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권두언] 성도의 책임

행복자 2019. 4. 29. 08:56

[권두언]

                                                      성도책임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고전 16:5-6).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계획한 여행(에베소에서 마게도냐,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의 필요를 고린도 교회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당시 여행에는 우리보다 더 많은 준비, 경비, 안전, 동행 등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이같이 도전한 적이 있습니다.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고전 9:3,4,12,15)

   주와 복음을 위해, 고린도의 영혼들을 위해,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때, 사도 바울은 돈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공격과 오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에 대해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이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위해서 한 것이다. 내가 물질적 도움을 받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자비량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너희에게서 도움을 받지 않겠다."

   그렇게 말해놓고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여행에 대한 필요를 부탁하기에, 이같은 부탁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도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변명하나, 이 말을 자신을 위해 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여행을 위한 도움을 말하나, 이것도 자신을 위한 게 아닙니다. 이 부탁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가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 자신을 위해서 말한 게 아닙니다. 이게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점입니다.

   성도가 맡은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지, 그 일을 하는 자를 증거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말아야 하는 책임과 내가 오해 받지 않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면, 2차대전에서 일본군 고급 장교는 전투에 지면, 할복자살을 했습니다. 천황을 뵐 면목이 없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자살로 그의 국가를 향한 충성심은 증거되나,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의 책임은 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군인은 목숨을 다해 전쟁을 하다, 지면 사로잡혀야 합니다. 포로를 지키는 군인들이 늘어 상대국의 전투력을 감소시켜

야 합니다. 적군이 나를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신문하다 화를 내어 흥분하고, 정보가 교란당해야 합니다. 자살은 이 책임을 안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개인적 결벽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하지 않고 그로 인해 일을 망치는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내가 성도로서 얼마나 성도다운지만 생각하고 우리가 맡은 일을 전체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권위가 사용되어야 합니다. 권위는 상대방의 이해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힘입니다. 힘을 가진 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 상대의 손해를 강요할 때 이를 독재라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이해 못하는 자에게 진리를 주어 손해 보지 않게 하는것은 권위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권위적입니다. 즉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나 절대적으로 옳고 순종하는 자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믿고 순종합니다. 이는 이해 혹은 합의와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성도의 책임은 이같은 권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하고 "나를 보내어 달라" 고 합니다. 우리도 상대의 낮은 이해, 반발 때문에 어떤 일을 멈추지만, 그게 끝이 되면 안 됩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오해를 무릎쓰고 다시 추진해야 합니다. 내용의 중요성을 알고, 그러나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권위로 행하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이같은 책임과 그로 말미암은 유익이 열매로 맺히는  계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