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독자의 글] 늙은 종을 향한 독백

행복자 2019. 4. 20. 14:40

[독자의 글]

                                               향한 독백

                                                                                                                                                                                                                                                                                  - 차광선


  1.

   튼실한 낙타 등에 실어 놓은 짐들을 안장 줄로 조여 묶어 고정시킴으로써 이제 먼 길을 떠날 준비는 다 된 셈입니다.

   동행하게 될 종들이 열 마리나 되는 낙타들과 짐들을 최종적으로 점검했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의 장막 쪽을 바라봅니다. 주인께 인사 올리러 들어간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 아브라함은 환도뼈 아래 손을 넣어 맹세한 늙은 종 당신을 인자한 얼굴로 바라봅니다. 그 눈에 신뢰의 빛이 역력합니다. 집안의 모든 재물을 책임지게 할 만큼 당신은 주인 아브라함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비록 주종관계라고는 하지만 마치 친구를 대하듯 친밀히 대하는 주인의 어투와 행동에서 당신은 깊은 친밀감을 느낍니다.

   "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서 찾아야 하네."

   당신은 고개 숙여 부복하며 그 뜻을 받아들입니다.

   사실, 주인의 고향 메소포타미아까지는 먼 길입니다. 거친 들 황막한 바위산을 지나야 하는 험준한 여행길입니다. 이런 여행길이라면 보다 젊고 건장한 종들이 다녀와야 할 여정일 것입니다. 한낮의 열기와 한밤중의 냉기로 인해 당신 같은 노종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위해 아내를 데려오는 중대사를 다름 아닌 당신에게 맡기고 있으니 무슨 연유로 그렇게 결정을 내렸을까요? 어쩌면 마지막 사명이 될지 모르는 그 일을 어째서 아브라함은 당신을 지목하여 맹세하게 하며 그 일을 부탁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두 종과 더불어 하나님의 산을 향해 출발했지요. 결혼하려는 지금 이삭의 나이가 40세이니 근 3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주인 아브라함이 지금같이 그 때에도 당신을 신뢰하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산으로 동행하였던 두 종 중의 하나는 틀림없이 당신이었을 것입니다.

   산 아래에 머물면서, "다시 돌아오리라" 며 번제에 쓸 희생제물도 없이 불과 나무만을 가지고 산을 오르고 있는 두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산정을 향해 멀어져 가는 주인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번제 드릴 제물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하며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저 산 위에서 무슨 일이 이루어지고 있단 말인가? 당신은 내내 그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같은 상황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주인 부자(父子)가 무사히 내려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산에서 내려오고 주인 아브라함의 얼굴은 알 수 없는 신비와 환희의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디쯤에서 당신의 주인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그리고 확신 있게 말했겠지요. 당신은 주인 아브라함이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아들이라며 이삭을 바라보던 눈빛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산에서 있었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는 그 날 이후 당신의 마음속 깊이에 오래도록 진동하였을 것입니다.

   그 소년 이삭이 이제 결혼하고자 먼 곳에서 아내가 될 여인을 데려오는 일에 늙은 종인 당신이 그 사명을 받은 것이지요. 이삭의 혼사는 이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본인의 가문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는 아브라함은 이 혼사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중대한 과정 중의 하나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주인 아브라함이 아무리 고려해 보아도 그 일에 당신만한 적격자가 다시없었을 것입니다.


  2.

