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의 전적인 충분하심(4)

행복자 2019. 3. 18. 10:12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의

                                                              전적인

                                      충분하심(4)


                                                                      C. H, 매킨토시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된 위대한 기본적인 진리들을 추적해보았다. 그분의 사역은 과거와 현재, 대속과 중보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도움에 의지하여 이 글의 두 번째  주제, 즉 " 마음을 위한 목적으로서의 그리스도" 에 관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독자들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 나는 나의 마음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목적을 찾았다. 나는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그것은  이렇게 세상을 벗어나 참된 영예를 얻게한다. 그것은 회심하지 않은 영혼이 지금까지 의지했던 자원에서 우리를 철저히 벗어나게 한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안식을 준다.  그것은 영혼에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평안과 평정심을 준다. 세속에 심취한 가련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우 게으르고 둔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소위 오락이나 레크레이션,쾌락, 즉 영화나 춤, 파티, 음악회, 카드놀이, 당구, 사냥, 운동경기, 클럽활동,크리켓파티 같은 것없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회심하지 않은 자에게 그러한 것들을 빼앗는다면 그들은 거의 절망에 빠지거나 정신이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을 가지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그에게 지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이름뿐인 교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참된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다. 아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고 그들의 고백은 매우 고상한 주장을 취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 혼합되어 그들과 함께 모든 헛되고 무가치한 것들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주일날에 성찬식에 참여할지 모른다. 그러고 나서 월요일에는 극장이나 음악회에 가고, 다시 일요일에 이런 저런 그리스도인의 일에 참여하기도 하고, 주중에 다시 무도회나 경기장에서 어리석고 헛된 일을 행하는 그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마음을 위한 목적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의 빛을 받은 자가 어떻게 경건치 않은 세상의  초라한 것들을 추구할 수 있는지 정말 의문스럽다. 진실하고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것들로부터 돌아설 것이다. 그것도 본능적으로 돌아서서 단순히 적극적으로 잘못되었고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그는 진실로 잘못되었고 악하다고 느끼지만) 그것들이 맛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영원히 우월한 어떤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그의 새 성품의 열망을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무도회나, 극장이나 운동경기에서 즐거움을 취할 수 있다고 상상 할 수 있는가? 생각한 해도 정말 우스운 일이다. 모든 그와 같은 모습은 하늘의 존재에게는 완전히 낯선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떤가? 그는 하늘의  사람이며, 신의 성품에 참여한자다. 그는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사람이다. 그는 세상과는 한 줄의 관계도 없다. 그는 하늘에 속해 있다. 그는 그리스도 주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오락이나 환락, 어리석은 일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러한 생각은 불경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가? 그는 주께서 계실 수 없는 곳에 갈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일에 마음으로 알면서 계속 참여할 수 있는가? 그는 그의 구주와 주께서 참여할 수 없는 장소와 장면과 환경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그리고 그래야 하는가? 그는 모든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하고 나서 그분을 싫어하는 세상으로 가서 사귀는가?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것이 너무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입장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떤 주장을 취하는가? 진실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취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취한다면 그 입장이 정말로 무엇인지 어떻게 아는가? 신약성경으로부터 확실하게 안다. 신약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리스도인이 어떤 모양이나 형태로든지 이 악한 세상이 추구하는 헛된 일과 즐기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의 엄숙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이 세상에서 우리의 분수와 신분과 우리의 길에 관한 진리를 그분의 말씀에서 들어보자,

   "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 17:14-18).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것보다 더 자세한 정체성의 설명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 간단한 구절에서 우리 주님은 두 번 이상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같이 우리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선언하신다. 주님은 세상과 어떤 관계를 기지셨는가? 전혀 관계가 없으셨다. 세상은 철저히 그분을 배척했고, 내 쫓았다. 새상은 그분을 두 강도 사이에서 수치스런 십자가에 못 박았다. 모든사람이 일치하여 문명의 중심에서 십자가의 사형을 집행했다. 그 사건은 마치 어제 일어난 것처럼 완전히 생생하며, 세상은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다. 그렇다. 세상은 그분을 살해한 죄로 물들어 있으며, 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답해야 한다.

   이것은 얼마나 엄숙한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심각하게 숙고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 주와 주인되시는 분을 십자가에 처형한 세상을 통과하고 있다. 그분은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이 우리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선언하신다. 세상과 어떤 교제가 있는 한은 그리스도께 불성실한 것이다. 남편을 죽인 남자들과 앉아서 웃으며 농담도 하는 아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것은 입으로만 믿는 신자들에게는 어울리는 일인지 모른다. 그들은 이 악한 세상과 짝하여 그들 자신을 한 부류로 여긴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가 어쩌란 말인가? 세상 밖으로 나가란 말인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참 원리는 그것으로부터가 아니고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잠수부와 같다. 상부와 끊임없는 소통이 유지되고 그  작용으로부터 보호되지 않으면, 그는 그를 파괴하려는 어떤 영역 가운데 처하게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의 소명은 무엇인가? 여기에 그 답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심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오니." 그리고 다시 요한복음 20장 21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니."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그는 자신을 수도원이나 수녀원에 가두지 않았다. 기독교는 형제모임이나 자매모임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전혀 기독교가 아니다.  우리가 부름 받은 것은 다양한 삶의 관계에서 활동하고, 우리의 신성하게 지정된 영역에서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함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목적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께서 목적이 되어 마음을 다스리고 집중하게 한다면, 모든 것은 옳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다. 두사람이 식사하려고 동시에 탁자에 앉아있다. 한 사람은 식욕을 채우려고 먹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는다.  즉  그리스도를 섬기는 도구와 성령의 전과 하나님의 그릇으로서 자기 몸을 적당히 일하는 질서 안에서 단순히 지키기 위해서 먹는다.

   모든 일에서 그렇다. 주님을 우리 앞에 항상 모시는 것은 즐거운 특권이다. 그분은 우리의 본이 되신다. 그분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렇다. 그분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 오셨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다. 그분은 어떻게 사셨는가? 아버지에 의해서 사셨다.

   "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7).

   이 것은 모든 것을 단순화시킨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표준이시며 시금석이시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의 규칙에 따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께 합당한가이다. 그분은 이것이나 저것을 행하시는가? 그분은 여기나 혹은 저기로 가시는가? 그분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며 우리가 그분의 걸음을 따라야 한다고 아주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복된 발이 갈 수 없는 곳을 가면 안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여기 저기 간다면, 우리는 그분의 복된 임재를 누리기를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에 일체의 진정한 비결이 있다.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유일한 목적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것이다" (갈 2:20) 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이것 이하는 그리스도께 합당하지 않다.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세상과 벗하여 자신의 즐거움과 이익을 위해서 그분 자신과 멀리서 산다면 그것은 가련하고 비참한 일이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가 아버지가 주시는 좋은 것에만 관심이 있고 아버지와 동행하기를 싫어하고 거기에다가, 타인과 동행을 더 좋아한다면 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는 당연히 그를 멸시해야 한다. 그러나 더더욱 비천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은혜로 그의 현재와 영원한 모든 것을 빚지고도 여전히 찬양받으실 그분을 냉정히 멀리하면서 만족하게 살며, 그분의 주장,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 데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