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전도전략] 선택의 기회를 주라

행복자 2018. 12. 16. 11:52

[전도전략]

                           선택기회를 주라

                                                                                                                                            - 허윤옥

   "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믿음은 선택이다. 구원도 선택이다. 영생을 얻음도 선택이다. 이 세 가지는 다 구원에 대한연관관계에 있는 단어들이다. 사람이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의 핵심을 선택이라는 단어로 단순하게 표현하면 족하다고 본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믿음이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선 쉽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저들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인가. 아니면 말씀을 따라 따먹기를 거부할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하였고 결국 사단의 말을 선택하여 따먹기에 이른 것이다. 아이들 전도에 있어서 선택이라고 하는 단어를 생각하면 아이들 전도의 중요한 부분을 터득하게 되리라고 본다.

   아이들 전도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언급한바 있지마는 아이들은 태교로부터 복음을 듣고 커왔기 때문에 스스로 믿음의 길을 선택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여 왔다. 저들은 하나님, 예수님, 지옥, 천국 등의 존재와 관련하여 전혀 스스로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저들을 상담할 때 저들이 스스로 생각하여 자기의 판단을 말할 기회를 주는 배려가 있어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선택의 기회를 주는 방식의 전도가 유익함에 대하여 자세히 논하여 보고자 한다.


   선택의 기회를 주는 전도의 유익은 첫째로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하여 아이들로부터 더욱 진지한 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에서 찾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네 아이들이야 말로 주입식 교육에 물들어 있을 것이다. 태에서부터 복음을 듣고 자랐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알고 있는 정보는 저들 스스로 생각하는 기능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냥 부모와  주변으로부터 배운 지식인 것이다. 저들이 자기보다 먼저 세상에 태어나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모든 사람이 지옥이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관해서 찬반을 논하여 본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곧 진지한 고민의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지혜가 전도자에게 필요하다고 보아야 한다. 생각하여 보라.주어진 지식에 고민하는 것과 더 앞선 초기 지식부터 고민하여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과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저들로 고민하게 하여야 한다.

   필자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고민하는 학생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하나님, 예수님, 지옥, 천국등 성경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도 자신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이 있느냐" 하고 물으니 "있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상당히 심각한 표정으로 "너 정말 지옥이 있다고 하는 것 언제 알았어?" 하고 진지하게 다시 물으니 그는 주춤하면서 "그냥 어렸을 때부터 쭈욱 믿었죠" 하였다. "그래 그렇다면 정말 있다는 것은 언제부터 믿어졌어?" 또다시 진지하게 물으니 우물쭈물하는 것이다. 그는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진지하게 지옥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여 전도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믿는 지옥을 그날 주관적으로 자신의 고민 속에서 믿게 된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전도를 수없이 하여 왔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저들이 모두 믿는다고 하였지만 저들은 스스로 고민하고 지옥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 적이 없는 것이다. 물론 다 같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아이들은 주입식으로 모든 진리를 수용하였기 때문에 조금만 스스로 고민하여 결론을 내리게 하면 놀랍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같은 지옥을 믿어도 어제 믿은 지옥과 오늘 믿은 지옥이 다른 경험을 저들이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어제는 주입에 의해서 믿었고 오늘은 잠시라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믿은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 것 같아도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여기에 대하여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살후 1:10) 고 말하고 있다. 믿는 것과 믿어지는 것은 차이가 있다. 주변의 강요에 의해서 믿는 사람과 믿어진 차이는 결코 같을 수 없지 않은가. 아이들 전도는 이와 같은 세밀한 부분이 큰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고민하여 믿어지게 해야 한다. 놀라운 것은 필자와 대화하며 이와 같은 경험을 하면  저들의 구원에 대하여 놀라운 확신가운데 거하며 튼튼하게 자라기 시작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선택의 기회를 주는 전도는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효과가 있어서 아이들이 아주 기뻐하는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이렇고 저것이 저렇다고 설명하는 언어 표현 보다는 네 생각에는 이것이 옳다고 보느냐, 저것이 옳다고 보느냐 하는 화법이다.  너는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 하느냐 하는 대화법은 상당한 즐거움을 주는 화법이다. 어쩌면 오늘날 아이들은 대화에 굶주린 세대라고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그런데 영원을 판가름하는 진리, 그의 생명을 좌우 하는 진리에 대하여 저들은 얼마나 대화를 통해서 알았을까? 필자는 주일학교 저학년이라 할지라도 "내가 어른이고 선생이지만 나는 너의 의견을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정말 너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보아라" 하는 요지의 표현으로 말한 적이 많다. 그러면 아이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또한 저들은 크게 마음이 흥분되고 즐거운 표정이 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저들은 인격적인 대접을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선택의 기회를 주는 문제는 이와 같은 효과를 가져 온다.

