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의 전적인 충분하심 (2)

행복자 2019. 2. 20. 11:24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의


                                   전적인


                                충분하심(2)

                                                  

                                                             - C. H. 매킨토시


   지금까지 우리는 죄 용서의 문제와 관련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집중해왔고, 우리가 진지하게 믿기는 독자가 이 중요한 강조점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해결되었으리라 본다. 독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 확실하고 그것은 독자의 기쁜 특권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 3:18).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sins)을 위하여 죽으셨는데, 그 죄(sisns)짐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됨의 심오한 축복을 몰라도 되겠는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따른다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영원한 속박 속에 있으면서 죄의 사슬에 매이고 묶여서 나의 죄짐을 견딜 수 없다고 날이면 날마다 외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이러한 고백이 그리스도인에게 사실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이하셨는데도 우리가 죄의 사슬에 매여 있을 수 있는가? 그분이 우리의 무거운 죄짐을 지셨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견딜 수 없는 죄짐에 눌려 압도되는 것이 사실인가?

   어떤 이들은 우리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이 가장 중요하고 생명이 걸린 일에 대해서 불확실한 상태로 생애의 끝까지 가봐야 한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그렇다면 보배로운 은혜의 복음, 즉 구원의 복음은 어찌되는 것인가? 그러한 비참한 가르침의 견해로 본다면, 사랑받는 사도 바울의 안디옥 회당에서의 생생한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행 13:38-39).

   우리가  모세의 율법에 의거해서 그 명령을 지켜야하고 의를 행해야하며, 그래야 한다고 느끼고, 의무적으로 그리스도를 가치 있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한다고 하면, 우리는 확신의 근거를 잃고 어두운 불확실과 의혹 가운데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 일에 있어서 행할 일이 눈썹만큼이라도 남아있다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편에서 매우 무례한 것이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서,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영광중에 계신다는 복음을 선언하신, 거짓말하실 수 없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것은 아무것도 포함시키지 말고 오직 그분만을 통해서) 그분 자신의 단번에 영원히 드린 제물을 통해서 완전하고 영원한 죄의 용서가 선포될 때, 그것도 현재의 실재로서 하나님의 고귀한 기록을 단순히 믿는 영혼마다  지금 즐긴다면, 어떻게 의심과 불확실한 가운데 계속 거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그 사역을 다 이루셨는가? 그분은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무엇을 하셨는가? 그분은 우리의 죄를 없이하셨다. 그렇다면 죄는 사라졌는가? 아니면 아직도 우리 위에 있는가? 어느 쪽인가?

   독자여, 어느 쪽인지 말해보라. 당신의 죄들(sins)은 어디에 있는가? 구름의 사라짐같이 도말되었는가? 아니면 무거운 죄짐이 정죄하는 힘으로 당신의 양심 위에 아직도 남아 있는가? 만약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도 그 죄들이 제거되지 않았다면, 죄들은 결코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죄들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 죄들을 지고 불타는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것을 확신하라. 이 가장 무겁고 절실한 문제의 다른 해결책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 하지 않았다면, 지옥에서 당신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니, 그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그분 자신의 증거로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여 죄들로 인해 단번에 죽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려 하심이다. 우리가 죽는 순간 단순히 천국에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가시려는 것이다. 죄의 사슬에 매인 채로 우리를 데려가시는가? 우리 영혼에 견딜 수 없는 죄책을 가진 채로 데려가시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분은 우리를 점과 흠과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께 데려가신다. 그분은 우리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데려가신다. 그분에게 죄가 있는가? 아니다. 전에 그분이 우리 자리를 대신하셨을 때는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자! 지금 죄들은 영원히 가버렸다. 하나님의 망각의 심연으로 던져버렸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그분에게 옮기시고 죄에 관하여 그분을 다루셨다.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계산대로 충분히 그리고 정확하게 해결되었다. 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십자가의 두려운 흑암 가운데서 해결되었다. 그렇다. 그 문제는 거기에서 단번에 영원히 모두 해결되었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권위로 안다.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그분의 풍성한 은혜로 구속받은 것과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즐겁고 풍성하고 심오한 자비로 선언하신 것은 우리의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 하신다는 것이다(히 10:17).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죄의 사슬에 매여 있다고 탄식하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에 대하여 그렇게 비방하려는가? 하나님의 은혜의 광채를 더럽히고 성경에 있는 진리의 성령의 증거를 거짓으로 돌리려는가? 그 생각을 버려라! 그럴 리가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복된 은혜를 감사함으로 찬양하자.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의 기쁨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죄와 불법을 용서하기를 기뻐하신다. 상처받은 참회하는 영혼에게 고귀한 그분의 용서의 사랑과 자비의 향유를 붓는 것은 그분을 기쁘게 하며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분은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셔서 나무에 달아 저주받게 하셔서 완전한 의(righteousness) 안에서 풍성한 은혜의 강이 그분의 넓고 인자한 마음으로부터 나와 가련하고 죄악 된, 자기 파괴적이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죄인에게 흘러가게 하셨다.

