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전도 애정으로 하라
노인전도
애정으로 하라
- 허윤욱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3:8).
노인 전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랑으로 하라는 것이다. 사랑으로 전도하지 않는 전도자가 있을까 마는 나은 방법과 깊이 있는 사랑을 위해서 같이 생각해 보자고 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현대 노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애정 결핍증에 걸려 있다고 하여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 세상에 사랑을 받아서 좋아하지 않는 동물은 없을 것이다. TV에 보니까 심지어 독사도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 길들여져 있는 것을 보지 않는가. 그 중에 사람은 더욱 사랑 결핍증을 호소 하고 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송이 보급되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인간은 사랑 결핍증을 앓고 있음이 분명하다. 구도자들도 그러하고 특히 노인들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인생 말년에 모두가 서운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것들이 많은 세대다.
이번 에는 노인전도에 관하여 애정으로 하라는 제목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애정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주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생각할 때 감히 두렵고 죄송하여 우리에게 친근한 애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첫째로 애정으로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이지 않는가. 십자가가 무엇인가. 사랑 아닌가. 주님이 죄인을 죽도록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하셨는데 이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에게서 죄인을 사랑하는 애정의 모습이 나타나야 함은 당연하리라. 때로 큰 소리가 나고 심한 변론이 있을 때에도 전도자의 애정이 저들에게 인식되면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전도하는 중에도 기회 있는 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해 줄 뿐만 아니라 지금 이렇게 전도하는 자체가 사랑하기 때문임을 이야기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전도 중에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경고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상대로 하여금 진지하게 들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로 가는 것을 경험한다. 집사나 장로를 하며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과 교제할 때도 참된 하나님의 종은 사랑하기 때문에 바른 말을 한다고 말하여 진지한 교제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달콤하고 듣기좋은 이야기를 하지 말라. 그 이야기는 우선은 달아도 결국 멸망의 길일 수 있다. 쓴 소리가 결국은 단소리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는 참사랑으로 전도하는 전도자의 모습을 저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복음은 사랑이다. 하나님도 사랑이다. 예수님도 사랑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셨다. 그런데 그 놀라운 사랑이 전도자의 부덕으로 막혀 전달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전도자의 무능함이나 전도자의 사랑 없음으로 인하여 가리어진다면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요 주님 앞에서 죄스러운 일일지라.
전도자들이여, 사랑을 구하자. 사랑을 따라 행하자. 사랑으로 전도하자. 사랑을 전하자. 성경의 핵심은 사랑이다. 눈물을 흘려야 하리라. 사랑을 달라고 부르짖어야 하리라. 우리에게 사랑이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사랑의 모습은 나타내야 하지 않겠는가. 저들은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고 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우리를 통하여 사랑을 보고, 우리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리라. 필자는 참으로 이 부분을 평생에 가장 안타깝게 여기고 살아왔다. 주님을 닮지 못한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 문제는 평생에 기도해야 할 문제라고 여겨진다. 다시 말하거니와 전도자들은 저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노인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사랑에 굶주린 저들은 사랑을 갈망한다.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줌으로 변화된 경우는 수없이 많다.
전도훈련 때 우리 수련생들이 할머니 앞에서 재롱을 떨며 어깨를 주물러 드리는 봉사로 복음을 들으러 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지난 여름 전도 훈련 때는 그곳 일군이 자기 사는 아파트 경로당에 마음 좋은 아저씨로 인식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가끔 과일이나 기타 음식을 경로당에 전달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전도자로 드러나니 저들이 예배당에 몰려와서 복음을 들었다. 사랑의 힘이다.
둘째로 애정으로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저들은 사랑을 기다리는 굶주린 이리와 같다. 평생 헛된 삶을 살아 몸으로 헛됨을 깨달은 세대가 노인의 세대다.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였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에게 아무리 헛되다고 열변을 토해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노인들은 다르다. 헛됨을 진정 몸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젊은 날 꿈을 이루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정열적으로 살았다. 남보다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여 자수성가 하였다. 자식들도 누구보다 뒤떨어지지 않은 자식만들려고 몸부림치며 살아왔다.자기는 못 먹어도 자식은 먹여야 했다. 자기를 위해서는 몇 푼짜리 신발하나 사신는 것을 아까와 했지만 자식들은 남에게 업신여김 받을까봐 큰돈 투자하여 좋은 옷, 좋은 신발 신겼다. 모든 것을 자식들을 위해서 투자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자식들의 배신이다. 저들이 꼭 배신을 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잘한다 하여도 자식을 남에게 빼앗긴 마음으로 서글픈 것이 노인의 세대다. 자식들의 효도나 불효 상관없이 서럽고 섭섭한 것이 노인의 특징이다. 평생 고생하여 살아왔는데 병든 몸과 서러운 감정만 남아서 슬픈 것이다. 그것을 몸으로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이며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 헛것이다. 다 쓸데없다" 하는 한숨과 함께 허탈한 심정으로 하루하루 이어가는 노인이다.
