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전도 전략] 노인전도 위로하라

행복자 2019. 3. 31. 09:59

[전도 전략]


                                                        노인전도

                                                                                   위로 하라

                                                                                                                                                                               - 허 윤욱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딤전 5:1)


   이번호부터는 노인전도의 전략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노인 전도는 쉬우면서도 어려움이 있다. 노인들은 쉽게 노여움을 타는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두에 기록된 말씀을 생각하며 이번호에는 먼저 노인 전도 전략 중에 "위로하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람은 누구나 위로받기를 좋아한다. 노인의 경우는 특히 위로가 필요하고 위로를 통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노인들의 특성에서도 살펴보았지만 현대의 노인들은 위로가 필요한 세대이다. 그들은 험난한 세월을 살아온 세대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저들은 위로받지 못하는 세대이다.
   전도자가 저들을 위로해야 하는 첫번째 이유는 우리가 전하는 주님은 위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후 1:3).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본성은 가난한 자, 약한 자, 불쌍한 처지에 있는 자를 위로하시는 분이시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위로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본질이 위로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므로 전도자가 저들을 위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노인들을 위로하되 하나님의 위로로 위로해야 한다. 저들을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위로로 위로할 때 노인들이 마음에 감동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전도자는 성경을 연구하되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어떻게 위로하셨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성경은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도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미사여구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위로로서 저들을 위로할 때 더욱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저들을 위로함으로 저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심어지고 하나님의 마음이 심어져서 저들로 하나님을 믿게 해야 할 것이다. 선악과를 따 먹고 벌거벗은 수치가 드러나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려도 가려지지 않은 슬픈 인생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주님의 위로가 저들의 가슴에 닿을 때 저들은 눈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한 죄로 말미암아 절망 가운데 있던 제자들을 찾아가서 한 마디 질책도 없이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는 위로로서 제자들의 굳은 마음을 녹이신 주님이시다. 주님의 위로는 눈물을 웃음으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돌리시는 능력이 있으시다. 주님의 위로는 녹이지 못할 죄인이 없음을 이미 역사로 증명된 것이 교회사이다. 주님은 나인 성 과부의 위로가 되셨고, 친구 하나 없는 삭개오의 위로자가 되셨다. 세상에 태어남을 원망하면서 슬프게 살아가는 문둥병자들을 위로하셨다. 우물가의 여인을 위로하시되 근본적인 위로로서 위로하셨다. 거할 성이 없이 방황하는 떠돌이 인생에게 거할 성을 주시는 주님이시지 아니한가. 여러분과 내가 그러한 위로를 받지 아니하였는가. 주님의 위로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주님은  위로자이시다. 전도자들은 노인들에게 주님이 사람을 위로하는 분이심을 직접 간접으로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두 번재로 복음은 죄인들을 위로하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절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저들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삶의 목적을 모르고 고통의 이유도 모르는 상태에서 날마다 목적 없는 삶속에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허무한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노안들 또한 평생 고생하며 살아온 인생에 보상받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슬픈 세대가 아닌가. 그러한 노인들에게 위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인생이 다 그러하지만 노인들은 특히 위로가 필요한 세대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위로에 있어서 복음은 절대적이다. 복음을 통해서 목적 없는 인생임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 안에 오직 소망이 있음을 알게 되지 아니한가. 인생이 허무하고 죄인의 길에 소망이 없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길임을 깨달을 때 노인들은 울게 되는 것이다. 자신만 고통하고 자신만 소망 없이 불행하다고 여기던 노인들 아닌가. 그런데 인생의 길이 본래 그러하며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고난의 길임을 알 때 그 자체가 위로가 되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길이 다 슬픔이요 고난이다. 모두가 다 그렇다. 이 말은 노인들을 위로하기에 충분하다. 노인들이 자녀들 문제나 자신의 삶의 여러가지 형태로 인하여 자신은 인생을 잘못 살았으며 심지어 실패하였다는 패배감에 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인생 자체가 잘살든지 못살든지  다 실패라고 하는 사실을 들을  때 실제로 위로가 되는 것이다. 복음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인생은 죄로 말미암아 성공해도 성공이 아니며 승리해도 참 승리는 없으며 기뻐도 기쁜 것이 아닌 것을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한 인생의 본질을 노인들이 들을 때 당연히 위로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또한 복음은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건짐으로 온전한 위로를  받게 함이 핵심일진대이것이야 말로 참된 위로가 아니고 무엇인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이 이 땅에서 살다가 결국은 이 죽음의 문제를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여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하여 막연한 불안으로 날마다 죽음의 공포 속에 떨고 있는 것이 노인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이야 말로 노인들을 온전히 위로할 것이다.
