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간증] 믿으면 하겠네

행복자 2018. 8. 22. 14:18

[간증] 

                       믿하겠네

                                                                                                                        -정성희(일산교회)


   저는 7남매의 4째 딸로 부산에서 태어 났습니다.

   아버지는 부산 항서교회 장로이셨고 어머니는 아들 못 낳아 애가 타는 장손의 맏며느리였습니다. 자라면서 아무방해나 의심이나 갈등 없이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많은 동서, 시누이들 사이에서 '아들 부럽지 않는 딸' 키우기에 애썼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원하시는 학교에 잘 붙어주고 말썽 부리지 않는 '엄친아'로 자랐습니다. 학교 졸업 후 명문 남자 학교로 발령 받아 음악 교사가 된 저는 부모님의 기쁨이요 자랑이었습니다. 그 때 늦은 나이에 중매로 결혼했습니다. 저의 구원은 시집 잘 가 얻은 복입니다.

   미리 긴장 많이 한 경북 선산 시집은 따뜻하고 편했습니다.

   세상에서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시집, 자매들이 '시편'도 안 읽는다는 시집.

   아들이 늦도록 장가 못가다가 색시를 데려오니 곰보고 뭐고 따질 게제도 못 되고, 거저 저를 예쁘게만 보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는 부엌에 들어가면 쭈그리고 앉아 추운 겨울이라 아궁이에 불 때는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타는 불을 드려다 보며 엄마가 하시던 "떡 못하는 며느리는 떡 솥에 불이나 땐다." 는 말씀이 생각나 아무도 나를 건들지 않았는데도 '내 신세가 그 짝이다' 하고 엄마 생각에 눈물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이 시집인가 봅니다.

   어머님은 늘 저를 아버님 앞에 앉아 교제의 시간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때는 1:1교제가 무엇인지, 왜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지요. 여러 형제들과의 개인교제 또 예배시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기도하고 그것도 몇 차례씩이나, 차라리 설교를 하는 것이 낫겠는데. 이 모든 것이 학을 떼게 지루했습니다.

   아버님이 "애야! 너가 '하'씨한테  빛을 많이 져 도저히 갚을 수가 없는데 '예'씨가 너 빛을 다 갚아주었다." 내 큰 빚 보따리를 '예'씨가 없애주는 그림을 그리시며 설명을 하시는데 딱하게도 저는 '하'씨 '예'씨가 하나님 예수님인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 당시 교파에는 복음이 거의 없었기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서울 저희 집에 자주 오셨습니다. 제가 부엌에 가면 부엌, 거실에 가면 거실에, 다니시며 하나님을 전하고 생활간증을 하셨습니다. 어떤 간증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 하십니다. 아버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그야말로 바로 생활이 복음이요, 교제요, 말씀이요, 그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저의 친정 쪽 예수 믿는 것은 집에서 성경 볼일도 없고, 스트레스 안 받고 예수하고 끈끈한 관계 맺는 일이 없으니 편하게 재미있게 성가대하며 잘만 다녔는데 왜 이렇게 골치 아프게 예수 믿는지 모르겠다. 적당히 슬슬 다니면 될 것을. 귀에 딱지 앉을 구원, 구원... .

   종교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종교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믿어도 정신을 차리고 믿지 저렇게 엎어져서 코가 꿰어 믿기는 아니 할 것이다.

   이런 저런 수년이 흐르는 동안 집회, 교제, 오산 사후동 수양회 등으로 내가 보게 된 것은 '이 사람들 속에 무엇이 있다'였습니다.

   저의 눈을 뜨게 해준 분이 아버님과 큰 시누이었습니다. 두 분의 인간적인 연약, 선악의 문제를 떠나 이분들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두 분 공통점은 '말이 많다'였습니다. 달변이라기 보다 목구멍까지 차있는 믿음이 틈만 있으면 나옵니다. 물 흠뻑 먹은 스펀지의 뚝뚝 떨어지는 물을  막을 수 없듯이 저절로 나옵니다. 시도 때도 눈치도 없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모르는 영혼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이 영혼을사랑합니다. 하나님과 전연 상관없는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꼭 하나님이 연결되고, 복음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자존심, 시간, 물질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0-21) 였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장).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 6장)

   나는 육으로 난 것은 분명한데 영으로 난 체험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믿는 것은 헛것이다 나도 구원받아야겠다.' 구원받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버스에 앉아 밖을 보며 '저 사람들은 구원받았을까?' 생각했습니다.

   1977년 8월 구원 받기 위해 한탄강 여름 수양회에 갔습니다. 밥 타 먹기 위해 식판을 들고 줄을 서있는데 구원도 못 받은 것이 밥 먹겠다고 서있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텐트를 땅위에 쳤기에 얇은 바닥 밑의 돌이 배기는 불편한 잠자리, 거기다가 비가와서 새는 천막, 또 누워 있는 바닥 밑으로 흐르는 물, 아는 사람도 없고, 구원도 안 주시고, 아이도 보고 싶고, 이래저래 집에 가고 싶은 마음으로 곤고해졌습니다.

   수양회 끝날 낮에 어느 형제와 교제했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으나...거기서는 아무 권능을 행하실 수 없어...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 이에 촌에 두루 다니시며..." (막 6장).

   딱 걸렸습니다. 내가 비록 구원은 안 받았지만 우리 집이 예수 믿고 나를 낳았다고 목사님이 내 이름에 성(聖)자도 넣어주시고, 40년 넘게 교회 다닌 세월이 얼만데 나는 예수님과 '한솥밥'으로 생각했는데,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벳새다야...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가까이서 가장 많이 듣고 보고 했던 사람이 오히려 배척했으니 나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시며 나한테는 아무 권능을 행하실 수 없어 떠나시다니요? 얼마나 놀라고 두렵고 떨렸던지, 주님이 나를 떠나시다니 '아니, 아니' 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죄에 대하여라 함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

   말씀이 심령을 찔러 쪼개시며 '믿지 않는 죄'를 지적하시며 세상의 가치관과 내 생각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을 갈아 엎으셨습니다. 이 무서운 죄를 예수님이 모두 치워 주셨다니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장).

   확신과 평안을 주셨습니다.

   구원 받은 후 첫 변화는 찬송가와 말씀에 눈이 뜨이고 귀가 뚫렸다는 것입니다. 그 많이 불렀던 찬송가 가사, 어떻게 그렇게 뜻도 모르고 입으로만 불렀을까요.

   그렇게 많이 울었던 눈물이 아무 해결도 못해주었습니다. 귀가 뚫린 제일 첫 찬송이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 였습니다.

   눈 뜨인 첫 말씀이 고린도후서 7장 말씀이 내 마음을 찌를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두렵게 하며...사모하게 하며. 열심 있게 하며... ."

   그 때 이 말씀이 바로 '꿀 송이보다 달다'였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싶었던 그 많던 의문과 불평은 하나님을 만나자 다 달아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