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전략] 특집 - 국내 전도, 여기서 멈출 것인가? (3)
[전도전략]
특집 - 국내 전도,
여기서 멈출 것인가? (3)
- 허윤욱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다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빌 1:27).
하나님의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방해되는 것이 외부에만 있지 않고 내부에도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상이 전도를 방해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적이 내부에 있는 것이다. 도 거짓 종교들의 반대보다도 거듭난 성도들이 복음 확장을 방해하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찌 그런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현실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니고 교회사 2천년동안 쉬지 않고 이어져온 사단의 전략이다. 이번호에는 이와 같은 부분들을 생각하면서 국내 전도를 위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교회 존재 가치는 전도에 있다.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드리고 세상을 향하여 전도하는 것이다. 교회가 일심으로 합력하여 복음을 전해야 함은 당연한 하나님의 뜻이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도
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내가 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셨다. 2천년 동안 교회는 세상에서 사라진 적이 없다. 중세 암흑시대에도 교회는 결코 끊어지지 않았다. 전도를 통해서 교회가 일어나고 교회를 통해서 전도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도 교회가 전도하지 못하도록 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교회 전도를 막아왔다. 국내전도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이와 같은 사단의 전략을 냉정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꼭 문제 있는 성도가 아니라도 훌륭하게 섬기는 성도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의 방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끔찍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첫째, 사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기적으로 살게한다. 로마서 4장 25절을 보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주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희생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가 이기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주님이 나를 위해 내어주셨으니 나도 무엇을 내어줄 것인가 하는 질문이 성도의 삶의 시작 아닐까?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내어줄 것이 있는가, 무엇을 드릴 것이 있는가를 고민하는 이타적인 성도가 되어야 하리라.
생각해보면 내어드릴 것은 많다. 나의 자존심을 내어놓고 나의 시간을 내어놓고 나의 물질을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해 물질도 내어드리기를 주저한다면 이것이 참다운 신앙인가? 주님 자신의 삶을 나를 위하여 내어줌이 되었으니 나도 주님을 위해 삶을 내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성도들이 모여서 구원의 역사를 이룰 것이다. 주님은 생전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고 하셨다. 주님의 삶이 그랬다. 또 자신을 따르겠다는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것이 원칙이다.
주님은 삶으로 본을 보여주셨다. 주님은 감람산에 가셔서 노숙을 하시고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셔서 말씀을 전하셨다. 주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 억지로 왕을 삼으려 해도 포기하셨다. 왜냐하면 복음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 모든 권세와 권력과 자존심까지도 다 포기하셨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복음 증거를 위해 무엇을 내어줄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시기 바란다.
둘째, 사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불평하게 한다. 교회에서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들려오면 사단이 박장대소 하고 웃는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성도가 많지 않다. 주님을 위해서 열심은 많은데 자세히 살펴보면 은근히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다. 불평은 일하는 일군들의 힘을 빼는 데는 특효약이다. 약효가 놀라워서 불평하는 성도들이 일어나면 일군은 그냥 주저 않고 싶은 신정이다. 알고 있는가?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교회의 수많은 일들의 중심에 일군들이 있는데 일군들의 힘을 빼면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일군들의 힘을 빼는 것만이 아니다. 성도들과 동역자들의 힘을 빼는 것이다.
그리고 불평은 성도들의 연합을 깨뜨린다. 성도 사이를 벌리는 데는 불평불만이 최고다.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보라. 불평으로 얼마나 시달렸는가. 전쟁의 승리보다는 오히려 아군에게 치명타를 주어서 수만 명이 죽음을 당하는 역사를 보고 있지 아니한가. 사단은 성도들의 입에 불평을 주어서 전도를 방해하는 것이다. 불평은 자신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고 영력을 약화시켜서 육신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불평을 일으키는 사람은 교회 전도를 방해하는 방해꾼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 불평이 들어오면 성도들 사이에 일군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진다. 그 후에는 분열로 치닫는다. 그것 때문에 온통 정신이 그리 집중된다. 교회 분위기도 안 좋다. 구도자들이 와도 실망하고 갈 것이다. 교회는 가정인데 가정에 분위기가 안 좋으면 아이들도 가출하지 아니한가. 성도들이여, 불평을 물리쳐서 온 교회의 힘을 모아 전도에 힘쓰자. 불평은 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하려는 일군들의 발목을 잡는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사단은 교회를 분열시켜 힘을 분산시킨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인다. 성향이 같은 사람끼리 모인다. 이러한 분열은 육신적인 분열이다. 사단의 정책은 분열이다. 하나님의 정책은 연합이다. 놀라운 것은 수많은 성도들이 사단의 정책을 더 선호하는 현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갈라디아 5장 19절 이하에 있는 육신적인 것들의 예를 보면 그중에 분열에 해당되는 것이 네가지나 된다(원수 맺는 것, 분쟁, 당 짓는 것, 분리). 사단의 역사는 분리이다. 에덴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켰고 아담과 하와를 분리시켰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에덴에서 분리되어야만 했다.
