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소식] 외모지상주의에 망해가는 인생들이여.(2)
[기쁜소식]
외모지상주의에
망해가는 인생들이여. (2)
- 허윤욱
"라반의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딸 라헬을 위하여 와삼촌에게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 (창 29:16-19).
세상은 외모로 취하고 외모에만 치우쳐 진리를 만나지 못하고 결국 망하고 만다고 성경은 경고한다. 저들은 외모만 생각하고 외모로만 판단하여 진리를 만날 수 없는 길로 달려가다가 결국은 망한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진지하게 이 글을 읽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는 바이다. 지난 번에 이 주제로 생각해보았으나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어 다시 살펴보기를 원한다.
본래 사람의 본능을 생각해보면 본래부터 외모를 중시 여기는 습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동서양이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야곱이 레아보다 외모가 뛰어난 라헬을 택한 것은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그림이라 생각된다. 사람이 어지간하여 외모를 취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고 여겨진다.
당나라 때 관리를 모집하는 기준이있던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생각해 보아도 사람은 외모를 우선으로 하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람의 인격이나 실력보다 몸을 우선순위에 놓아야 하는 인생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외모지상주의도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대에는 외모지상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
오늘날 하나님을 찾는 신앙의 길에서도 사람들은 외모를 취하는 약점으로 인하여 얼마나 무서운 불행의 길을 스스로 취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외모를 취하며 망해가는 인생들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뜻밖에도 외모로 취하는 습관 때문인 것을 아는가. 사람은 내용을 보기전에 외모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는 경솔한 습관이 있다. 그러한 사건들은 역사에서도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라는 전도에 반발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하나님을 보았느냐?" 고 따진다. 물론 지옥이나 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보지 못하였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눈앞에 나타난 외적인 것으로만 판단하려는 습성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니 못 믿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눈으로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필자에게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것도 보았다.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사람이 눈으로 보이는 것만 믿고 살 수 있는가? 눈으로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우리의 삶에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저들이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직하게 분석해 보자면 우리의 눈은 부정확하여 보는 것은 실상이 아닌 허상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눈은 물체 자체를 보지만 그 속에 혹은 그 이면에 있는 진실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간단한 실험으로 이것은 드러난다. 필자는 사과 바구니에 몇 개의 사과를 잘라서 먹다가 분명 조금 전에 먹은 것은 맛이 좋았는데 더 색깔 좋고 나아보이는 다른 사과가 터무니없이 단맛이 없는 것을 경험하고 이상해서 논하여 말한 적이 있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했을 때의 약점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했을 때의 약점은 얼마든지 있다. 외모로 보이는 대로 판단하여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찌 말로 다하랴. 사람들은 왜 사기를 당하는가? 외모로 판단하고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 보다가 내면의 거짓을 보지 못하여 사기 당하지 아니하는가.
또한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가는 것은 유물론적인 사상이다. 보이는 것의 가치만을 좇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단순하게 생각하여 사람이 몸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없음은 이미 아는 사실이지 아니한가. 그러나 사람들은 몸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유물론적 사상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정신이 보이는 육체를 지배하는 것을 알고 있지 아니한가. 천국이 보이지 아니하고 지옥을 볼 수 없어서 믿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발상인가.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믿는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논리적이지 못한 말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어서 믿지 못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여주어도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필자는 저들이 왜 그럴까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저들은 외모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저들은 성경이 그냥 기독교의 경전일 뿐이며 허무한 전설에 근거를 둔 역사책일 뿐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세상의 많은 전설을 기록한 책으로 여기거나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역사책으로 보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성경이 창조에 관한 비밀을 밝히는 특별한 책인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이것을 무시하는 것이 끔찍한 실수임을 금방 알 수 있으리라. 그것은 곧 성경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잠시만 생각해도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다. 조금의 노력이나 관심이 없어서 영원한 불못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사랑하는 독자여, 성경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그냥 세상의 많은 책 중의 하나가 아니다. 수많은 교훈적인 서적 중의 하나가 아니다. 나라마다 있는 전설을 모아놓은 책이 아니다. 훌륭한 사람들이 지혜를 짜내서 연구하여 기록해 놓은 지혜서가 아니다. 천지 창조의 비밀을 밝혀주는 유일한 책이다. 인간 세계에서 유일한 진리의 책이다. 