   그러나 아직도 독자가 이러한 복된 죄 사함(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열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일찍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를 위탁하신 부활하신 구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위대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라.

   "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6-47).

   여기서 우리는 그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위탁(그 기초, 그 권위, 그리고 그 범위)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셨다. 이것이 죄 사함의 가치 있는 근거(기초)이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다. 피 흘림으로, 오직 그것만으로 되는 죄사함이다. 그것은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만큼 충분하고 완전한 죄사함이다.

   그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기록되었으되."  복되도다. 반박할 수 없는 권위! 아무것도 그 권위를 흔들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확고한 권위에 근거하여 내가 아는 것은 내 죄가 모두 용서되었고, 도말되었으며, 영원히 사라졌으며, 하나님의 등 뒤로 던져졌기 때문에 그 죄는 절대로 나를 대적하여 다시는 나타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 범위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모든 족속" 이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나 자신도 포함된다. 예외나 조건, 자격 같은 것은 없다. 복된 소식은 사랑의 날개를 타고 모든 족속, 모든 세계,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었다. 어떻게 나만 예외가 될 수 있는가? 잠시라도 하나님의 태양 빛이 나를 위함인 것을 내가 의심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어찌하여 고귀한 죄 사함이 나를 위한다는 사실을 의심해야 하는가? 단 한순간이라도 그럴 수 없다! 마치 하늘 아래 내가 유일한 죄인인 것처럼 죄 사함은 나를 위한 것이다. 그 보편적인 견해는 나를 위하여 계획되었음을 의심할 수 없게 한다.

   진실로 격려가 더 필요하다면, 그 복된 소식을 전하는 대사들이 지상에서 가장 악한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시작했다" 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일찍이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자들에게 용서되었음을 전했다. 이것을 사도 베드로가 놀랍고 초월적인 은혜의 말씀으로 전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행 3:26).

   이보다 더 부요하고 충만하고 장엄한 일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자들에게 부여한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당된다. 그러한 죄악을 정결케 한 피는 지옥 밖에 있는 가장 간악한 죄인도 정결케 할 수 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죄 용서에 대하여 믿기를 주저하는가, 주저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는 죄 때문에 고난 받으셨다. 하나님은 죄 사함을 전파하신다. 하나님은 그 점에 대해서 그분의 말씀으로 약속하셨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행 10:43).

   무엇이 더 필요한가? 어떻게 더 이상 의심하고 미룰 수 있는가? 무엇을 기대하는가? 당신은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공로와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 진실로 이것들은 당신의 마음을 만족시키고 당신의 생각을 잠잠케 하게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 그리고 당신에게 간청하건대 당신의 모든 죄가 영원히 완전히 용서되었음을 받아들이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복음을 당신의 마음속으로 영접하고 즐거이 당신의 길을 가라. 하늘의 위엄의 보좌에서 말씀하시는 부활하신 구주의 음성을 들어보라. 그리고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확신하라. 하나님 자신의 입으로 나오는 위로의 말씀이 당신의 번민하는 영혼을 해방하는 능력으로 역사하게 하라.

