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 안에 서있음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 안에 서있음
J. N. 다비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 하였거니와 이 은혜 안에 너희가 서있느니라" (벧전 5:12).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은혜의 하나님"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우리의 신분은 "주의 은혜로움을 맛 본" 것에서 유래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우리의 마음은 천연적으로 "주께서 엄한 사람이심을 제가 아나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천연적으로 은혜의 하나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하시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는 죄를 하나님께서 도저히 참지 못하시는 끔찍하게 나쁜 것으로 전제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불의하고 악한 자가 된 후, 자신의 힘으로 서둘러 자신의 행위를 고치고 자신을 개선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면 은혜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은혜로우시다는 바로 그 사실은 죄가 너무나 악해서 죄인인 사람의 상태는 철저히 파멸되고 소망이 없으며, 오직 거저 주시는 은혜만이 그를 위하여 역사하며 필요를 채워 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생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것에 의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분이신가를, 곧 "모든 은혜의 하나님" 이심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죄 많은 사람이며, 주님께서 내가 범한 모든 죄와 그 죄의 가증함이 어떠한지를 아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내게로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나의 죄보다 크시며, 나의 죄는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 합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분으로 알고 있던 그 주님이 바로 내 삶의 일상을 다루셔야 하는 분이며, 주님께서 나를 다루시는 모든 다루심은, 동일한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영적 성장의 위대한 비결은 주님을 은혜로운 분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나를 향하여 느끼시며 베푸시는 사랑이 바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가지셨던 사랑임을 아는 것은 얼마나 보배로우며 나를 강건하게 하는지요.
이 진리는 우리의 삶의 가장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사용되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예를 들어 내 안에서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악한 기질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는 친구 되신 예수님께 그것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러면, 나의 필요를 위하여 효능이 그분으로부터 나옵니다. 믿음은 항상 이와 같이 단순히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유혹을 대적해서 역사해야 합니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악한 기질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참된 힘의 근원은 주님의 은혜로우심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연인(自然人)은 항상 그리스도를 힘과 모든 축복의 유일한 근원으로 믿지 않습니다. 내 혼이 친교를 벗어났다고 가정해봅시다. 자연인의 마음은 "그리스도께로 나가기 전에 반드시 이 문제의 원인을 바로 잡아야겠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이를 알고 계십니다. 곧 해결책은 우리의 어떠함 그대로 즉시 주님께로 돌아가서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의 혼을 회복시키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오직 그분 안이며 그분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분 앞에서의 겸손이 유일한 참된 겸손입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 우리의 어떠함 그대로 있을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다만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혼에 지속적인 안식을 주는 이는 자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믿음은 결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안식의 근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 관해 생각하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붙잡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안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그분으로 사로잡힌 우리의 혼과 눈과 마음에 보배로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혼과 눈과 마음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헛됨과 죄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효과적으로 벗어나게 됩니다. 이는 또한 죄와 마음의 부패를 대적하는 우리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내가 내 안에서 무엇을 보든지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것은 죄이며, 나를 낮추는 것은 자신의 죄와 수치를 생각하며, 그것들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과 그분의 뛰어나심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처리하고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잊어야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잊어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잊어야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계속해서 은혜를 인식하는 가운데 있으며,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을 실제적이고 지속적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은혜의 충만, 곧 우리가 서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은혜의 권능과 인식 안에서 행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 있을 때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멀어지는 순간, 항상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생각은 결코 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생각과 은혜의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권리가 아무리 작고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순수하고 값없는 은혜, 곧 "하나님의 은혜" 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은혜에 따라 모든 것을 측량할 수 있는 것은 측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과의 친교안에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때, 그 어느것도, 심지어 교회의 상태조차도 우리를 흔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영역과 현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은혜에 대한 단순한 생각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힘의 참된 근원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은혜를 인식하는 것이 모든 거룩과 화평과 영의 고요함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는 무한하고 충만하며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잠시라도 하나님의 임재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은혜를 참되게 인식할 수 없으며, 은혜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밖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자 할 경우 단지 방종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한 단순한 사실을 바라볼 때, 그것은 무한하며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존재이든(우리는 우리의 어떠함보다 더 나빠질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기쁨이나 평안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어떠함에 의존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의존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와 악을 전제로 합니다. 은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죄와 악이 제거되었다는 복된 계시입니다. 단 한 개의 죄가 하나님께는 천 개의 죄보다 더 끔찍합니다. 아니, 세상에 있는 모든 죄보다 우리에게 더 끔찍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떠함에 대한 충만한 인식과 함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로마서 7장에 기술된 상태는 다시 살아난 자의 상태이지만, 그의 모든 논증은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는 은혜에 이르지 못하고 멈춰 있습니다. 그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비록 그가 나쁜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오직 그를 향한 사랑이라는 단순한 사실에 이르지 못하고 멈춰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나(I)", "나(I)", "나(I)"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나(I)와 나의 상태가 믿음의 대상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은 결코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직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것만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실로 지극히 큰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를 확대할 뿐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은혜는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관련이 있지 우리의 어떠함과 관련이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은혜의 대상과 효과가 우리의 혼을 하나님과의 친교로 인도하고, 우리를 거룩케 하며, 또한 우리의 혼이 하나님을 알도록 하여 그분을 사랑하게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거룩의 참된 근원이 됩니다.
