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의 전적인 충분하심(3)

행복자 2019. 3. 5. 09:44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의


                                                              전적인


                                충분하심(3)


                                                            - C. H. 매킨토시


   앞서 살펴본 것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것은, 그리스도의 과거에 행하신 사역의 위대한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완전한 신분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10:14). 그분의 이름의 덕과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공로의 신임으로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 존전으로 인도하시되 그분 자신이 온전히 영접됨과 같이 우리도 영접되게 하셨다. 사도 요한이 선언함과 같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요일 4:17).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모든 무리 중에 가장 연약한 양이라도 바로 그러하다. 다른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한 파멸 밖에 없다.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완전함과 죄악과 파멸의 조건 사이는 머리털 넓이만큼도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죄들 안에 있거나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 중간 지대는 없다. 우리는 죄에 쌓여있거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나 성경에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고 성령께서 권위 있게 선언하셨다.

   "그의 양심에 관해서도 완전하다."

   "영생에서도 완전하다."

   "완전히 깨끗하다."

   "사랑하는 자 안에서 영접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고귀한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부서질 수 없는 견고한 기초 위에 놓인 것이다.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제물을 영원히 드리신 후에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사" (히10:12, 흠정역).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심은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신분을 명확하게 하신 영광스러운 증거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우리 죄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죄인으로서 우리가 받아야할 심판을 자신이 담당하셨다. 또한 죄들을 위하여 자신을 한 제물로 드리심으로 영원한 죄 용서와 영접됨과 평화를 주셨을 뿐 아니라, 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하셨다. 또한 이 신분은 우리를 대적하는 내주하는 죄와 사탄, 율법, 혹은 이 악한 세상의 공포에 대한 승리를 확신하게 하셨다.

   반복하지만,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이렇게 신자의 신분은 절대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독자는 이것보다 못한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기를 간청한다. 더 이상 흐리멍덩한 기독교계의 교리나 그 종교의식을 용납하지 말라. 그것은 영혼을 다시 어두움과, 멀어짐과, 유대교의 속박으로 끌고 갈 뿐이며, 그 종교조직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영원히 폐지되었다. 그것은 예배자에게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자유를 줄 수 없고, 그분 자신에게 가까이 나아가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거룩한 생각과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다. 결코 영원히.

   엄숙하게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기독교계의 여러 양상들을 보며 그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깊이 생각하라.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이미 성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여 제시한 바 있다. 그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충실하게 기독교계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말씀을 비교하게 하여 그들이 얼마나 말씀에 일치하지 않는가를 보게 하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오늘날 형식상의 기독교가 살아있는 신약의 가르침과 얼마나 다른가를 발견할 것이다. 그 결과로 영혼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에게 속한 소중한 특권들을 빼앗기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모세 경륜의 특징인 도덕적인 틀에 포로가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손상시키고, 성경의 가장 명백한 진술을 부정하는 것이다. 확신하기는 이 순간에도 수많은 소중한 영혼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는데, 이것은 대부분 기독교계의 가르침과 그 신조와 교회의식에 기인한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에서 양심의 해방, 하나님과의 평화, 양자의 성령을 누리는 자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어떤 신자가 모든 죄를 사함 받았다고 말하거나, 영생을 얻었고,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사랑하는 자 안에서 영접되었고, 성령의 인침을 받았으며,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실재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잃어버릴 수 없다고 말하면 그것은 건방짐의 극치라고 공공연히 조직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계에서는 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실제로 부정되고 무시되고 있지 않은가? 지나친 확신은 위험하며, 의심과 두려움 속에 사는 것이 도덕적으로 더 안전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최선은 우리가 죽을 때 천국에 도달하는 희망이라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영혼들은 새로운 창조와 관련된 영광스러운 진리를 어디서 배우는가? 부활하신 하늘의 영광스러운 머리 안에 있는 그들의 신분을 아는 지식은 어디에 뿌리를 두는가?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즐김으로 인도되는 곳은 어디인가?

   아!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제공될 수 있는 유일한 참 해답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어두운 산과 황폐한 광야에 흩어져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유대적 조직을 특징짓는 희미한 먼 곳에 남겨졌다. 그들은 찢어진 성전 휘장의 의미나, 하나님께 가까이 감, 사랑하는 자 안에서 영접됨의 의미를 모른다. 주의 만찬상은 어둡고 으스스한 미신의 안개로 덮여 있고, 어둡고 우울한 율법주의의 불쾌한 장벽으로 둘려 있다. 성취된 구속, 죄의 완전한 용서,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한 의롭다함,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접, 양자의 성령, 신랑의 오심에 대한 빛나고 복된 소망, 이 모든 영광스럽고 위대한 실재와 하나님의 교회의 공인된 특권이 기독교계의 가르침과 종교적인 절차에 의해서 무시되었다.

   혹자는 아마 우리가 너무 우울한 모습을 그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는 다만 참으로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는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실체는 묘사한 것보다 훨씬 더 두렵다. 우리는 그 상태가 입으로만 고백하는 교회뿐만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의 수많은 앙들의 상태를 생각할 때 사태는 심각하고 고통스럽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는 정도롤 이해한다면 우리 마음이 찢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제를 더 추적해서 수많은 주의 백성들의 비참한 상태에 대하여 제안할 수 있는 가능한 최선의 대책을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그 고귀한 사역에 대해서 자세히 강조하여 설명했다. 우리 죄들을 제거하셨고,  죄를 심판함으로 죄들의 완전한 용서와 지배하는 세력으로서의 죄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얻었다. 그리스도인은 용서받은 자이며 해방된 자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서 돌아가셨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났다. 그리하여 그는 자유인이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심판은 지나갔으며, 그 앞에는 영광만이 있다. 그는 지울 수 없는 자격과 숨길 수 없는 전망을 소유했다.