   "저희 죄들과 저희 불법들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히 10:17).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면, 그리고 내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나에게 확신 시키셨다면, 나는 완전히 영원히 만족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왜 내가 의심하고 따져야 하는가?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그 무엇이 더 확실한가? 그것은 확신의 유일한 근거이며, 지상이나 음부나, 인간이나 악마나 그 어떠한 세력도 그 말씀을 흔들 수 없다.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이 완전한 죄 사함의 기초이며 권위이다.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고지된 죄 용서함만이 아니다. 이것은 그 자체가 은혜이며 바로 최고의 질서의 축복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보았고, 하나님이 그 가치를 평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너그러운 마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과 가치를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충만하고 완전한 죄 용서 외에, 또한 현재의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누린다.

   이것이 거룩함을 참으로 사랑하는 모든 자들을  위한 위대한 핵심이다. 영광스러운 은혜의 경륜을 따라서, 완전한 죄들(sins)의 용서를 보증하는 그 동일한 공로가 죄(sin)의 세력을 영원히 파괴해버렸다. 그것은 생활의 죄들(sins)이도말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죄(sin)가 정죄되었다. 신자는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길 특권을 소유한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할 수 있다.


   나 위해 주 예수께서 죽으셨고

   나도 주 안에서 죽었네.

   주님의 부활로 나의 사슬 풀렸고

   이제 주께서 내 안에 사시네.

   빛나는 은혜의 성부 얼굴

   지금 내게 밝게 빛나네.


   이것이 신자에게 어울리는 복음이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이것이 기독교이다.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옛것은 사라졌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옛 나의 역사를 영원히 마감했다. 여기서 죄(sin)가 신자 안에 거하지만, 그 능력은 파괴되어 영원히 사라졌다. 그 죄책이 취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끔찍한 지배가 완전히 폐지된 것이다.

   이것이 영광스러운 로마서 6-8장의 진리이다. 이 장엄한 서신서를 사려 깊게 공부한 학도라면 3장 21절에서 5장 11절까지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죄들(sins)의 문제에 적용됨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5장 12절에서 8장 끝까지는 그 사역의 또 하나의 양상, 즉 죄(sin) - "우리의 옛 사람" - "죄의 몸" - "육신에 있는 죄" 의 문제에 적용됨을 발견했을 것이다. 성경에서 죄(sin)의 용서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죄(sin)를 심판하셨다. 죄(sin)를 용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차이를 가져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영원한 혐오감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혐오감을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죄를 심판하셨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과 연합되고 동일시되어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것으로 여긴다. 그는 죄의 지배의 영역에서 벗어나 의를 통해서 은혜가 지배하는 새롭고 산 영역으로 들어갔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죄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 대하여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7-22).

   여기에 거룩한 삶의 소중한 비밀이 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 죄의 지배는 끝났다. 죽은 몸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그는 은혜의 고귀한 지배 아래 살며, 그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거둔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떠나는 사람은 죄에서 사는 것이며, 바로 기독교의 그 기초를 부인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2).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기독교의 전체 기반을 부인하는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계속 죄를 범하고 다시 회개하는 기독교인을 상상하는 것은 기독교를 타락시키는 것이며 전 기독교인의 신분을 속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 육신이 있기 때문에 죄를 계속 범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위대한 양상의 한 면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해서, 로마서 6-8장의 사도의 가르침을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신자는 어떠한 죄든지 범할 필요가 없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 2:1).

   우리는 단 하나의 죄악된 생각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 거하시는 것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걷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진실로 빛 가운데 걷고 있을 때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아! 우리는 빛을 떠나서 죄를 범한다. 정상적이고 진실하고 신성한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빛 가운데 걸으며, 죄를 범하지 않는다. 죄악된 생각은 참된 순수한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우리 안에 죄가 있고, 우리가 몸 안에 살고 있는 한 죄가 몸 안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안에 걷는다면, 우리 본성 속에 있는 죄는 삶 속에서 그 자체를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죄를 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을 설명하는 것이며, 죄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속임수이고 환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