은혜의 승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적개심이 예수님을 이 땅에서 쫓아냈을 때, 그분을 배척한 자들의 죄들을 구속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인간의 죄가 충만에 이르렀기에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에 이른 것을 봅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주저한다면, 나는 이미 은혜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내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불행하다. "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참된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예수님께서 우리가 원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가 원하시던 분이신가 입니다. 만약 우리의 어떠함에 대한 인식과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것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낮추는 대신에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더욱 더 찬양케 하는 결과를 낳지 못하고 다른 결과를 낳는다면, 우리는 순결한 은혜에서 끊어진 자들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곤경과 불신이 있습니까? 그 원인이 혹 당신이 여전히 "나", "나"를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은 아닌지 주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어떠함보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의 바닥에는 참으로 우리가 아무 쓸모없는 자임을 철저히 인식하지 못하는 교만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아로부터 하나님께로 완전히 시선을 돌릴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자신을 잊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나는 너무나 나쁘기 때문에 생각할만한 가치도 없는 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잊고, 내가 전적으로 생각할 가치가 있는 분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확신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이여, 우리가 로마서 7장에서와 같이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 오랫동안 충분히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자신만을 생각하던 훨씬 이전에 우리를 생각하셨던 분을 생각합시다. 우리에 관한 그분의 은혜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고,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는 믿음의 말씀을붙듭시다.
주님의 시험과 사랑
오래 전에 많은 고난을 겪은 그리스도인 대장장이가 불신자로부터 그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 당신이 만족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대장장이입니다. 나는 자주 철 조각을 집어 불 속에 넣고 백열이 될 때까지 둡니다. 그리고 그것을 꺼내어 모루 위에 놓고 한두 번 쳐서 잘 불리어질 수 있을지를 봅니다. 잘 불리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면 물에 넣어 급작스레 온도를 바꿉니다. 그리고 다시 불 속에 넣고, 다시 물속에 넣습니다. 이 과정을 여러번 되풀이 합니다. 그런 후 모루에 올려놓고 망치로 구부리고 갈고 다듬어서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듭니다. 그러나 만약 처음에 모루에 놓고 칠 때, 불리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면, 고철더미에 던져서 일 파운드에 몇 센트를 받고 팝니다.
나는 하나님 곧 아버지께서도 내가 불리어질 수 있을지를 시험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분은 나를 불속에 넣고 물속에 넣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참아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 원하시면 나를 불 속에 넣으십시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물속에 넣으십시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십시오. 주님, 부디 저를 고철더미에 던지지만 말아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계의 문자판과 같습니다. 시계바늘들은 그 위를 지나가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짧은 바늘은 징계이고 긴 바늘은 긍휼입니다.
천천히 그리고 틀림없이 징계의 시계바늘은 지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매 시간 매 시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몇 번이고 긍휼의 시계바늘이 지나가면서 징계와 시련의 종소리를 칠 때마다 60배의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두 시계바늘은 하나의 안전한 축, 곧 사랑의 하나님의 크고 변함이 없으신 마음에 견고하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 믿음의 단련이 불로 단련해도 없어지는 금을 단련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 (벧전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