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전략] 노인 전도의 특징 죽음(2)
[전도전략]
노인 전도의 특징
죽음(2)
- 허 윤욱
"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전 12:5).
지난 호에 죽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던바 이번호에도 죽음의 문제를 증거함에 있어서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지난 호에서 언급하였지만 죽음이 눈앞에 있는 노인들에게 죽음을 거론하는 일이 쉽고도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번 호에는 이 문제를 거론하는데 도움이 될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모든 전도가 다 그렇지만 노인 전도에 있어서 죽음의 문제를 강하게 다루는 것은 확실한 전도를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첫째로 노인들에게 죽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준비를 시켜야 한다. 그 준비의 첫 번째로 천국의 아름다움과 놀라움을 전하는 것이 좋다. 전도자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천국의 위대함에 대하여 전하여 노인들로 하여금 희망에 부풀게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 저들은 지금 죽음 앞에서 불안하고 답답하며 무서워하기까지 하는 슬픈 사람들이다. 말로는 빨리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지만 죽음이 얼마나 무섭고 겁나겠는가.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이고 현실이니까 받아들이지만 겁나는 일이다. 또 거부할 능력도 방법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처량한 마음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그러한 노인들에게 천국의 행복을 전하여 희망에 부풀게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진리다. 필자는 노인들 전도에 임하여 수많은 노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다가 천국의 소망가운데 얼굴에 기쁨을 가지고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아왔다.
성경은 곳곳에서 천국의 소망을 다루고 있다. 시편 16편 끝 부분도 천국의 기쁨과 즐거움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계시록 마지막 부분도 천국의 기쁨을 다루고 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그 후에 어떻게 될 것을 모르는 막연함이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한 노인들에게 천국을 진지하게 알려주면 소망이 그 영혼에 스며들어 그의 마음이 밝아지는 것이다.
필자는 많은 노인들 중에 남원에서 약 죽기 일주일 전에 주님을 믿고 천국에 간 윤재천 씨를 잊지 못한다. 그가 죽음의 공포 속에 있다가 죽기 일주일 전에 천국을 발견하고 즉시 주님을 믿어 지옥을 피하는 한편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감을 아쉬워하였다. 그는 전도하고 돌아서서 나오는 나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주면서 나도 사랑하는 하나님에게 헌금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 봉투를 헌금 통에 넣으면서 전도자의 보람과 자부심을 한 번에 느꼈다.
전도자는 천국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실감나게 전하도록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지옥에 대해서도 절실하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금 지옥이냐 천국이냐를 선택하는 길목에 서있는 중요성을 깨닫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천국 못지않게 지옥에 관하여도 실감나게 전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선택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여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각인시키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선택이라는 단어는 의도적으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천국을 화려하게 전하면서 죽음을 지옥이나 천국으로 가는 징검다리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게 하는데 성공해야 한다. 저들이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가 이제 자신이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선택하여 가는 징검 다리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면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럴지라도 죽음의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진리의 빛을 접하면서 그 영혼이 밝아지는 것을 우리가 보는 것이다. 이 경우 본인이 천국을 선택하였다면 훨씬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죽음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죽음과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들은 이제 죽음이 코앞에 닥친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죽음도 별것이 아니며 죽음 후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는 진실을 들었을 때 얼마나 위로가 되겠는가.
세 번째로 죽음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죽음은 영혼과 육신의 분리이다. 둘째 사망은 하나님과 인생의 분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인생이 두 번째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별의 아픔과 고통을 잘 설명하는 것도 도움을 되리라.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만난 곳에는 반드시 이별이 있다고 하는 원리를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천국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곳이다. 즉 인간 세상의 회자정리가 통하지 않는 곳이 천국이요 지옥이다. 한 번 더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원리가 무시되고 무너진 곳이 천국과 지옥이다. 이제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통과하는 것이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제 죽음은 끝이 아니라 화려한 시작이다.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시작이다. 그러나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고통의 시작이다. 이것이 전도자가 전해주어야 할 메시지다.
네 번째로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부활의 진리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위로하는 절대적인 무기이다. 평생을 허무하게 고생만 하다가 죽어가는 데 아무것도 없이 그렇게 끝난다면 얼마나 원통하고 슬픈 일인가. 그러나 부활이 있다. 이것을 심는 것은 놀라운 소망을 가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필자는 모든 전도에서 부활이 가지는 힘을 경험하였다. 삼라만상이 부활을 노래하고 있다. 창공에 떠있는 달이 점점 사라져 안 보이다가 새롭게 살아나는 것이 부활을 설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날마다 해가 지고 밤이 와서 조용한 시간이 지나 새로운 아침이 오는 것 또한 부활을 웅변하고 있다. 달마다 해마다 부활의 노래는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다. 겨울은 모든 생명을 다 삼키고 죽어 버린듯하지만 땅속에 숨죽이고 있던 생명들이 봄이면 싹을 내니 이것이 부활의 노래 아닌가. 동물도 새들도 나무도 그 속에 씨앗을 간직하여 새로운 생명을 나타내고 스스로 사라져 가는 것이다. 그 몸속에 감취었던 씨앗이 수 천 년을 이어 오는 것이다. 부활의 영광은 온 우주에 충만하다. 온 세상 온 우주가 죽음과 부활을 노래하고 있으니 부활을 들으면 자신도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 순종하여 부활의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달으리라. 부활은 기독교에만 있는 최고의 진리다. 부활의 진리를 깨닫고 그 속에 흠뻑 취하여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에 푹 빠져 있는 바울은 "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단언했다. 지난 호에서 소망 없는 불쌍한 노인들에게 소망을 주어서 믿음의 길로 인도하여야 한다고 전한 바 있다. 이 소망에 대하여 부활과 천국에 관한 전도는 노인들을 충만한 기쁨의 길로 인도하여 흥분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요 살아있고 생명력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4).