   이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진실로 사실이라면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가(부족한가)? 자격이나 신분에서나 소망에서 더 이상 부족한 것은 없다. 이 모든 것에 관하여 우리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완전함을 소유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상태가 완전하다거나 우리의 삶(walk)이 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 육체 가운데 있어서 여러 약점으로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시험에 노출되어 있고, 넘어지기 쉬우며, 타락하기 쉽고, 방황하기 쉽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바른 생각을 할 수 없고, 은혜가 인도하는 축복의 자리를 한 순간도 지킬 수 없다.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며, 지상에 보내진 성령에 의해서 하늘의 살아계신 머리와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는 영원히 안전하다. 아무도 우리 생명을 건드릴 수 없다. 이는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우리의 생명을 건드리거나 우리의 신분을 방해할 수 없지만, 상태가 불완전하고, 걸음이 불완전하며, 연합이 방해받기 쉬운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이 필요하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신다. 우리를 위한 그분의 적극적인 개입은 한 순간도 절대로 쉬지 않는다. 그분은 그분이 성취하신 속죄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서 완전한 중보를 수행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존속하는 의로서 거기 계셔서 신분의 신성한 완전성과 그분의 대속의 죽음이 우리를 소개하는 관계 속에서 우리를 붙드신다.

   로마서 5장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또한 히브리서 4장 14-1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위대하신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또한 히브리서 7장 24-2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리고 히브리서 9장 2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같은 주제가 좀 다른 양상으로 제시되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자신의 연약과 필요, 결함, 실패를 깊이 그리고 고통스럽게 늘 의식하고 있는  참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우리는 합법적으로 질문할지 모른다. "누군가가 우리가 방금 인용한 하나님의 말씀의 구절들을 응시하면서, 자기 의를 말하지 않는 것(자신의 상태와 삶이 불완전하다는 인식)이나,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사역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어떤 히브리서 독자나 혹은 가장 성숙한 신자의 상태와 삶을 관찰한 사람이, 지금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중보와 제사장직을 적용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물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누구를 위해서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셔서 행동하시는가? 그것은 세상을 위해서인가? 분명코 그렇지 않다. 그분이 요한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기도함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라고 하셨다.그러면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유대인 남은 자들인가? 아니다. 그 남은 자는 아직 시야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인가? 믿는 자들, 즉 하나님의 자녀들, 지금 죄 많은 세상을 통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실패하기 쉽고 모든 걸음에서 오염되기 쉽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의 대상들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깨끗케 하려고 돌아가셨다. 그분은 살아서 그들을 청결하게 지키신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그분의 생명으로 말씀의 작용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신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구주를 통하여 죄 사함과 정결함을 얻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찔리신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리스도의 고귀한 죽음에 의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죄 문제인가? 그 죄는 속죄의 피로 말살되었다. 우리의 매일의 부족함인가?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위대한 대제사장인 중보자가 있다. "누가 죄를 범하면." 그는 "누가 회개하면" 이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물론 회개가 있어야 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떻게 생성되는가? 그들은 어디로 향하는가?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그분의 중보는 범죄한 자에게 회개와 자기 판단, 자백의 은혜를 얻게 한다.

   그리스도인 독자가 그리스도의  위대한 중보의 기본진리 혹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관하여 철저하고 확실하게 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우리는 가끔 우리 일에  빠져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 편에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 한다. 우리는 우리가 실패를 의식하기 전에, 즉 우리 양심이 사실을 정말로 인식하기 전에 우리의 찬양받으실 중보자는 그것을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신다는 것을 망각한다. 우리는 회개와 자백과 회복의 은혜를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에 빚지고 있다. "누가 죄를 범하면."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피가 답인가? 아니다. 성령께서 무엇을 말씀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라.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중보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왜 그분을 "의인"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왜 은혜로운 분이나, 자비하신 분, 동정하는 분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분은 이 모든 것이 아닌가? 진실로 그렇다. 그러나 이 덕목의 어느 것도 여기에는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은총을 입은 사도가 우리 앞에 위로가 되는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실수, 죄들, 그리고 실패 속에서도 의로운 하나님, 거룩하신 아버지 앞에 의로운 대언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일은 결코 실패할 수 없다. "그분은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중보)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히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확실한 위로가 되겠는가! 그리고 우리 영혼이 그 지식과 의미에 있어서 우리를 세우는데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과거에 행하신 일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참된 신분에 대해 불완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다른 부류는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대해서 완전히 일방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를 위하여 행하고 계신 일의 필요를 보지 못한다. 둘 다 바로잡아야 한다. 전자는 구속의 가치와 그 범위에 무지하다. 후자는 중보(변호)의 위치와 적용에 대해서 무지하다. 우리의 신분은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그분과 같다" 라고 할 만큼 완전하다.

 이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제사장이나 중보가 확실히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죄를 범하면" 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상태이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적인 중보가 필요함을 입증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분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영원히 살아계신 분을 소유하고 있다. 그분은 높은 곳에 살아계시면서 우리를 섬기신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존속하는 우리의 의가 되신다. 그분은 살아서 하늘 우편에서 항상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가 땅에서 잘못 갈 때에도 우리를 의롭게 보신다. 그분은 우리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신성하고 불변하는 중보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