필자가 전도하면서 많은 노인들을 만나본 바 노인들의 마음에는 자신은 수고와 고생만 하고 버림받았다는 감정이 내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주에서 전도할 때에 그때는 차도 없고 걸어서 버스를 타거나 오토바이로 산속 깊은 곳에 사는 노인부부를 찾아다닌 적이 있는데 참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찾아가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사람이 그립고 사랑이 그리운 사람들이었다. 노인전도 초기 글에도 언급 하였던바 현재 우리네 노인들은 참 힘든 시기를 살았다. 특히 할머니들은 경직된 남존여비 사회 속에서 뜻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왔다. 인간 대접을 못 받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왔다. 사랑이 무엇인지, 애정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냥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아온 세대다. 남편 얼굴도 못보고 결혼한 세대다. 어떻게 보면 불쌍한 세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랑에 굶주린 우리네 노인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완전한 사랑을 전달하는 자가 전도자니 얼마나 놀라운 직분인가. 얼마나 놀라운 사업인가. 세상에 사업이 많지만 이보다 더 위대한 사업은 없다. 불쌍한 우리네 노인들에게 참사랑을 나누어주어서 저들의 남은 생을 행복하게 해드리자. 저들의 남은 삶에 참된 웃음을 드리자. 저들이 영원의 세상에서 놀라운 위로를 받고 살도록 효도하자. 이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다.
세번째로 사랑은 능력이다. 사랑은 엄청난 능력이다. 성경의 모든 사역은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졌음을 아는가. 요한일서 4장 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 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태초 이전에 영원의 세계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이 사랑의 짝을 지으시기 위한 계획을 세우셨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 9절과 3장 9절의 경륜이다(경륜, 오이코노미아, 일, 계획). 성부이신 하나님과 성자이신 하나님과 성령이신 하나님이 사랑의 짝을 데려오시는 계획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 계획의 실천이 창세기 1장 1절이다. 그러므로 우리 눈앞에 나타난 모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 때문에 세상을 지으셨고 인간을 지으셨다. 인생들은 선악과로 타락했지만 사랑이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계획을 실천하시기 위하여 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은혜로 부르셔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이어 나가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일으키시고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여하심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사랑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는 사랑의 표현을 실현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낼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왔다.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리라. 사랑은 죄인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세상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놀라운가. 사랑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비참한 삶을 살고, 짐승 대접을 받아도 하나님은 끝까지 아들을 내어주셨다.
예수님은 어떠한가? 사랑의 힘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33년이라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참고 견디셨다. 사람들에게 온갖 비난과 수모를 다 당하면서도 참으셨다. 자신에게 세상을 창조할 힘이 있었지만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견디셨다.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셨다. 사랑 때문이다. 지옥에 빠지는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그 사랑의 힘으로 드디어 영원의 세계에서 계획하신 사랑의 짝을 찾으셨으니 곧 교회요 교회의 지체된 우리들이다. 사랑의 짝에 대하여 하나님에게는 아들이요 예수님에게는 신부요 성령에게는 일치라. 그가 내 안에 거한다 하여 일치라고 요한복음 14장 17절에 언급하고 있다 이 놀라운 사랑의 역사는 요한계시록 19장 6절 이하에서 영광스러운 결혼식으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얼마나 감격적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이다.
오늘날 주님을 섬기는 많은 경우에 형제 사랑을 업신여기고 진리를 지킨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행동인지 알리라. 사랑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전도자는 최선을 다하여 사람에게 성경적으로 논리와 상식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여야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힘을 의지하지 않으면 전도를 잘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랑에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면, 사랑없는 전도를 하고 있다면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 옆에 있던 악한 강도도 변화시켰다. 기독교인을 핍박하여 죽이러 다니던 사울을 변화시켜 바울로 만든 힘도 사랑이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은 것도 사랑이다. 사랑은 녹이지 못할 것이 없고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사랑은 넘지 못할 장애물이 없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루는 힘이다. 사랑은 모든 승리의 힘이다.
사랑하는 전도자들이여, 불쌍한 우리네 노인들을 사랑으로 녹이자. 저들의 빼앗긴 인생을 사랑으로 되찾아주자. 사랑은 저들의 굳은 마음을 녹여 뜨겁게 할 것이다. 사랑은 저들의 굳은 마음에 눈물을 줄 것이다. 필자는 노인들이 강하게 반대하다가 갑자기 돌아서는 것을 수없이 많이 보았다. 이유를 살펴보면 저들이 결국은 사랑에 녹아내린 것을 확인하곤 하였다. 전도자가 전도를 잘하여서 저들이 구원받았다고 혹시라도 상상하지 말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아닌가. 인간의 작품이 아니다. 전도자의 열정적인 수고의 결과도 아니다.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저들을 구원으로 인도한 것이다. 전도자가 이 사실을 뼈속 깊이 새겨 흐트러짐 없이 주님 앞에까지 달려 가야 할 것이다.
세상 만물이 운행하는 힘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지구가 돌고 있는 것도 사랑의 힘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받는 힘이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결코 없다. 전도의 내용도 사랑이요 전도의 방법도 사랑이요 전도의 열매도 사랑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작품일 뿐이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용하사 사랑의 힘으로 놀라운 사역을 이루시기를 기도드리며 줄이고자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