   세 번째로 노인들은 위로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늙으면 약해진다.  몸도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진다. 누가 보통 평범한 말을 해도 쉽게 섭섭해 하는 것이 노인이다.본래 위로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하는 것이다.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하는 것이다. 또한 성공한 자가 실패한 자에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이 약한 위치에 있기에 위로를 하여야 할 것이다. 어쩌면 노인들은 위로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저들이 모아논 돈으로 당당하게 살고 있을 때는 낫겠지만 경제적으로 약할 때는 더욱 위로를 기다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저들이 건강하면 났겠지만 몸이 약하여 아픔이 심할 때는 더욱 위로를 기다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도자들이 노인들을 찾아 경로당에 가서 노인들을 만나 위로하면 저들은 우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위로는 노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위로는 노인들의 마음을 열뿐만 아니라 전도자들의 마음이 주님을 닮게 하는 것이다. 위로를 많이 해보시라. 주님의 따뜻한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다. 전도자는 노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위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소망 없는 노인들을 위로하는 말로 시작하여 전도한 경험들이 많다. 필자가 좋은 말로 위로할 때 저들은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얽힌 사연들을 털어놓는 자체로서 위로가 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어느 때는 자기의 며느리를(며느리가 자매님인데) 심하게 비난하는 모친도 만났던 기억이 있다. 며느리를 비난하며 교회를 안 좋게 생각하던 모친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비난하는 이야기, 섭섭한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며 그를 위로하고 칭찬하며 며느리 비난에 이해를 하는 태도롤 들어주었다. 그 분은 자기를 이해하고 들어주며 위로하는 말에 마음이 녹아서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마음을 거두고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은 것으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이제 위로하는 과정에 도움울 줄 수 있는 말과 주의 사항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로 위로할 때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은 적절하게 위로하여야 한다. 위로 과정에 잘못하여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할 수 있다. 노인은 질그릇 다루듯이 해야 한다. 질그릇이 조금만 잘못 다루면 깨지기 쉬운 것처럼 노인은 깨지기 쉽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도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말은 삼가는 것이 좋다. 필자도 가끔은 노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언어로 전도의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있다. 사람은 자존심 하나로 견딘다고 하던가. 특히 노인들은 자존심 하나로 견딘다고 하는 말이 실감나는 세대다. 그러므로 위로하는데도 품격이 있어야 한다. 좋은 언어로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 품위 있는 태도로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 기분 상하지 않게 적당히 칭찬하며 위로하는 것이 좋다. 위로는 누구든지 마음을 좋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때로는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다는 약점이  있음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노인이라 해도 교만한 죄인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것이 전도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전투가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내어 구원받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전도에서는 신사적인 교제가 마음을 움직여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주의사항을 이야기하는 필자도 이것이 꼭 옳은 것인가, 꼭 유익한 길인가, 꼭 맞는 전도 방법인가 생각을 많이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마음을 잘 살펴야 한다. 그의 마음 상태를 잘 살펴서 위로해야 한다. 위로가 오히려 마음에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의 일로 마음에 낙심하고 있어도 많은 경우 자기는 자식이나 아내(남편)가 미워도 남이 그들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손은 안으로 굽는다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위로할 때에 상대의 마음을 잘 살펴서 적당하게 위로하여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진실한 위로가 감동을 주고 위로가 된다. 전도를 위해서 위로하려 하지 말고 전도자가 진심으로 위로하는 위로를 그들은 원하는 것이다. 속담에 진정한 마음은 서로 통한다 하지 않던가. 전도자가 진실로 저들의 아픔과 눈물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마음으로 전도하면 통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능한대로 저들의 눈물을 닦으며 진심으로 위로하면 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필자가 자신을 살펴볼 때 애정이 없음을 느끼고 탄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에 모처럼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조금 일어나 동정하고 위로하면  참으로 좋아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한 위로를 통해서 가까워지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고의 능력이다.
   또한 위로할 때에 먼저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좋다. 노인들에게는 아야기를 들어주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풍토다. 이러한 풍토 속에 노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는 전도자는 저들의 마음을 얻는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속병도 낫는다 하지 않는가. 또한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어떻게 위로하고 전도할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전도자가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좋은 것은 들으면서 내가 할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얻는 것이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대화를 통해 친구가 되고 내가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무엇을 말할 것인가 기도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상대의 이야기 속에서 전도의 내용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위로할 내용을 찾아내는 것이다. 들어주는 것은 대단히 좋은 전도방법이다. 특히 노인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독자가 만약 시간을 내서 노인정에 적당한 주기로 찾아가서  얼마동안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사귀어 보라. 당장에 전도가 시작되며 멀지 않은 시간에 전도의 열매가 나타날 것을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우리의 노인들은 고독한 세대다. 전도자가 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친구가 되어주며 저들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왜 전도가 되지 않겠는가. 위로는 저들을 전도하는 좋은 명약임에 틀림없다. 아무쪼록 슬픈 노인들을 위로하여 저들을 주님께 인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줄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