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독자의 글] 미가야를 향한 독백

행복자 2019. 8. 16. 08:47

[독자의 글]

                                        미가야를 향한 독백

                                                                                        - 차광선

   1.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 하나이까."

   당신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여호사밧 왕의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방치하실 리가 없지만, 선지자 사백명으로 묻혀 지나갈 번한 하나님의 뜻을 어두운 무리 가운데 샛별같이 빛나게 하였습니다. 길르앗 라못. 이 땅을 치고자 했던 아합 왕의 의도는 자신의 욕심에 기인하였는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그의 불경스런 태도입니다. 거기에 더 슬픈 것은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는 사백 명의 인물들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당시에 그렇게 많았는가 하는 것도 놀랍지만 선지자답지 못한, 선지자라 불릴 수 없는 그들의 소위와 소신이 우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그나마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여호사밧의 모습은 기고만장한 아합 왕의 태도와 큰 대조를 이룹니다. 반면에 미가야 당신을 이끌어 내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강한 손길이 여호사밧을 통해 당신의 존재를 부각시키신 것이지요.


2. 

집단으로 흘러가는 다수의 의견이 자연스럽게 세력을 얻어 소수의 견해들로 하여금 설자리조차 없게 만드는 일은 인류역사 속에 통제하기 어려운 대세의 흐름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며, 유익할 수도 있고 해로울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갖지만, 성경의 세계에서 그 다수는 대체로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뜻을 더 따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요셉에 대하여 그의 형제들이 그렇고, 갈렙, 여호수아에 대하여 나머지 열 명의 정탐군들이 그러했으며, 엘리야에 대하여 팔백오십 명의 우상 숭배자들이그러했고, 당신에 대하여 선지자 사백명이 역시 그러합니다. 다수인 그들은 명색이 선지자였음에도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기보다는, 무늬는 하늘의 무늬를 띠고 있지만, 사람의 견해로 조성된 사이비 예언에 더 친숙해 하며, 하나님의 진실한 예언인가를 검증해 보려는 진지함도 고뇌함도 없이 그것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당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요 고독한 진리의 나팔수 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오듯, 들에 머물며 아비의 양떼를 돌보던 다윗에게 찾아오듯 그렇게 누군가 찾아왔다는 사실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틀림없이 하늘의 부르심을 홀연히 받고, 먹이를 앞에 둔 들개들의 탐욕스런 모습을 한 대중 앞에 서야 했을 것입니다. 철저한 소외와 고독, 막다른 절벽과 바다가 당신이 직면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신의 유일한 창은 오직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3.

   아합 왕이 보낸 사자 내시가 당신을 회유하려 듭니다. 다른 선지자들처럼 당신도 왕이 듣기에 좋아할 말을 똑같이 말해달라는 것이지요.

   당신은 단호한 태도를 취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참된 선지자는 여종이 주모의 손을 주시하듯 사람의 말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자입니다. 사람 의견의 호불호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하신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지요. 여기 내시의 요구는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요구와 욕망에 맞추려는 다수의 요구이며 세상 풍조에 편승한 자들의 주장입니다.

   슬픈 것은 대량생산 소비시대의 상업주의 가치관이 신앙의 세계에 어느덧 유입되어 그것을 오염시키면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구하기보다 세상에 유통되는 통속적인 가치에 편리함과 쾌락의 패스트푸드를 더 선호하는 폐단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미 통속화된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보다 그것의 색채만 조금 띠게 하면서, 윤리적이고 상식적이며 교양 있는 설교로 포맷하여 청중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 조심합니다. 소비자의 구미에 맞게 하여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생산자, 판매자처럼, 성도의 흥미와 감동에 초점을 둔 메시지가 점점 환영받는 시대가 되어간다는 우려가 높습니다.

   후일에.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랴"는 설의법적 질문으로 자신이 만일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선고하기에 이릅니다. 그것은 단순한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확고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상기시켜주고, 동시에 사람의 감성을 만족시키려는 유혹이 얼마나 큰 세력으로 다가오는지를 경고하는 것이지요.


  4.

   하늘의 어전회의를 보여주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악한 영의 역사가 인생 중에 어떻게 사특하게 역사하는지를 밝히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야하는 엄중한 사명의식을 인식시키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지는 백성들." 이것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 선 아합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백성을 위한 목자로서나 왕으로서나, 그가 깨닫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의 리더십은 무너졌으며, 인도자로서 실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실상이 이러한데도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아부아첨의 결정체인 철뿔을 만들어 아합 왕으로 하여금 더 깊은 자기기만과 오류 속에 빠져들게 합니다. 아합은 파멸을 향해 출발한 철병거에 올라타고는 달리는 말에 더욱 채찍질을 해댑니다. 시드기야와 같은 종교적인 사이비 인도자와 그 영향력이 진리의 울타리 주위를 기웃거리면서'옛사람'이 즐겼던 정욕의 이력들을 따르게 하며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의를 더 구하는 자들에게 세상의 즐거움과 기쁨을 따르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5.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증거 되는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도자들의 회심, 성도들의 변화와 성장이라는 열매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선 세대가 남긴 전설적인 기록을 견주어 보면 아무래도 그런 은혜를 누리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전설적인 기록이란, 이를테면 어느 전도자가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강단에 서서 말씀을 시작하기도 전에 청중가운데서는 벌써 회개의 눈물을 터트리는 회심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이며, 또는 말씀이 온 도시에 역사하여 거리의 술집들이 하나 둘 문을 닫게 되고 주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교회당에 넘치게 되었다는 그런 종류의 기록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말씀의 사역이 언제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므로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근실하게, 충실하게 그리고 묵묵히 전하는 태도가 중요한 일이겠지요.

