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전략] 하나님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5)
[전도전략]
하나님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라(5)
- 허 윤옥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 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57).
어린이 전도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더욱 감사가 되는 것은 필자도 어린이 전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자신에게 가르치는 계기가 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번에는 탕자의 돌아오는 시기에 대하여 생각하므로 오늘날 어린이 때에 구원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먼저 탕자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탕자는 가진 돈이 다 떨어졌을 때 즉시 돌아왔어야 한다. 그랬다면 고생을 덜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돈이 떨어졌을지라도 자신감에 넘쳐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직장을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도시에 직장은 없었다. 또 도시에서 직장이 없을 때 돌아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시기를 놓치고 있었다. 이때에도 그는 돌아올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 기회도 놓치고 만다. 그후 그는 들에 나가서 돼지가 먹는 것으로 먹고 있었다. 그때에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그때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돼지가 먹을 것조차 없어 굶어죽게 되니 돌아왔다. 탕자는 더 나은 기회들을 놓치고 결국 많은 고생 후에 돌아왔다. 탕자는 자기의 생각 혹은 자존심, 아비에 대한 미안함 등으로 돌아올 기회를 미루다가 결국 최후 극단적 상황에서 돌아왔다.
우리 전도자들은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가능한 일찍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고생을 덜 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린 나이에 하나님께 구원받고 헌신된다는 것은 여러 각도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유익한 일이 아닐 수 없다.인간은 태어나면서 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다. 아득한 옛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거스려 떠나온 이후 고통과 괴로움은 대대로 유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을 인력으로 막을 자 없고 거스를 자 없다. 오직 하나님께 돌아와서 원상회복하는 길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전도자들은 인간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원인과 상황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구도자들을 그 고통에서 건져내야할 책임이 있다. 단순히 하나님을 떠나서 고통을 당한다고 하는 말만으로는 아이들이나 모든 구도자들이 깨닫기 쉽지 않을 것이다. 탕자가 집을 나서면서부터 고생이 기다리고 있음같이 인간의 삶에 고생의 길이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 5:7). 인생이 고난이라면 일찍 구원 받는 것은 그만큼 고난에서 속히 건지는 것이 된다. 동서남북을 분간하지 못하고 목표를 모른 채 방황하는 인생을 하루라도 속히 그 가운데서 해방시켜 삶의 목적을 알고 방법을 알고 가치를 알고 살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아이들 전도의 가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저들이 고통 중에 살다가 결국 지옥에 가는 것임에랴. 어린이 전도는 참으로 그 가치를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는 놀라운 것이다. 이와 같은 어린이 전도를 위하여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논하는 일은 참으로 가치가 있음이 분명하다.
필자가 어린이 전도를 써가면서 참으로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제 어린이 전도의 시기와 그 중요성에 대하여 살펴보기 바란다.
먼저 어린이는 가능한 어렸을 때 구원 받는 것이 좋다. 유치원 때에 구원을 확신하고 그 확신을 평생에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국내외에 많다. 우리나라에 59년도에 복음을 가지고 들어오셨던 아더 제임스 선교사님도 7살에 구원 받았다고 간증하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어려서 구원을 확신하고 성장하여 한국의 남북 전쟁의 소식을 듣고 눈물로 기도하여 한국에 복음을 들고 왔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가 어려운 것을 생각하여 손수 여비를 벌어서 단독으로 오신 것이다. 주님은 그를 통하여 현재 한국교회를 일으키신 것이다. 한 사람이 어려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증인이요 한국교회가 모두 증인이다.
어린이는 어른들보다 영악하지 않고 순수하여 쉽게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다. 흰 백지에 글씨를 쓰는 대로 쓰여지는 것처럼 그렇게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이 시기가 지나가면 점점 사탄이 어린이들의 깨끗한 마음에 글자를 쓰기 시작한다. 사탄의 거짓 사상이 마음 종이에 쓰여지기 시작하면 전도는 점점 어려워져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쓰여진 글을 하나하나 지우면서 써야 하기 시작하면 전도는 점점 어려워져 가는 것이다. .
