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 매일의 양식 365 - 1월 7일
기도 - 매일의 양식 365 - 1월 7일
창세기 20장 17-18절
그랄에서의 아브라함
만일 우리가 자신의 실수에서 배움을 얻지 못한다면 거의 틀림없이 그 실수를 되풀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적절한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랄에서의 그 사건은 엘리야처럼 아브라함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약 5:17) 임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말한 첫 번째 경우가 아니었습니다(창세기 12장 10-20-절을 보십시오). 두 경우 모두에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속인 행위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절반의 진리는 철저한 거짓말만큼이나 나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는" (딛 2:8) 이로 알려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아브라함을 나무라지 않으신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행하심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우리는 어쩌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예상했는지 모릅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의 연약함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7절). 이것은 우리에게 최소한 두 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전해줍니다.
첫 번째로, 개인적인 잘못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신분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평한 사실을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한편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민 23:21). 여호수아와 같이 우리는 " 더러운 옷" 을 벗었습니다. 그리고서 "아름다운 옷" 을 입었습니다(슥 3:1-6).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개인적인 잘못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랄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아닌 아비멜렉에게 " 밤에 현몽하사"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개인적인 잘못은 더 이상 효력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실상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기대하셨고 그 기도에 응답하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회복시키는 분임을 잘 알았습니다. "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 130:3-5)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와 같이 우리가 허물을 자백하고 나면 우리의 기도에 지속적으로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