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된 가정] 연보 (1)
[헌신된 가정]
연보 (1)
- 존 그랜트
꼭 드려야 할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때 당신이 알게 되는 첫 번째 사실들 중 하나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점입니다. 그 결과 당신은 이내 사랑은 반드시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찾아내야 함을 감지합니다. 사랑과 주는 것은 연결되어 있음을 당신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랑과 주는 것은 서로 떼어낼 수 없게 되엉켜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gave)하나님의 아들" (갈 2:2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gave)'(요 3:16). 이 말씀들은 이러한 진리를 강조해주는 구절들 중 두 구절에 불과합니다.
성경의 맨 처음에서부터, 세상에 첫 출생한 두 사람의 삶에 대해서 기록한 그들의 최초의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을 드렸고, 가인은 열납되지 못하는 것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는 드리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확실히 가인이나 아벨보다 훨씬 더 커다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주 예수님을 향해 당신이 가진 그 사랑을 그분께 드리는 것으로 표현하기를 소원해야만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소득 중 십일조 혹은 10%를 드리도록 가르침 받았습니다. 이것은 신자로서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하는 것인가요? 만일 그렇다면, 단지 산술적인 계산으로 드리기만 하면, 우리는 그분이 요구하시는 바를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만족할 수 있을까요? 우리 편에서의 어떤 특별한 관심이나 고려 없이 말입니다. 이에 반해서, 어떤 이들은 그런 헌금 방식은 율법의 일부이며 오늘날의 당신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벌어들인 금액의 십분의 일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그보다 훨씬 덜 드려도 주님이 흡족하게 여기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당신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릴 여유가 없을 때는 무엇이 올바른 지침이 되는지를 알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헌금을 하고서 손해와 희생을 당하고 있나요? 혹은 금액을 제한하여 조금만 드리거나 혹은 전혀 드리지 않는 데까지 줄여가고 있나요? 자녀들이 어리고 가진 것이 한정되어 있는 가정에서는 이것이 특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헌금은 자금으로 제한되는가 아니면 당신이 소유한 그 밖의 것들까지 포함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정기적인 수입의 십분의 일 이상을 기대하실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분은 무엇을 원하시며,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드려야 할까요?
가정생활에서 당신은 헌금을 하기전에 자녀들의 모든 필요를 확실하게 채워줄 필요성을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관리에 그 돈이 맡겨진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이고, 오직 여유 자금이 생길 경우에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 가정의 필요를 미처 다 채우지 못하면 헌금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해 보고서 얼마의 금액을 드릴지 뜻을 세우십시오. 그런 다음 언제 어떻게 드려야 할지를 결정지어야 합니다. 연보를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의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 사유들이 지원을 받기에 적합한 듯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대상들 중 누구를 도울지 결정할 수 았을까요?
신자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이 주제를 생각할 때 당신은 이 모든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헌금에 관한 주제는 어쩌면 당신이 피하고 싶은 주제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차라리 그 요구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자원들을 보유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또한 자신의 용도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그것을 비축해 놓고 싶을지 모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행하시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그러하셨다면, 주 예수님은 절대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풍성하고 비이기적인 하사품을 수령한 자로서 당신은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만 할까요?
십일조를 드려야 할까요?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의 소득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입니다. 당신은 주님의 일을 위해서 수입 중 십분의 일을 드리도록 요구받고 있을까요? 십일조에 연관된 문제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신 14:22).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민 18:21).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는 레위인들이 회막에서의 봉사를 지속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레위인들은 땅을 소유하지 않아서 자신들의 양식을 기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상업을 통해서 자기 가족을 부양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확물의 10분의 일과 가축의 초태생이 레위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만일 예루살렘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서 이러한 제물들을 가져오기 어려우면, 백성들은 그것들을 돈으로 바꾸고 그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거기서 자신들이 제물로 드릴 것을 샀습니다. 십일조는 매년 드려졌으며,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신들을 구속하신 주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끊임없이 상기했습니다.
그들이 십일조를 드릴 여유가 있었는지의 여부에 관한 문제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관점이 진술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드리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신 14:29). 희생이 아니라 이익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다른 예물들
그러나 율법의 요구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십일조뿐 아니라 그 이상이 요구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의무로서 드리는 십일조는 자원하여 드리는 일련의 예물들로 보충되어야 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자신의 감사를 참으로 나타내기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예물을 주님께 가져오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번제물, 소제물, 화목제물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레 1,2,3장) 이러한 것들은 모두 자원함에서 우러나왔고 그런 예물을 드리는 자는 그가 가져오는 예물의 종류로 자신의 감사의 깊이와 주님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 예물은 자신이 소유한 가축 가운데서 취하도록 요구되었지만, 다른 목적을 위해 자신이 사용하려고 했던 돈을 가지고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드리려는 열망이 너무나 컸고, 따라서 자신의 필요를 희생하여 그 돈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마음먹은 것입니다. 죄를 짓거나 범과하였을 때는 속죄제물이나 속건제물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그 예물 드리는 자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원들을 사용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이러한 제물들의 의미를 다루는 것이 여기서의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뜻하는 바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 희생을 각오했다는 사실을 단순히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표로 더욱 그분께 드리려고 서약하는 이들의 추가적인 드림은 레위기 27장에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남자나 여자를 주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물이나 집이나 밭 등도 서원하거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제사장에 의해 값이 정해졌고 그에 해당하는 액수가 주님께 드려져야 했습니다. 그 금액은 보통 성소 안에 비축되어 그 거룩한 뜰에서 행해지는 봉사를 위해서 쓰였습니다. 그 값을 어떻게 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지침이 명확하게 제시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주님께 자신을 완전히 드리고자 소원한다면 그는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값을 드려야 했습니다. 만일 그가 5세에서 20세 사이이면 남자일 경우 20세겔, 여자일 경우 10세겔이었습니다. 만일 5세가 되지 못한 어린아이가 그렇게 하려면 남자는 5세겔 여자는 3세겔이었습니다. 20세에서 60세 사이의 사람들의 값은 남자는 50세겔, 여자는 30세겔이었습니다. 따라서 거듭 말하지만 헌신은 드리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사람들의 값을 정함에 더하여 소유물의 값을 정함에 대한 지시도 주어졌습니다. 가축과 집과 밭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드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이렇게 모든 것을 바친다 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 깊은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들은 소진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비록 십일조는 의무였지만, 헌신된 이들에게는 그저 자신의 최소한의 의무만 지는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드림을 소원하도록 기대되었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