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진리등대] 교회에 관한 사중적인 묘사

행복자 2019. 6. 10. 09:04


[진리등대]

                                            교회에 관한 사중적인 묘사

                                                                                                                                                                - W.E. 바인



   에베소서 1장은 천상에 위치한 교회의 특성을 말해준다. 즉 교회의 지위,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 교회의 운명을 말해준다.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는 "하늘에서" 머리 되신 그분과 연합되어 있다. 에베소서 2장은 교회의 구성을 말해준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육체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부류는 똑같이 이러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허물로 죽은 우리" (엡 2:3-5).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서 이러한 재료들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하려고 계획하셨다.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5-16). 이" 한 새사람" 은 그 머리에서 영적인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직 이 몸은 사실상 형성되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엡 4:13) 때에 이 몸은 완성될 것이다.

   에베소서 2장의 끝부분에서 이 비유는 바뀐다(4장에 가서 다시 이어진다).

그러면서 삼중적인 묘사가 제시된다. 첫 번째는 성에 관한 묘사이고, 두 번째는 가족에 관한 묘사이고, 세 번째는 성전에 관한 묘사이다.

   과거에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두 부류 모두 예전의 상태에서 끌어올려져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고 연합하는 높은 특권들을 누리게 되었다.


   성과 가족


   "그러므로(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 및 동일하게 한 성령님을 통해서 아버지께 나아감)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외인"(크세노스)으로 옮겨진 단어와 "손"(파로이코스, 우거자)으로 옮겨진 단어는70인역에서 자주 함께 등장하지는 않는다. 외인은 이방인이다. 그들은 묵인해주는 대상이면서도 언짢은 존재였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누리는 권한들과 제외되는 자들이었다. 한동안 그 민족 가운데서 살았다 해도 말이다.

   만약 바울이 "손" (sojourner)이라는 단어를 헬라 도시국가들과 관련해서 생각한 거라면, 이 단어는 한 도시에서 와서 다른 도시에 거주하지만 시민의 권리들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만약 바울이 70인역을 염두에 둔 거라면 그는 레위기 22장 10절과 25장 23절의 단어를 옮겨서 사용한 것이었다. "제사장의 객(sojourner)이나 품꾼은 다 성물을 먹지 못할 것이니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sojourner)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 표현은 어떤 가족이나 공동체와 함께 거주하지만 그 안에서 권한들과 특권들은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예컨대, "제사장의 객"은 성물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인 문맥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권속" 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행위는 이토록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즉 우리는 "외인" 대신에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었다! 문자적으로 말한다면 이 어구는 "성도들의 동료 시민" 이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은 동료 시민들로만 이루어진 무리이다. 이방인 신자들은 별개의 계급으로서 유대인 성도들과 함께 하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모든 성도들(전에 유대인이었든지 아니면 이방인이었든지) 이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한 자로서 함께 특권을 누린다. 이들 모두는 동일한 다스림과 보호를, 동일한 체제와 교제를, 동일한 권리와 자유를 즐거워한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손" 이 아니다. 대신에 그들은 하나님의 권속이다! 즉 그들은 손님에 불과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제 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영적인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그래서 가정생활을 하면서 온갖 혜택을 누린다.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로서 지극히 친밀한 관계를 즐기면서 말이다.


   성전


   성전으로서 성도들은 이러하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엡 2:20-21).

   터에 대해서,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입고 있는) 자라" 는 어구가 사용되었다. 이는 터가 거하는 장소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가족에 대한 상징에서 건축물에 대한 상징으로 바뀌는 것을 본다. 즉 성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터를 만든 이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사도들과 동시대의)이었고 이 터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가르침이었다. 그리스도의 증거는 터를 만드는 사역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 즉 모퉁이에 위치한 기초석이 되셨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시 118:22).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사 28:16).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격과 사역의 영광으로써 이러한 터가 되셨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에베소서 4장 12절에 가서 다시 등장하는데 거기서 그들은 "세우는" 사역을 행하는 자들로 나타난다.

   "그의 안에서 모든 건물이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흠정역, 21절). 여기서 "모든 건물"은 성전을 이루는 모든 구조물들을 가리킨다. 커다란 건축물이 지어져가는 과정에서 이처럼 서로 간에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점점 커져서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 이는 최종적인 결과물이 나타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장래에 우리는 이 성전의 모든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은 완벽하고 완전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돌들이 적절한 자리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그것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처소가 될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거룩함을 지닐 것이다. 그것은 영광과 아름다움의 건축물일 것이다. 그것은 경배를 올리는 곳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소음은 발생하지 않고 외적인 전시도 없다. 이 건축물은 지상에서  지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적인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교회에 대하여 가르치는 모든 사실들과 일치한다. 즉 이 성전은 바로 교회임이 확증된다. 이 교회의 완성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음부의 권세가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