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소망없는 사람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진리가 부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세상 어느 곳에도 참 소망은 없다. 누가 죽음을 앞둔 인생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가. 필자는 죽은 자에게 와서 염불하는 스님의 모습을 보았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힘도 없으면서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빌고 있는 허깨비 같은 행동이다. 극락왕생은 아름다운 극락세계에 가서 다시 삶을 시작한다는 뜻인데 저들에게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진리가 있는가. 아니면 그냥 희망사항에 불과한가.
우리 전도자들은 슬픈 인생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또한 우리가 전하는 진리는 인생을 살리는 유일한 대안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진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꺼리고 싫어하는 죽음을 업신여기는 진리이다. 당당하여야 한다. 전도자는 거룩한 자부심과 당당한 풍모로 전도하여야 한다. 그리고 거역하는 죄인들 앞에서 담대하게 꾸짖어 전도할 수 있는 담력이 필요하다. 전도자의 위엄은 곧 하나님의 위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활의 진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진리며 가장 숭고하고 놀라운 진리이다. 십자가 사역이 없는 세상은 꿈도 꿀 수 없는 십자가로 완성된 거룩하고 위대한 진리다.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선포하신 진리다.
다섯 번째로 죽음은 잠시 세상에 소풍 왔다가 되돌아가는 여정이다. 이것을 전하는 것은 이해를 돕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소풍을 가본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부터 영원까지의 사이에 이 세상이 잠간 끼인 것인데 그렇다면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순간적인 것임을 알 수 있으리라. 소풍은 잠시 와서 놀다가 곧 돌아가는데 돌아갈 곳이 자기 집이다. 소풍에 대한 비유는 노인들에게 큰 위로로 각인될 것이다. 죽음을 무겁게만 생각하였다가 점점 쉽고 가벼운 인생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또 사실이 그러하니 이와 같은 정도로 저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며 천국의 희망에 부풀게 하여야 할 것이다. 저들에게 죽음은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과정인 것을 각인시키는 작업이 죽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늘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노인들은 윤회사상이 짙게 깔려 있어서 다음 세상에 대한 생각을 대부분 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분명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저들이 죽으면 그만이지 뭐가 있느냐고 말하지만 사실 저들의 의식 밑바닥엔 저 세상에 대한 소망이 깔려 있음을 전도자들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전도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의식구조를 잘 살펴서 그것을 응용하는 것이 필요한 만큼 실제 전도에서 노인들의 의식 구조를 살핌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지나가는 말 속에서도 다음 세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저들의 의식 저변에 다음 세상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전도는 상당히 쉬운 편이라고 여겨진다. 이것 또한 우리나라에 주신 특별한 은혜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이나 천국이나 지옥이나 다음 세상이라는 말들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이미 친숙한 언어들인 것이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 소풍 끝내고 귀천하여 하나님을 뵈올 소망을 저들에게 심어서 저들이 죽음을 기쁨과 설렘으로 맞을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 올리는 것이 전도자의 책무라 여겨진다.
여섯 번째로 죽음은 자식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이라는 방향을 설정하여 전하여야 할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길 잃고 방황하던 자식이 부모에게 돌아가서 그 품속에 쉬는 것이 죽음인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얼마나 편안하겠는가. 자식이 돌아오기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사랑의 아버지를 만나러가는 것이 죽음이다. 이 피곤한 세상을 다 살고 이제 수고할 필요가 없이 아버지 품에서 쉬는 것이다. 고달픈 여행을 끝내고 온전한 안식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필자는 길을 가다가 " 이 편한 세상" 이라고 씌여진 아파트 이름을 보았다. 장사꾼들이 하는 말이지만 세상에 진정한 휴식이 있을까? 천국이야 말로 이 편한 세상 아닐까. 모든 고뇌가 다 사라지고 눈물이 사라지고 다툼과 시기와 분냄이 필요 없는 나라, 그 나라에 가는 것이다. 거기의 주인은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주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아들 된 내거 당연히 상속자이지 않는가.
죽음은 무엇인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름다운 천국을 상속받으러 가는 것이지 않는가. 거기에 반하여 지옥은 마귀의 자녀가 지옥을 상속받으러 가는 것이지 않는가. 얼마나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는가. 그 아름다운 나라, 내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나라, 인간의 모든 슬픔이 사라진 그 나라를 상속받으러 가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죽음의 정체인 것이다.
전도자는 담대하여야 한다. 노인들앞에서 당당하게 확신에 찬 말로서 이 모든 것을 전하여야 한다. 저들은 이제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람들이다. 저들은 모든 꿈을 접은 사람들이다. 저들은 슬픈 생각을 할 힘도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사람들이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채고 불안한 가운데 죽음 앞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저들에게 죽음의 문제를 뚫고 나가 그 뒤에 있는 세상을 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전도자일뿐이다. 우리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이다.
형제들아!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자로서, 우주의 비밀을 통달한 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용기 있게 나가서 저들에게 소망을 주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