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의 전적인 충분하심(5)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의
전적인
충분하심(5)
- C. H. 매킨토시
독자가 일련의 글에서 지금까지 은혜를 통해서 우리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는 모든 양심의 불안과 모든 마음의 쉬지 못함에 대한 완전한 치유를 얻게 될 것이다. 거짓 없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힘입으면 필연적으로 전자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주의하여 묵상한다면 후자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심의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사역을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으로 만족하지 못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사랑받는 백성들이라도 전자와 후자를 아는 자들이 거의 없다. 양심의 참 평화와 마음의 안식을 누리는 사람을 발견하기는 매우 드물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성도의 상태에서 조금도 앞서지 못했다. 그들은 양심의 정화됨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은 참된 마음으로 가까이 가지도 못한다.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어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도 못한다. 그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위대한 진리를 모른다. 그들은 경험상 율법 아래 있다. 그들은 결코 은혜의 다스림을 받는 깊은 축복으로 들어간 적이 없다. 그들은 생명이 있다. 이것을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신성한 것을 사랑한다. 그들의 취미, 그들의 습관 그들의 포부, 그렇다. 그들의 운동,갈등, 걱정, 의심 그리고 두려움 이 모든 것이 신성한 생명이 있음을 증명한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세상과 분리되어 있으나, 그들의 분리는 긍정적이 아니라 부정적이다. 그들은 세상이 궁극적으로 헛되어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세상과 분리하는 것이지,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의 목적임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세상의 것들에 대한 맛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그들의 위치나 상속분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세상것에 만족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들이 천국의 신분과 목적, 소망을 누리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순된 상태에 있다. 그들은 확실한 것이 없고, 안식도 없고, 확정된 목적도 없다. 그들은 행복하지도 않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참된 상태를 모른다. 그들은 이것도 저것고 아니다.
독자는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믿기는 무한한 하난미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것들을 독자는 알고 있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 영생을 얻은 것을 알며, 성령의 증거를 즐기고 있다. 독자는 천국에 계신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머리와의 교제를 깨닫고 있으며,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성령은 그들 안에 계신다. 그들은 복된 그분의 인격 안에서 그들의 목적을 발견했으며, 그분의 완성된 사역은 그들의 구원과 평안의 영원한 신성한 기초이다. 그들은 진지하게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을 그분 자신에게로 영접하는 복된 순간을 기대하고 있으며, 그분이 계신 곳에 그들도 함께 있으며 영원히 다시는 나가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다. 그 외에 어떤 것도 그 이름에 합당치 않다. 기독교는 오늘날의 거짓 종교와 현저히 충격적인 대조를 보인다. 거짓 종교는 순수한 유대교도 아니고, 순전한 기독교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초라하게 혼합된
것으로 갖가지 요소로 조작된 것이며,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채택하고 계속한 것인데, 이는 그들의 종교가 육신의 정욕을 지지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의 만족을 위하여 세상의 헛된 것과 쾌락을 즐기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영혼의 최대의 적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반반 섞고, 육신과 세상을 혼합해서 아주 정교한 방법으로 성경도 어느 정도 포함시켜서 끔찍한 종교 조직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것은 기독교의 도덕적 힘을 파괴하고 그 올바른 적용을 훼방하는데 쓰였다. 이 조직의 올가미에 영혼들은 절망적으로 잡혔다. 참된 회개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매우 선한 그리스도인이라서 계속 바르게 살면 천국에 갈 것이라는 생각에 속고 있다. 반대로 주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정당한 위치와 특권을 빼앗기고, 그들을 둘러싼 거의 질식시키는 어둡고 낙담시키는 종교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허약하게 되었다.