성경을 모르고서 어떤 책을 읽었다 해도 무식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여 보라. 인간이 근본을 모르고 짐승을 인간의 시조로 가르치는 것이 무식의 소치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의 무개념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여! 성경의 바깥에서 방황하다 나름대로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지옥으로 가지 말고 성경의 속에 들어가서 진리의 진수를 맛보고 하나님과 함께 영생복락의 길로 들어가기 바란다. 사과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사과의 맛을 논하랴. 책을 읽어 보지 않고 어찌 책속의 가치를 알랴. 들어가 보아야 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성막이 그들 중에 있었다. 그 성막은 겉으로는 물돼지 가죽으로 만들어져 우중충하고 초라하게 보였지만 그 속에는 금과 온갖 귀한 재료로 꾸며져 아름답게 장식되어져 있었다. 성경도 이와 같아서 겉으로 평범한 책이거나 한 나라의 역사책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는 우주를 품는 책이요 세상의 모든 비밀을 다 드러내는 책이요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풀어내는 책이다. 사람의 속에 감취어져 있는 모든 비밀과 어려운 문제를 다 해결해내는 책인 것이다. 또한 인간의 내면에 감취어져 있는 깊은 고뇌의 근본을 밝혀내는 유일한 책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세상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또 이와 같은 말씀에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인가? "모든 문제를 다 풀어줄 것이니 다 내게로 오라. 무슨 문제가 있든지 상관이 없다. 다 내게로 오라.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상관이 없다. 다 내게로 오라." 누가 감히 이와 같이 말할 자 있으며, 누가 감히 다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필자는 얼마 전에 어느 전도집회에 가서 이 말씀을 주제로 복음을 전했다. 본래 이 말씀을 준비하지는 않았는데 주님이 이 말씀을 주셔서 전도했다. 인생론을 중심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것들을 살피면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고뇌와 슬픔과 고통을 풀어 나갔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제를 온전히 풀어 줄 수 있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없음을 증거했다. 그런데 그 집회에 한 아가씨가 3일 후에 자살의 날을 잡아놓고 있다가 구원을 받았다. 또 한 아저씨는 농약을 차에 휴대하고 다니면서 죽을 날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가 주님 앞에 나아와 새사람이 되었다.
성경은 위대한 책이다. 책 중의 책이다. 사람의 문제 중에 풀 수 없는 문제가 없다. 성경은 모든 인생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다.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고 고통을 풀어주되 그 근본적인 문제부터 풀어주는 신기한 책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책이다. 이 성경을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성경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의 선택에 따른 열매를 먹으리라.
우리는 믿음 자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이미 밝혀진 사실만 믿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보아 인생의 길에 스릴도 없고 가치도 적고 멋도 없는 길이 아닐까. 사람들은 복권 사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복권의 가치 때문이다. 아직 대단한 효과가 나타나지 아니했지만 복권 당첨의 효과는 대단하다고 여기고 그것을 기대하는 가냘픈 믿음으로 복권을 매일 구입하는 것이다. 복권은 극단적인 것이지만 신혼부부가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고 그 믿음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이 100% 확률을 가지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00% 확률을 믿고 기다리는 믿음이 있다면 어떠할까.
이제 결론적인 말을 하고 싶다. 성경은 사실이다. 다만 사람들이 외모적인 생각만 가지고 자기의 착각으로 성경의 놀라운 가치를 상상조차 해보지 못하고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인생들을 위하여 제시하고 있는 놀라운 길에 한 발도 내디디지도 못하고 그냥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겉만 보고 생각하기 좋아하는 인생의 실수라는 사실을 생각해 주시기 부탁한다.
삶은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여러분의 생각이 여러분을 이끌어 감을 잘 알고 있지 아니한가. 지옥 밖에서 지옥을 보지 못하고 지옥으로 들어가는 슬픈 인생들을 생각하여 보라. 보이지 않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여러분에게 필요하다. 화장터에서 육신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영혼도 지옥 불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아야 한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외모만을 찾는 인생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과 성경과 지옥과 천국을 비웃었던 사람들이 멸망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행 13:41).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한다. 첫째는 멸시하는 모든 자들이 놀라고 망한다는 경고다. 지옥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며 성경을 멸시하는 자들이 놀라고 망할 것이다. 저들이 왜 놀라고 망하는가? 저들이 외모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멸시했던 모든 것이 사실로 드러날 때에 놀랄 것이다. 저들은 심판대 앞에서 놀랄 것이다. 저들은 지옥 앞에서 놀랄 것이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서 엄위한 심판을 받을 때 저들은 기절할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또한 두 번째로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외모만 취하며 내면을 보지 못하는 소경 눈으로 어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은 실상을 보지 못하고 겉만 보고 반대하며 멸시하다가 망할 것이다. 성경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다.
사랑하는 독자여, 오래전 믿음의 선배 야곱이 외모를 취하여 겪었던 실수를 겪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여러분의 외모로 말미암은 선입견을 버리고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들어서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바란다. 성경속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만남으로 여러분의 영원을 천국에서 보내기를 기도한다. 사람은 어차피 죽어야 하며 죽음 이후에는 두 길이 있다. 여러분의 현명한 선택이 있기를 기도한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렘 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