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생각해봅시다] 시몬 베드로 (1)

행복자 2019. 4. 15. 09:39

[생각해봅시다]


                                                                              시몬 베드로 (1)


                                                                                       - C .H. 매킨토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여 몇 가지 쓰고자 하는 것은 축복받은 그리스도의 종의 생애와 섬김에 관한 것이며, 그의 이름은 이 글 제목에 있다. 우리가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통하여 추적하고자 하는 것은, 신약을 세 부분으로 구분할 때 모두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부르심, 그의 회심, 고백, 타락, 회복에 관한 것이다. 그의 괄목할만한 전기에 나타난 장면과 광경 속에서 우리는 틀림없이 많은 가치 있는 교훈을 발견하고 묵상할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의 안내자와 스승이 되시기를 원한다.

   시몬 베드로의 초기 모습을 보려면 요한복음 첫 장을 봐야 한다. 여기에서는 처음부터 흥미와 교훈으로 가득 찬 장면을 발견한다.

   침례  요한의 능력 있는 사역으로 모인 사람들 중에 둘이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한 빛나는 그의 증거를 들었다. 인용한 말을 보면, "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 35,36).

   거기서 요한의 두 제자의 마음에 그 말씀은 특별한 능력으로 다가왔다. 그 증거는 우리에게는 특별하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요한의 두 제자들에게는 생명력과 신선함, 그리고 능력있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마음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왔고, 그 마음은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어떤 목적을  발견했다. 전날 요한은 그리스도의 일애 대하여 말했었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그리고 다시, "그가 바로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이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의 어린 양의 인격에 대한 요한의 증거에 주목하라. "요한이 섰다가(John stood)" 라는 말은 틀림없이 그 대상이 영혼을 채우고 그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씀은 그의 옆에 서있던 두 제자의 마음에 바로 전달되어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은 그들의 선생을 떠나서 이 새로운 무한히 영광스러운 분, 그들의 마음을 빼앗은 분을 따라갔다.

   몰두한 영혼으로 부터 나오는 증거는 항상 엄청난 도덕적 능력이 있다. 그러한 증거에는 형식적이고 공식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마음의 교제의 순전한 열매이며 그와 같은 열매는 다른 데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마음이 채워지고 만족된 마음이다. 그것은 눈을 집중하는 것이고, 마음이 고정된 것이며, 도덕적 전 존재가 온 하늘을 그의 영광으로 채우는 흡인력 있는 대상에 집중하여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생활과 공적인 모임에서 우리가 간절히 증거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른 사람에게 강력한 능력으로 말할 수 있다. 우리 마음이 그분으로 채워지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코 능력 있게 설교할 수 없다. 모임에 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대상이 되실 때에 거기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은 어조와 분위기로 말하게 된다. 은사가 부족하고, 설교가 부족하고, 음악적 재능이 없어서 찬송이 매력이 없어도, 아! 그리스도로 채워진 마음이 있다면! 그분의 이름은 부어진 기름과 같다. 모든 눈이 그분에게 고정되어있고, 모든 마음이 그분에게 집중되어있으며, 그분만이 시선을 끄는 대상이고, 마음의 만족을 차지하신다. 모임의 일치하는 목소리가,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능력있는 영향을 주어야 한다. 그 자체가 영혼에 능력 있는 영향을 주어서, 영혼들을 매료시키거나, 그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확신시켜서 전에 전혀 알지 못하던 어떤 것을 얻게 해야 한다.

   그러나 특히 주목할 것은 요한의 두 제자에게 예수께서  미친 영향이다. "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시쯤 되었더라" (요 1:37-39). 이와 같이 그 침례 요한의 복된 증거는 그들을 인도하여 예수를 따르게 했고, 그들이 계속 따라가서 마침내 그의 스승이 말씀했던 그분의 거처에 도착했다. 이것이 전부이지만 굉장한 사건이다. 그들 영혼의 심오한 갈망이 만족된 것이다. 이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따라간 것이 그때마다 긴밀한 사귐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게로 오니" (요 1:40-42).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묵상할 것이 있다.

   복된 무리가 어떻게 늘어나는지 보라. 진리와 실체가 나타난 말씀 한 문장의 결과를 보라. 육신적인 사람이 보기에는 침레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자신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영예로운 종은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킴으로 기쁨을 발견했다. 그는 그들을 자기 자신에게 연결시키거나 자신 주변으로 모으기를 원하지 않았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요 1:30).

   그리고 다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아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요1:19-24).

   바리새인들에게 전달 될 얼마나 훌륭한 도덕적 교훈인가!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 신발 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요 1:25-28).

   그러한 대답을 할 수 있고 그렇게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의 제자를 잃는 것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고 거처를 같이 하는 것은 그들을 잃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에 관해서 요한의 입으로 나온 매우 아름다운 증거를 볼 수있다. 그것은 그들의 스승이 어쩌면 그늘에 가리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제자들에게 준 대답에 있다.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그이가 침례를 주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 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요 3:26-30).

   고상한 말이로다! 이 가장 걸출한, 여인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에게는 그의 주인 뒤에 자신을 숨기고 그분 안에서 개인적인 모든 삶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이 기쁨이었다. 자기 자신에 관해서 그는 하나의 소리에 불과했다. 그의 일에 관해서 그는 단지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이었고, 그는 자기 주인의 신발끈을 풀만한 가치도 없었다. 요한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열정적인 증거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안드레)를 하나님 아들의 발 아래로 인도했다. 그의 증거는 선명했다. 그 일은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영혼에게 심오하고 실제적이었다.

   그것은 그 마음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미루거나 주저함이 없이 "우리가 메시야를 발견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그를 인도하여 그의 형제(시몬 베드로)를 돌아보게 했다. 그는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 자신이 구원을 받고 복을 받자마자 그는 즉시 그의 형제를 같은 축복으로 인도햇다.

   얼마나 단순한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아름다운가! 신앙적으로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그는 메시야를 만나자마자 그의 형제를 찾아가 그의 기쁨을 그에게 전한다. 그것은 항상 그렇게 되어야한다. 한순간도 의심할 수 없고, 우리 스스로 실제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비결이다. 안드레의 증거에는 불확실한 것은 없다. 흔들림이나. 의심, 두려움이 전혀 없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한 것이 전혀 아니다. 모든 것이 선명하다. 그밖에 어떤 것이 있었다면, 시몬 베드로에게 별로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모든 가능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불확실한 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못하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found)"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요점이다.

   틀림없이 당신은 그분에 관해서 들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는 말을 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신은 그 복된 분을 좇아갔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을 찾아가서 당신이 새로 발견한 보물을 전해주기를 갈망할 것이고 그를 예수님께 인도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집에서부터 시작하라. 먼저 당신의 형제 자매를 얻고, 그리고는 동료, 급우, 직장 친구에게 조용히 그렇지만 분명하고 단호하게 그의 귀에다 말하라.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와서 그분이 얼마나 자비하신 분인지 맛보고 알라(taste and see). 오라! 예수께 오라."

   이것이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처음 부름 받은 방법이었음을 기억하라. 그는 먼저 그의 형제 안드레로부터 예수님에 관해서 들었다. 이 능력 있는 일꾼(이 위대한 전도자는 한 번에 3천명의 영혼을 얻었다) 또한 사도행전 3장에서 유대인에게, 사도행전 10장에서는 이방인들에게 천국문을 열었다. 이 복된 종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의 육신의 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