우리가 믿기에 하나님의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을 하나의 종교 조직과 신학적 믿음 안에 섞어놓는 데서 오는 끔찍한 결과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자의 결과는 신약 성경에 제시된 기독교의 도덕적 참된 영광에 그들의 눈을 멀게한다. 누군가 이러한 영광을 그들의 견해에 따라 드러낸다면, 그만큼 그는 광신도이거나, 위험한 이단자로 취급된다. 후자의 결과는 그들의 진상과 성격,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그들 자신을 함께 속이는 것이다. 두 부류는 같은 기도서를 반복하고, 같은 신조에 동의하며, 같은 기도를 말하며 같은 공동체에 속해있고, 같은 성찬식에 참예한다. 그들은 간단히 말헤서 교회적으로 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한 통속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 주께서 마태복음 13장 설교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셨다고 반론할 것이다. 그 말은 맞다. 그러나 어디에서 그런가? 교회에서 그렇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 장소는 "들판에서'"이다.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신 들판은 세상이다. 이것을 혼동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속이는 것이고, 교회 안에서 모든 경건한 훈련을 폐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태복음 13장의 가르침을 고린도전서 5장의 성령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위치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제를 지금은 더 이상 진행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지금 같은 간단한 글로 정리하기에는 너무 중요하고 너무나 광범위하다. 아마도 다음 기회에 더 층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확신하기는 그리스도인 독자가 이 주제를 심각하게 숙고할 것을 진정으로 요청하는 바이다. 그 주제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하여, 그의 백성의 참된 관심에 관하여, 복음의 진보에 관하여, 그리스도인 간증의 성실성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게 사실대로 묵상하는 것이다.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당분간은 그것을 남겨두고 이 주제의 세 번째와 마지막 글에서 간단히 언급하므로, 이 글을 더 자세히 서술하겠다. 즉 우리 길에 대한 충분한 안내로서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 양심에 대하여 충분하고, 그분의 복된 인격이 우리 마음에 충분하다면, 진실로 그분의 고귀한 말씀만으로 우리 삶의 길에 충분하다. 우리는 모든 가능한 확신으로 주장할 수 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긴요한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세밀한 교회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교회의 다양한 필요를 우리는 성경에서 다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실제로 이 주장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 자신이 하나 이상의 여러 방면에서 많은 조롱과 반대에 노출되어 있음을 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전통적 사고방식 옹호자들과 다른 한편 인간의 이성과 의지 지상주의자들과 대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별 관심거리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현재의 권위로서의 전통은 저울의 작은 먼지로 여긴다. 인간의 이성이란, 알지도 못하면서 장님처럼 목표물에 돌진하다 태양빛에 놀란 박쥐에 비견 될 수 있을 뿐이다.
모순되는 전통과 인간의 신조에서 물러나 성경의 조용한 빛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 심령의 심오한 기쁨이다. 또한 무신론자와 합리주의자, 회의주의자의 허약한 논리의 도전을 받을 때에 성경의 권위와 능력에 도덕적 전 존재가 무릎을 꿇는 것도 심오한 기쁨이 된다. 감사하게도 그분은 하나님 말씀안에서 진리와 도덕, 모든 것을 위한 유일하고 완전한 표준을 승인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아무것도 없다. 성경이 어린 아이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신다면, 또한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고,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충분히" 필요를 공급할 수 있다. 어떤 인간의 전통이나 인간의 이성이 필요한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알아야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믿고 행해야하는 모든 것에 관한 말씀을 기록해주셨고, 자비롭게도 우리에게, 그분의 생각을 계시하셨는데도, 우리가 의식주의자나 이성주의자에게 돌아가서 도움을 요청 해야 하는가? 그러한 생각은 터무니없다! 신성한 계시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인간의 전통(전승)이나 인간의 이성에 전념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동료들을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어떤 것을 더해서 우리 양심을 만족하게 하거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결함을 보충해서 그분이 우리 마음의 목적에 만족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우리 하나님께 모든 찬양과 감사를 드릴지어다! 그분은 사랑하는 아들안에서 변화하는 상황의 시간 동안, 끝이 없는 세대의 영원토록 우리의 양심과 마음과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셨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 그리스도여,
주는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십니다.
주 안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는 부족함이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그분의 대속과 중보는 가장 깊게 고통 받는(exercised) 양심의 모든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 그분의 신성한 인격의 능력 있는 매력, 도덕적 영광은 가장 강렬한 마음의 열망과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비길 데 없는 계시(무한한 가치가 있는 책)는 출발점부터 그리스도인 전 생애의 목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그분 안에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독자여, 그렇지 않은가? 그대는 그대의 거듭난 도덕적 존재의 바로 그 심장부에 성경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고요한 평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쉬고 있는가? 그대는 그분의 인격 안에서 즐거워하는가? 그대는 모든 것에서 그분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당신과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모든 이에게 이 축복을 허락하시기를 기도한다. 더 충만하게, 더 선명하게, 더 결정적인 간증으로 "그날" 까지 넘치는 그리스도의 충만하심" 에 이르기를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