   어떤 이는 선지자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신약시대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의 차이는, 전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직접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기록된 성경 내에서 전하는 것의 차이가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받아 들인다면, 당신이 말한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 곧 그것을 말하리이다" 했으니, 오늘날엔 "성경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놓으신 그 말씀 곧 그 진리를 전하리라"가 되겠지요.

   또 다른 이는 전하는 말씀을 "불붙은 논리"라고, 또 어떤 이는 말씀을 전하는 자를 "말씀의 청지기 직분을 가진자" 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표현입니다. 아무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말씀을 사모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가, 먼저는 자신을 가르쳐주시기를 겸손히 바라고 소원할 때 성령께서는 비로소 그 넘치게 하신 그릇을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역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가지 믿기로는, 모름지기 말씀을 전하는 자는 붉은 카페트가 깔린 레스토랑과 안일의 거리에 익숙한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인적조차 없는 광야에서나 절해고도에서 지독한 고독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위로를 갈급해하며, 세상과 영혼을 향한 슬픔으로 응어리진 가슴으로 십자가의 예수님과 영광의 보좌 위 예수님을, 그리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 바로 그들로부터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할진대, 수많은 날들에 말씀을 전할 기회를 가졌던 저로서는 메마르고 나태한 심령으로 겁없이 남의 것을 차용하여 제 것인 양 전한 것과, 설익은 밥에 무성의하게 만든 반찬을 내어 놓는 게으른 여인의 밥상처럼, 급조한 판잣집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말씀을 말씀이라고 전해온 날들이 부끄러워집니다. 게다가, 리차드 벡스터가 말한 것처럼 "말씀 전하는 자들이 말씀을 정확히 전하려고 열심히 연구하지만, 전한 대로 정확히 살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거나, 한두 시간 동안 전할 말씀을 위해  일주일 동안 말씀대로 어떻게 잘 생활할 것인가를 연구 하느라 한 시간 투자하는 것은 너무나도 긴 시간처럼 느끼는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제 자신 같은 사람에 대한 명확한 표현이 되고 말았으니, 저야말로 정녕 통회하고 참회록을 써야 할 자입니다. (세월을 낭비하며 말씀에 근실치 못했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6.

   악취와 어둠뿐인 골방입니다. 골방이라기보다는 아무렇게나 파 놓은 토굴 같은 곳일 수도 있겠습니다. 적막감 속에 아마도 당신은 버려진 것 같은 절망감이 그 독방에 폭풍처럼 엄습해오는 것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럴경우, 죽음의 그림자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실감하게 되겠지요. 당신처럼 그 절망의 상황, 영원히 버려짐을 당한 것 같은 낙망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는 루마니아의 목회자 리차드 범브란트를 기억합니다. 모든 것이 단절된 그 어둡고 추운 독방에서 십육 년 이상을 고립되어 지내며, 뇌리에서 마음에서 해체되고 소멸되어 가는 말씀을 붙들기 위해 몸부림쳐 기도하는 그에게 주님께서 임재하셔서 그의 영혼을 위로하시고 견고케 하셨답니다. 절대 고독의 순간에 천군천사가 청중이 되어 그의 메시지를 경청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하니, 그가 비몽사몽간에 겪은 그 위로와 환희에 찬 경험을 혹여 의심하는 것은 불손하고 오만한 태도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 뿐만 아니라 주께서 승천하시고 성령께서 오신 이래, 초대 교회로부터 현대 후기 사회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무명, 유명의 성도들이 그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 유사한 고난과 능욕을 겪었을 것인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셨고 기록된 말씀이 성취되기를 기뻐하셨으며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것과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을 사모하여 신명을 바쳐 순종한 사도 바울이 주님의 위로와 매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것은 당신처럼 감옥에 있을 때였습니다.

   능멸을 받으며 감옥에 던져진 미가야, 당신의 모습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자가 진리의 길을 가는 동안 때로 어떤 대접을 세상으로부터 받게 될는지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7.

   지금 당신 앞에 초라한 떡과 물이 놓여있습니다. 당신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하늘을 향하여 있습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전심으로 자신을 드리게 될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당신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성령으로 감응된 자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안으로, 안으로 흘러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무례한 일 같긴 하지만, 한 가지 제안하고 싶습니다. 자, 고생의  떡 한 조각과 고생의 물 한 컵 앞에 두고 우리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서로를 위해 축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사명을 감당하고자 가슴을 태워 은혜를 구하며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간 분들과 지금 그렇게 가고 있는 분들, 그리고 주님 오실 때까지 그 길을 고독한 발걸음으로 가야할 분들을 위해. 그리고 그날, 평강과 희락이 아름답게 드리운 에덴의 푸른 정원에, 우리 주님께서 그 모두를 위하여 예비하실 아름다운 식탁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대하 18장; 시 123:2; 갈 1:10; 요 4:34; 딤후 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