   실제적인 예를 더 들어서 이 화법에 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주일학생들에게 "성경은 하나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잘못된 내용이 하나도 없고 예언적인 것에도 다 사실로 밝혀졌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도 사실로 증거되었다." 하고 아이들에게 전하는 경향이 대부분이리라. 그러나 만일 아이들에게 이렇게 하여 보라. "만약 2천년동안 수백억이나 수천억 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었다. 또 그 중에 성경을 대적하고 반대하고 공격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는데 만약 성경이 사실이 아니라면 네 생각에는 저들에 의해서 거짓이 들어났어야 되지 않았을까. 네 생각에는 어떠니? 나는 그런 생각하면서 성경이 진실이라고 믿었거든. 너도 한번 생각해 보라" 하면서 의견을 물어보고 같이 토론해 가면 아이들의 진지한 고민이 시작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접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담에 대하여 그러하셨다. 또한 성경에 역사적으로 나온 모두에게 그렇게 대접하셨다. 우리가 구도자들을 인격적으로 대접하는 것이 지극히 성서적이다. 또한 학생들도 어리지만 우리가 최대한 대접하여 저들에게 우격다짐으로 믿게 하는듯한 전도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 피곤하다. 구원에 대하여 너무 오래 시달려 왔다. 저들은 착한 사람들에게 압박당해왔다. 그들은 진실로 자기들을 사랑하여 압박한다고 하는 것을 알기에 저들을 원망하지 못한다. 또 구원을 받아야 한다.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억압을 받았지만 저들은 항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학교 공부처럼 공부 안 해도 다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못하면 비참해지고 망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저들은 항의하지 않고 또한 못한다. 그럼에도 저들은 피곤하다. 지쳐 있다. 우리는 저들을 더 많이 연구하고 저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더 성경적인 전도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세 번째로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은 지극히 성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시작 에덴에 가보아도 선악과로부터 선택이 시작되지 아니한가. 아담 이후로 인간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진행되어 오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의 시간들이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인격적으로 지식적으로 합리적으로 다루시면서 실제적으로 인간이 선택하여가면서 그 열매를 먹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따라나서거나 그냥 주저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였다. 그는 현명하였다. 하나님을 택하는 것이 인간의 환경적으로는 위험하고 망하는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선택에서 작용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가는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다. 반면에 롯의 선택은 어떠하였는가. 그는 역시 믿음으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 자기의 생각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선택한 소돔에서 망하는 길로 걸어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 앞에서 현명한 선택을 하기도 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열매를 받았다.

   이와 같이 성경의 전체 흐름이 선택의 연속일진대 그렇다면 우리네 아이들이 믿어온 믿음의 길은 선택 보다는 그냥 가르침과 또 가르침에 의한 강요를 살아온 모습이 아닌가. 너무도 큰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아니한가. 아이들은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으라, 구원을 받으라, 지옥은 있다고 강요 받아왔다. 자신의 의견을 반영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지옥은 있다고 강요 받아왔다. 자신의 의견을 반영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것이 필자가 이번호에 선택의 기회를 주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시는 전도를 하셨다면 당연히 우리의 전도도 선택의 기회를 주는 길이 무엇이며 어떤 방법이며 어떤 화법인가를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학생들을 만나 " 너는 대단히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구원 받은 부모 만나서 일찍 하나님과 구원의 길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가 무신론자이거나 무당이거나 다른 이상한 종교인이면 너는 영문도 모르고 망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행복한 자다" 라고 하면 동의한다. 또한 " 너는 대단히 불행한 사람이다. 너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나님이나 지옥과 천국 등의 존재에 관해서 한 번도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무조건 믿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거부도 부인도 못하고 강요된 믿음을 따라왔다" 하면 심지어 우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면서 " 이제 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믿음에 관하여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 하고 요한 복음 1장 12절을 보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 이 말씀을 수없이 들어보았지 않느냐? 그러나 11절은 아느냐" 하면 모른다. 거의 모른다. 1층을 거치지 않고 어찌 2층을 가는가. 여름을 비교하지 않고 어찌 겨울을 아는가. 이와 같이 11절을 알지 못하고 어찌 12절을 알 수 있는가. 11절은 영접지 않은 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를 비난하고 침 뱉고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이 영접지 아니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가 12절에 영접하는 것이다. "너는 어디를 선택할거냐? 어디에 속하였는가" 하고 물으면 당장에 12절을 선택하면서 구원을 확신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이번호에는 선택의 기회를 주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전반적으로 아이들과 대화하면서 이 흐름을 가지고 전도하여야 할 것이다. 대화의 방법이 아이들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것이 전도자들의 마음에 배어있어야 한다. 이것은 성인 전도도 마찬가지다.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를 세뇌시키려는 듯한 전도는 지향해야 한다. 저들의 의견을 들어가면서 인격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다. 저들이 하나님을 반대하면 그 이유를 충분히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이해하고 오해는 풀고 잘못은 고치는 전도가 일반적인 전도다. 전도자의 마음이 급하여 진리는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태도로 강압적 전도를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우리 앞에 어린 영혼들은 예쁘고 순한 어린양 같지 아니한가. 저들을 미래의 장로요 한국교회를 짊어지고 나갈 일군이니 지금 장로처럼 일꾼처럼 조심스럽고 사랑스럽게 대접하여 전도하면 얼마나 기쁨이 될까. 어린 채소 새싹처럼 다루고 전도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