좀 더 다른 각도에서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새로운 밭을 누가 차지하느냐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사탄이 새로운 밭을 접수하여 거기에 악한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면 곡식을 심어도 나지 않거나 나도 약하여 결실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쓸모없는 잡초를 뽑아내고 다시 밭을 가꾸어 새롭게 하여 심으려니 그 만큼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깨끗한 밭. 한 번도 심어 본 적이 없는 밭에 순수한 복음의 씨앗을 심으면 순수하고 튼튼한 싹을 나게 할 것이다. 또한 다른 잡초가 발붙이지 못할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 로 어린이 전도는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초등학교 때 구원받도록 모든 교사들은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노력하고 연구해야 한다. 아이들을 다루는 교사들이 의무적으로 하는 듯한 모습들을 보는데 진정 아이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기도가 있어야 함을 한 번 더 밝혀 두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놓치면 다음으로 중학교로 진학하는데 이때에도 비교적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어서 아직은 해볼만하다고 여겨진다. 현재 주일학교나 학생회에서 다루고 있는 영혼들의 대부분이 믿는 부모를 두고 있는 경우이기 대문에 더욱 아직은 소망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저들은 일단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마음을 두고 있으며 성경의 사실성을 믿고 있으니 저들의 상태는 구원을 받는데 무리 없는 순수한 상태라고 판단하여도 괜찮은 것이다. 또한 대부분 구원을 시인하고 있는 상태에서 교회에 출입하고 있으니 구원의 가능성은 좋은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초등학교에 이어 구원의 확신 단계로 연결되어 가는 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 점점 세상의 학문이 들어오고 있는 중이며 이상한 논증이 점점 머리를 차지하는 시기이기에 조심해야 하며,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인격은 감성에서 지성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이며 그것은 구원의 가능성이 점점 어려워져 가는 상태임을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란색을 그냥 노란색이라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나이가 초등학생이라면 중학교에서는 왜 꼭 노란색이라고 해야만 하는가. 다르게 말하면 안 되는가 하고 한번쯤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이것은 복음이나 진리를 받아들이는데도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함으로 받아들이는데 장애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고등학교로 진학하면 어떻게 되는가? 고등학교에서는 배우는 지식도 깊어가고 생각도 점점 논리화 되어 가면서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 갈 위험이 있다.여러 가지 지식이나 견문을 통하여 복음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를 쌓아가기도 한다. 구원을 어렸을 때 받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등학생은 노란색을 왜 노란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가? 처음에 잘못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라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사물의 근원을 살피며 이의를 제기하는 나이가 되어 더욱 전도가 어려워진 나이가 된 것이다.그러므로 자기가 배우고 있는 공부에 대하여도 객관적으로 생각하려는 나이가 되면서 자기는 지금까지 너무나 주입식으로 복음을 들어왔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할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현상도 이때에 나타난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성경의 진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하는 현상인 것이다. 이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 전도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기회는 남아있고 희망은 있다. 대부분 이때까지도 성경이 사실이고 진리라는 쪽에 마음에 기울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성경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부인하려는 태도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허나 대학을 가면 일단 자신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다. 최고의 학부를 다니는 지성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것이 문제다. 성서적 입장에서 보면 대학이나 대학원도 초등학문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약하고 천한 것이 세상 교육인데 진리를 찾는 순례자의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는 것이 문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질 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 2:8).
유소년들이 쉽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저들의 머리에 초등학문이 덜 세뇌되어 있다는 것이리라. 이제 대학과 그 이후로 가면 노란색 논쟁도 달라진다. 최초의 노란색 명명자를 찾아내어 왜 그렇게 해야 했는가. 그의 인격이나 이성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가 그를 맹종하여야 하는가 하고 따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초등학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교만해지는 것이다. 교만은 인격적인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 많아지므로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교만도 얼마든지 불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인격은 훌륭한데 많은 지식이 그를 교만하게 하여 그의 인격과 삶을 망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지식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잘 통제하려는 노력과 기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권한다. 학생시절 특히 낮은 학생 시절에 구원 받기를 위하여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대학이나 그 후는 늦다. 실패할 확률이 많다. 대학 이후에 구원 받게 되는 경우는 이제 세상에서 오랫동안 헤매다가 돌아올 확률이 많다. 이때에 저들은 오랜 세월 방황하면서 어려서 들었던 말씀에 갈등하다가 결국 탕자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필자는 종종 그러한 구도자들은 만나 전도하는 일이 있다. 당장에는 구원 받지 못하였을지라도 부지런히 복음을 심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저들의 삶에 고난이 닥칠 때 저들은 절이나 다른 종교로 가기보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다.
대학 이상 높은 수준에서 방황하는 부분에 있어서 철학적인 사고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본래 철학은 인간의 지능을 의지하여 인간의 모든 문제를 고찰하여 가는 학문이므로 인간의 지능이 기초가 되어있다. 사전에서 철학은 "근본적인 믿음의 근거에 관한 비판적 검토이자 그러한 믿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기존 개념들에 대한 분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간의 지능에 의하여 근본적인 믿음을 재검토하기 시작하면 회의론에 빠질 위험이 분명 있는 것이다. 사람은 불확실성을 근거로 살고 있다. 불확실한 현상 속에서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과정이 삶이라고 할 때에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확실한 것을 추구할 수 없음이 우리들의 믿음이다. 그럼에도 과학이나 철학은 불확실한 인간의 능력으로 진실을 알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학문인데 우리의 방황하는 양들이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흔들리고 곁길로 가기도 한다.
우리 학생들을 전도하는 전도자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아이들이 일찍 구원을 받아 이와 같은 불행한 길로 가지 않도록 혼신을 다해야 한다. 많은 아이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한 문제들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아이들의 구원 문제를 선생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목자의 입장에서, 아비의 입장에서 고민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노력과 기도를 좋아하신다.
사랑하는 교사들이여, 우리가 현재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일하는 것과 인식하지 못하고 일하는 것의 차이가 극단적이라고 하는 것을 새삼 강조하여 무엇 하랴. 이 시대가 악한 시대인데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는 더 어둡고 무섭고 힘든 시대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들이 분명한 구원 속에서 놀라운 감사와 찬양을 배워가면서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저들의 앞길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길이기를 위하여 기도하자. 우리의 눈물과 헌신과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아이들은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면 이것은 실로 영광스러운 길이다. 이 영광스러운 길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줄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