   정오를 지나면서 길 위엔 열기가 높아지고 먼 길에 지친 대상들이 그림자 흔들리듯 스쳐지나갑니다. 아침녘 맑은 햇살에 이슬을 반짝이던 야생화들도 하오의 열기에 당장이라도 사위어갈 것 같이 시들해져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초로인생이라더니, 옛 필객들이 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 같이 잠깐 자다 깬 듯한 삶인데 벌써 저물어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삶 너머의 참 삶을 알고 난 후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제 시작한 길이니 목적지에 닿으려면 많은 날들을 노숙해야 할 것입니다. 임시 천막을 치고 밤의 냉기를 피하면서 가고 또 가야하는 길입니다. 어느 덧 당신 일행은 지붕위의 외로운 참새처럼,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자들처럼 보였을 테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주인의 뜻과 사명을 받들고자하는 열정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 지나쳐 간 길인듯도 하지만 낯익은 지형지물을 애써 찾아본다 해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경건한 습관이 그러했듯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묵도하며 이 여행길이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순적하게 잘 마쳐지도록 기도를 합니다. 당신은 지금 주인 아브라함의 고향 땅을 향해 갑니다. 도중에 정착할 수 없는 나그네의 길이요 행인의 길입니다. 아마도 길은 갈수록 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은 지금 당신의 주인이 고대하고 있는 바 아들 이삭의 배필이 무사히 인도되어 오기를 바라고 있음을 잘 알기에 주인이 기뻐하게 될 날을 당신도 꿈꾸면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3.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이 표현은 당신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더군요. 저는 당신이 주인 아브라함에게는 얼마나 충직한 종인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겸손한 자일지를 단박에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머리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는 것, 이것이 당신이 하나님 앞에 가졌던 경건한 태도요 습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길을 가는 동안 방향을 잃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얼마나 자주 당신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불렀을까요? 그러는 사이,하나님께서는 메소포타미아 나홀의 성으로 당신 일행을 정확하게 인도하여 가셨습니다. 성 근처 우물가로 지친 걸음을 옮겨 놓으며, 물 길러 나오는 여인 중에서 언약한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인이 누구일까 기대하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한 여인이 당신이 기도한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동행자들에게 우물물을 마시게 하고 이어 낙타들에게도 물을 마시게 합니다. 의인은 자기 가축의 생명도 돌아본다고 지혜자가 말했듯이, 그 여인은 필경 심성이 선량한 사람일 겁니다. 저는 리브가의 일거수일투족 "묵묵히 주목하며 하나님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한다"는 신령하고 진지한 태도에 고무됩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주인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이니,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일행을 주인 아브라함의 혈족에게로 정확하게 인도하셨던 것입니다.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않고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께 당신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감사와 기도와 찬양을 올립니다.


  4.

   "내가  내 마음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리브가를 만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한 후 당신은 리브가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의 가족들은 당신 일행을 크게 환대합니다. 물론 풍성한 음식을 마련하고 식사하기를 재촉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자초지종,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일을 낱낱이 진술하기를 시작합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세세하게 전말을 그들에게 들려주려 하는지요. 리브가와 가족들에게 이 혼사가 하나님의 인도 하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리브가가 그 모든 진술을 들으며 의심 없이 결단하고 순종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진술하는데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당신의 태도는 리브가와 그의 가족들에게 확신을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것을 진술하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부터 그 가족들은 당신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며 그리고 그의 진술이나 제안은 거절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신중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태도는 신령한 무게가 감지될만큼 침착하고 내실이 있습니다. 당신은 분명 종이었건만  일개 종으로 당신을 가볍게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룻밤 유숙 후, 당신은 당장 돌아가길 서두릅니다. 리브가의 가족들은 한 열흘  묵었다 가기를 청하였으나 당신은,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 돌아가게 하소서!" 하고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서두를 이유가 없어보이는데 한사코 귀갓길에 오르려 합니다.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말하라 하면 당신의 주인 아브라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소년 이삭과 함께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던 때 주인 아브라함의 얼굴에서 빛나던 빛을 당신은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당신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 새 당신은 바로 그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다시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그리고 다시 한 번 리브가로 인하여 기쁨과 감사로 가득하게 될 주인의 얼굴을 뵙기를 사모했던 것입니다.

