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봅시다] 시몬베드로(9)
[생각해봅시다]
시몬 베드로(9)
- C. H. 매킨토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시몬 베드로의 회복을 상고해 보려고 한다. 그의 회복에서 우리는 지극히 실제적인 중요한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타락에서 우리는 인간의 연약과 어리석음을 배우며 그의 회복에서 우리 주님의 은혜와 지혜, 신실하심을 배운다. 그의 타락은 실로 깊고 두렵고 치욕적이었다. 그러나 완전하고 놀랍게 회복되었다. 우리는 베드로가 이 두 가지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다. 그는 이 사실을 놀람과 사랑으로 찬양하는 마음으로 영원토록 기억할 것이다. 베드로의 회복에서 빛나는 은혜는 독같이 나타난다. 몇 가지 눈에 띄는 점들을 살펴보자. 지면의 제약으로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먼저 그 초래된 원인을 살펴보자. 복음전도자 누가는 영감을 받아서 비범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전해준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사탄이 그의 청구대로 허락받았다면, 가련한 시몬은 절망적으로 파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는 단지 욥의 경우처럼 도구로 사용되어 필요한 일을 수행했을 뿐이고 자기 일을 끝내고는 퇴장했다. 그는 감히 그의 지정된 범위를 털끝만큼도 넘어서지 못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복된 일이다. 사탄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간교하고, 교활하며, 능력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를 넘을 수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베드로가 조용히 걸었다면, 그리고 겸허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다면, 자신을 깊이 살폈다면, 그는 사단의 시험에 들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혼에게는 사탄은 아무 힘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는 절대 안전과 완전한 거처가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팔을 단순히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원수의 쏜 화살이 닿을 수 없다. 이점에서 사도는 실패했고, 심각한 과정을 통과하고 나서 자기 자신을 배워야했다.
그러나, 아,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 했노라"는 말씀의 능력과 고귀함이여! 여기에는 확실히 비밀이 숨어있었다. 여기에 시몬이 회복된 이유가 있었다. 원수가 그를 파멸시키려는 두려운 시기에 예수님의 기도가 실수하는 그의 종을 붙드셨다.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중보 기도에 대항해서 사탄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인간이 보기에 모든 것은 절망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 놀라운 기도는 베드로의 안전의 근거였다.
주께서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셨는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는 말인가? 저주하고 맹세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라."이다.
여기에 나타난 빛나는 은혜를 무엇이 능가할 수 있겠는가? 은혜로우시고 사랑이시며 신실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무서운 죄를 보시면서도, 그가 범하려는 모든 것, 그 모든 슬픈 망각을 아시면서도, 그가 믿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죄악과 파멸의 심연에서 건지시는 그 은혜의 영원한 안전을 믿는 본심을 잃지 않도록 그를 위하여 실제로 간청하셨다.
비교할 수 없는 은혜! 아무것도 그 밝음과 축복에서 이 은혜를 능가할 수 없다. 이 기도가 없었다면 베드로의 확신은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그의 무서운 죄를 생각했을 때 그의 영혼이 겪은 두려운 싸움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제정신이 돌아와서 전 장면과 헌신의 맹세, 즉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이모든 일을 생각하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사랑하는 주를 저주하며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빛과 지식, 특권에 반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에 반하는 죄를 범했다는 죄의식이 깨어났을 때, 그것은 영혼의 역사에서 두려운 순간이었다. 사탄은 그러한 위기의 순간에 특히 바쁜 것이 확실하다. 그는 가장 무서운 제안을 쏟아 놓으며, 모든 종류의 의문을 제기하고, 율법적인 고소와 의심과 공포를 일으켜서 영혼의 기반을 뒤흔든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찬양할지라! 원수가 승리할 수는 없다. "여기까지, 더 이상은 나갈 수 없다." 이김을 주시는 중보자의 탄원은 믿음을 혹독하게 단련하여 영혼이 깊고 어두운 파도를 통과해서 영적 교제의 끊어진 통로를 회복시킨다. 또한 영적인 상처를 치유하고 타락한 영혼을 끌어올려서, 방황하는 영혼을 돌이키고 찬양과 감사로 그 심령을 충만하게 한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여기서 우리는 가장 감동적인 방법으로 제시된 시몬 베드로가 회복된 원인을 본다.
우리는 잠시 역사하는 수단을 살펴 볼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전도자 누가에게 빚지고 있다. 누가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인간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무엇이 사람 마음을 억제하고 감동시키는지,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이미 베드로가 점점 내리막길을 걷는 것을 보았다. 그의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이동하는 슬픈 걸음, 도덕적으로 멀어져서 비난받을만한 타락, 조심성과 기도를 잊음, 멀리서 따라감, 원수의 난로에 몸을 녹임, 비겁한 부인, 저주하며 맹세함, 이 모든 것이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부끄럽고 무섭게 아래로! 그러나 그 실수하고 방황하며 죄짓는 사람이 가장 낮은 바닥에 도달했을 때, 바로 그때에 그의 회복의 방법이 하늘의 광채와 함께 나타난다. 그 회복의 원인은 그리스도의 기도에 있고, 그 방법은 그리스도의 눈빛에 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십히 통곡하니라" (눅 22:61-62).