한국 국내 전도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분리의 문제를 심각하게 각성하여야 한다. 분열의 문제는 지역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단은 지역교회와 교회간에 분리를 시도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길을 막는 것이다. 지역교회가 천거의 문제로 하나 되지 못하여 외형으로 교제하나 실제로 교제가 단절되어가는 현실은 너무나 슬픈 모습이다. 이것이 사단의 전략임을 깨닫고 속히 회복하여야 할 숙제이다. 도시에 있는 교회들이 힘을 모아 전도대회나 수양회를 하여 전도할 수 있는 역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 된 곳에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시편 133편을 잘 알고 있지 아니한가. 연합하는 곳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전국적으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월이 지날 수록 처음 사랑이 식어가는 현실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성도들이 이 일을 걱정하고 있다. 하나 됨이 깨지는 이유는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 됨을 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출교나 징계의 경우나 그와 방불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나와 섬김의 방법이 다르다고 정죄하고 멀리하고 분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것이 사랑의 행동인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12:7).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나는 성경적이다. 나는 진리를 따른다는 차별화를 앞세워 형제와 교회를 정죄하고 분열을 획책하는 것은 바리새인적 행동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따르려는 노력을 죽는 날까지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겨자씨 같이 작은 이론을 내세워 형제 사랑을 포기하며 분열을 획책해서는 안된다. 많은 경우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열심에 잡혀 자비를 버리고 제사를 택하는 어리석음을 한국에서도 보고 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잠 18:1). 분명한 것은 무리를 지어 분리를 획책하는 것은 자기 소욕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의에 잡혀 자기만 옳은 길로 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알아야 한다. 자기 의에 잡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
근간에 분열적인 방향으로 치닫는 현상들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주님을 슬프게 하는 행동이라 여겨진다. 분열은 한국교회의 퇴보를 가져올 것이다. 그 퇴보는 선진국에서 본 시들어버린 종말을 가져올 뿐이다. 교회를 분열시키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자들을 주님은 심판하실 것이 분명하다. 두려워하여야 한다.
서두에 기록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나로 말미암아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은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와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의 방해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복음 전파의 방해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프고 끔찍한 일인가. 한국의 성도들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자신의 삶을 점검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부흥을 맛보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지 불합당하게 사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고쳐야 할 것이다.
또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 신앙을 위하여 협력" 해야 한다. 이 말씀은 교회가 하나 되는 비결을 알려준다. 복음 신앙을 위해 협력함으로 하나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이라는 공통 분모가 있다는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방법이나 스타일에 약간의 차이들이 있을 수 있지만 복음은 공통이지 아니한가. 복음이 아니면 우리가 서로 아는 체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 아닌가. 복음을 통해서 하나 된 무리들이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복음으로 하나 될 수 있는 것이다. 복음을 위해서 물질과 마음과 몸을 협력하다보면 자연히 하나 되어가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복음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타락과 분열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회개하지 아니하고 어찌 죄인들의 회개를 기대하겠는가.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훈을 생각하며 회개해야 한다. 먼저는 회개를 통하여 성도들과 성도들이 화해해야 한다. 불평과 불만으로 얼룩진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회개와 화해를 통하여 교회가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되어야 한다.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한다. 눈물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시간이 흐른 후에 공멸할지도 모른다. 에베소 교회의 경고를 잘 새겨야 한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고 지상에서 교회 이름조차 사라져버린 에베소 교회의 교훈을 새겨야 한다.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달려오신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일군들이여, 소자가 분에 넘는 말을 하였을지라도 용서하시기 바란다. 기울어져가는 한국교회를(필자의 관점에서) 걱정하는 열정이라고 이해하여 주시고 품어주시기를 바란다. 주님의 오심이 가깝고, 사단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복음을 위한 충정으로 몇 말씀을 드렸음을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랄뿐이다. 이 글이 조금이라도 촉진제가 되고 각성제가 되어서 한국에 복음의 열정을 깨우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