   아, 이제야 당신의 주인 아브라함이 굳이 당신을 이 중대사의 책임자로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아브라함에게 추수하는 날에 시원한 얼음냉수 같은 존재였고, 아브라함에게 당신은 귀를 송곳으로 몇 번이라도 뚫으면서라도 섬기기를 원했던 바로 그 주인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단 하룻밤이라도 더 머물지 못하고 떠나려한 당신을 리브가의 식구들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 이생의 삶이 하룻밤 지나는 길 같이 단촉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들의 삶이 다시 오실 주님께 맞춰졌을 진대 주님 뵈올 날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5.

   사랑의 대상은 그 사랑할 자의 눈에 더 쉽게 띄는 법이지요.

   여행길에 지칠 법도 한 리브가의 눈에 이제 그의 남편이 될 사랑의 대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라고 말해주었을 때 리브가는 가만히 면사포로 자신의 얼굴을 가립니다. 이삭은 아내 될 대상을 기다리며 이곳까지 마중 나온 것이 아닐는지요. 그의 기다림은 하루가 천 년 같았을 것이고 천 년이라도 하루 같았을 것입니다.

   드디어 긴 여정이 끝났습니다. 주인의 귀한 선물을 날랐던 낙타들도 푸르르 콧바람을 풀어내며 안도합니다. 당신은 무사하게 발걸음을 인도해주신,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당신은 언제나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으로 불렀지만, 어느덧 당신은 그 어떤 제한이나 장애없이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부를 만한 사람이 된 듯합니다.

    이제 당신의 눈과 발은 평생 위하여 충성을 다해온 주인 아브라함을 향합니다. 아브라함은 당신이 환도뼈

밑에 손을 넣고 언약한 이래 줄곧 당신의 여정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주인 아브라함의 얼굴에 기쁨과 감사의 빛이 가득합니다. 그것으로 당신은 모든 여독이 잔설 녹듯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먼 길에 정말 수고 많았네!" 라고 말하는 주인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음을 당신은 발견합니다. 당신의 눈에도 주인의 얼굴을 대면하는 기쁨에 벌써 눈물이 맺혔습니다. 당신은 바닥에 엎드립니다. 순적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사명을 마침내 완수했음을 주인 아브라함에게 아룁니다. 주인 아브라함의 따뜻한 손이 당신의 어깨와 머리 위에 어루만져집니다. "이제 편히 좀 쉬게나!"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주인이 보면 그 종에게 축복이 있으리라."


   지혜 있고 충성된 종!

   당신의 이야기로 모형 된 우리 성도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설렙니다,. "서쪽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가 해" 가슴 설렌다는 옛 찬송 가사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치는 그 날에, 충성된 종들에게 저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칭찬이 있겠지요. 주님의 사랑 깊은 음성이 그렇게 들리겠지요.

   당신은 당신과 동행하였던 종들에게 갑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동행한 그들입니다. 그들의 어깨를 친밀히 두드리며 당신은 말합니다. "수고들 많았네. 자네들이 함께 하지 아니했다면 이 일을 어떻게 이루어냈겠나. 정말 애들 썼네. 당신은 공을 그들에게 돌립니다. 그들은 경대하는 빛으로 당신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6.

   황혼입니다. 그것은 쓸쓸하고 적막한 일몰과 낙조가 아니라. 육신의 주인에게 묵묵히 충성을 다한 늙은 종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위로의 빛입니다. 황금빛 노을이 당신의 머리와 두 어깨 위에 가득하게 내립니다. 당신은 그 빛을 받으며 고단한 몸을 누일 처소로 향합니다. 언뜻 세상의 일천한 아름다움을 당신에게서 발견합니다. 후일에, 당신을 닮은 사도 바울은 자신을 충성된 자로 여겨 주셔서 화목케 하는 말씀과 직분을 주신 주님께 충성을 다합니다. 미말에 처한 것 같고 진토에 지나지 않는 제 인생을 사랑하셔서 구속해 주신 주님, 무지 무능한 저를 복되고 영광스럽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합니다. 이제 당신이 내 시야에서 아주 사라지기 전에. 내심 다짐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육신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한 것 같이, 저도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생명을 다하여 우리 주님께 순종하고 충성을 다해야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