올 것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4절에서는, 아이들이 유월절과 무교절 준수를 자세히 눈여겨보고서 "이것이 어찜이냐?" 라고 물어볼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어떻게 건져내셨는지를 저들에게 대답해 주어야 했습니다. 부모들은 구원의 위대한 메시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무교절은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나요? 그것은 애굽에서 구출 받은 이들이 죄를 피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가질 것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부모들은 복음의 메시지뿐 아니라 자신들이 왜 그와 같이 살고 있는지의 이유도 설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가정의 아이들은 가정 안에서 뭔가를 본 까닭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날의 아이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이는 자기 가정 안에서의 생활방식을 그들도 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 방식은 다른 곳에서 흔히 보는 모습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메시지에 관하여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매주 첫 날에 왜 떡을 떼는지 물어올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들과 갈 수 있는 곳들이 왜 자신들에게는 불허되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유년기 아이들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던 아주 단순한 답변이 좀 더 커버린 이 십대들에게는 충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 설명들은 반드시 성경을 근거로 해서 제시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당신의 생활방식이 그저 현대사회와 접촉한 데서 비롯된 습성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자녀들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을 대강 넘어가거나 가벼이 다루는 것은 해당 문제에 대하여 그릇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아이들은 진정한 해답을 찾을 것이며, 아직 대답을 들어보지 못한 영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질문들이 무시를 당한다면, 그 질문자의 영적인 삶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줄 기회가 상실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그 관심들은 어느덧 사라져 버립니다.
자녀들의 존경심을 유지시킴
"자기 집을 잘 다스려" (딤전 3:4).
십대 시절이 끝나는 때까지 부모들은 자녀들이 자신들을 존경하도록 유지시키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 시기에 십대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훨씬 더 유심히 지켜봅니다. 그러면서 부모의 삶에서 어떤 모순이 나타나면 그들은 금세 알아차립니다. 심지어 부모가 자신들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을 때조차 그렇습니다.
어떤 활동의 방향을 설정할 때 반드시 아이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를 빛 가운데서 감안해야 합니다. 당신의 마음에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간증에는 맞지 않게 보일 수 있는 것은 물리치십시오. 가정 안에서 얼마나 많은 분개심이 축적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행사에 초대를 받았는데 그것을 거절하라고 부모가 요구하는 경우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부모가 비슷한 행사에 다녀온 사실을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 말을 아이들은 틀림없이 참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 일은 아이들의 영혼에 잠재적인 위험요소로 자리 잡습니다. 연륜과 성숙을 갖춘 당신은 그런 행사에 참석해도 해를 입지 않을 분별력을 가지고 있겠으나, 이런 일에 대해서 부모는 언제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피해야 할 또 다른 함정은 부모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해오지 않았으면서도 자녀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을 믿고 받들라고 주장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자녀들" 에 관한 장에서 극히 중요한 사실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는, 언젠가 영적인 삶에 도무지 흥미를 보이지 않는 아들딸을 인도할 날을 맞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조언을 해주는 부모들이 성경에 대한 흥미를 그들 자신은 진즉에 보여주지 못했다면, 그들은 조만간 자신도 행하지 않는 일을 타인이 하도록 기대하는 거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퇴보한 삶을 살다가 주님께로 돌이킨 부모들은 자신들이 왜 주님께 돌아왔는지를 말해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현재 즐기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의 유익들을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마음의 변화가 워낙 급하게 이루어진 나머지 그것이 오직 가족과 대화할 때의 확실한 공격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라면, 그런 말들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십대 자녀의 행동에 나타난 어떤 잘못을 보고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그 자녀가 혹시 자신이 먼저 보인 행동을 그대로 따라서 하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 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강조되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들의 방침이 아니라 부모의 방침에 따라서 가정생활이 영위된다는 사실을 부모들이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루기 어려운 상황들이 있다고 해서 아버지가 책임을 내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자기 집을 잘 다스리기를" 거부한 탓에 문제가 발생할 때 그는 아내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시기 동안에 아이들이 순응하도록 기준들을 슬그머니 느슨하게 하는 것은 쉬운일입니다. 그 기준들이 요구되고 거절될때 그에 뒤따르는 못마땅함과 어색함이 너무나 곤욕스러워서 부모들은 항복을 표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에 관한 슬픈 예에서, 우리는 자기 가족의 존경심을 잃어버린 한 아버지를 봅니다. 롯이 오래 전 소돔에 거처를 마련한 이후로 그의 가족은 그가 행한 타협을 지켜보았습니다. 12-14절에서 우리는 그의 가족이 집에서 살던 두 미혼 딸들, 최소한 둘 이상의 기혼 딸들(사위가 최소한 둘 이상이었기에)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소돔 성에 떨어질 임박한 심판에 대해 롯이 사위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는 이러한 자로 나타났습니다. "농담으로 여겼더라." 사위들은 그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장인이 전해준 소식은 분명 고려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여겼습니다. 지나간 세월이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한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그들 편에서 볼 때 롯은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생애에 관한 신약성경의 평가는 그가 자신의 주위환경에서 보는 것으로 인해 고통 받는 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롯이라는 인물의 그러한 면을 거의 알지 못했던 듯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망치라는 그의 간청을 뿌리쳤습니다. 그 결과는 완전한 파멸이었습니다. 오직 롯과 그의 두 미혼 딸들만 심판이 내리기 전에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벌어진 사건들을 보면 심지어 그 두 딸조차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없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특정한 '역할 모델'을 따르도록 끊임없는 조언을 듣습니다. 이것은 아마 언제나 그래왔을 터이나, 현대적 통신 수단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젊은 층의 지도자로 인정받는 이들에 대하여 보고 들을 기회가 많이 생겼습니다. 슬프게도, 이러한 "지도자들" 중 다수는 따르면 유익하지 못한 류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매력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따르고 싶어 하는 모본을 남겨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주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의 가치를 가르쳐줄 수 있고, 그런 삶이 얼마나 참된 만족을 주는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본은 오로지 아들에게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또 어머니의 본은 오로지 딸에게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도 결코 안 됩니다. 경건한 아버지 및 경건한 어머니의 모본은 아들들과 딸들 모두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우리는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생애가 자기 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 다윗은, 시편 86편 16절에서 주님께 아뢰는 중 자신이 "주의 여종의 아들"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주님의 종으로 회상하였습니다. 여종은 자기 주인이나 여주인이 무엇을 원한다고 지시할 때를 기다리면서 언제든지 그 옆을 지켜 서있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의 뜻이 하달되면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즉시 달려갑니다. 다윗의 어머니가 보여준 이와 같은 모본은 자기 아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요? 그녀는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나, 아들은 주님을 향한 어머니의 순종의 행위와 헌신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훗날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게 될 자를 교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