그렇다. "주께서 보셨고", "베드로는 기억났고", 베드로는 울었다. "심히 통곡했다." 동정어린 눈빛! 감동적인 기억! 통곡! 단 한 번의 눈빛으로 생겨난 인간의 마음의 깨달음, 이와 같은 고백 그리고 이 같은 묘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영혼의 심장이 바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고 확실히 믿을 수 있다. 그는 결코 그 놀라운 주님의 눈빛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전능하신 도덕적 능력으로 가득 차있고 마음을 꿰뚫고 녹여서 영혼을 굴복하게 했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 이것이 전환점이었다.여기까지 모든 것이 어둠을 향했다. 여기에서 하늘의 빛이 깊은 도덕적 어두움에 비춘다. 그리스도의 가장 고귀한 기도가 응답되고 있으며, 그분의 능력 있는 눈빛이 역사하고 있다. 마음의 근원이 부서지고 참회의 눈물이 흘러 넘쳐서 내적인 역사의 깊이와 진실과 그 강렬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할 때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느끼게 되고 판단하게 되며 우리 죄를 자백한다. 그것도 아주 깊이 느끼고 철저히 판단하고 충분히 자백한다. 그것은 단순히 경솔하게 혹은 형식적으로 "제가 죄를 범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진실성과 정직함과 진지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내면적인 진실을 원하신다. 사도의 타락과 회개에는 형식적이거나 경솔함이 없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었고 절절히 진실이 있었다. 그 회개의 동기와 그 방법이 그와 같은 결과를 낳은 것은 필연이었다. 베드로를 위한 주님의 기도와 눈빛의 역사의 값진 결과로 베드로는 회복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와 눈빛이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의 위대한 두가지 면을 놀랍고 아름답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는 당연히 알게 되었을 것이며, 이것은 중보자로서 우리 주님께서 성부와 동역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가치 있고 뛰어난 중보와 다른 보혜사 즉 성령이 사용하시는 말씀의 능력과 효력을 소유하고 있다. 베드로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는 우리를 위한 그분의 중보에 해당되며, 베드로에게 주신 그분의 눈빛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를 회복시키는 말씀에 해당된다. 우리 생각으로 또는 행동으로 죄를 범하면,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중보자께서는 우리 대신 하나님께 말씀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회개와 회복을 이루는 근원이다.
중보의 위대한 주제는 여기서는 계속하지 않겠다. 그것은 최근 "그리스도의 전적인 충분하심" 이라는 글에서 밝힌바 있다. 이 글에서는 베드로의 회복의 두세 가지 양상을 간단히 언급함으로 마치고자 한다. 그것은 참된 회복의 모든 경우에 기억될 것이고 추구해야 할 일이다.
첫째로 양심의 상태이다. 베드로가 타락한 후 그의 양심의 충분하고 완전한 회복에 관하여 그의 생애의 후반에서 가장 분명한 증거를 본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본 바와 같이 디베랴 바다에서의 감동적인 장면을 보자. 부활하신 주님의 발 앞에 가까이 가려고 어부의 겉옷을 걸친 채 바다로 뛰어드는 사랑스럽고 진지하고 철저한 저 사람을 보라! 그는 배나 그의 동료를 기다리지 않고 거룩하게 회복된 양심의 모든 사랑스런 신선함과 자유함 속에서 그의 구주의 발 앞으로 달려간다. 거기에는 혼란시키는 두려움도 법적인 굴레도 의심도 어두움도 거리감도 없다. 그의 양심은 완전히 안식하고 있다. 주님의 기도와 눈빛, 이 두 가지 위대한 변호의 역사는 효력이 증명되었다. 베드로의 양심은 완전히 바르고 건전하고 선했으므로 그의 주님 앞에서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그 곳은 거룩하고 행복한 안식처이다.
양심이 아름답고 놀랍게 회복된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사도행전 3장의 베드로를 보라. 거기에서 그는 수천의 유대인 앞에 서서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을 부인했다고 그들을 담대히 책망한다. 매우 다른 상황이었지만 그는 바로 그 일을 해냈다. 베드로는 어떻게 이렇게 행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담대히 말할 수 있었을까? 왜 이 무거운 짐을 야고보나 요한에게 맡기지 않았는가?
그 대답은 매우 단순하다. 베드로의 양심이 완전히 회복되었고 완전히 정화되어 안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를 부인하는 무서운 죄를 범한 것을 책망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도덕적 무감각의 결과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신선한 회복의 결과이다. 솔로몬 행각에 모인 군중 가운데에서 누군가 부끄럽게도 베드로가 그의 주님을 부인한 것을 책망했다면 우리는 쉽게 그의 대답을 생각해 낼 수 있다. 그의 죄에 대하여 "심히 통곡했던" 사람은 우리가 확신하기에 그러한 도전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할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심한 통곡이 그의 회복의 칭찬할만한 근거라는 것은 아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그의 영혼에서 회개의 역사가 실제적임을 증명했을 뿐이다. 도덕적 무감각과 그리스도의 피와 중보를 근거로 하여 양심이 안식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회복의 역사(work)에 포함된 또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상태이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극히 중요하다. 마음 속 깊이 도달되지 않았다면 어떠한 영적 회복도 온전하지 못하다. 여기서 디베랴 해변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면 주님께서는 배드로의 마음의 상태를 매우 자세히 힘 있게 다루고 계심을 발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책에서 가장 사랑스런 면담에 관하여 우리가 원하는 만큼 그렇게 자세히 기술한 곳은 없다. 영감으로 된 기록을 인용하는 것 이상으로 할 수는 없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준비하고 요리하셔서 제공하는 놀라운 식사 자리에서 얼마 전에 있었던 지난 장면에 대해서 암시조차 없는 사실을 살펴보는 것은 심히 흥미로운 일이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니." 여기서 시몬은 신실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자신 있게 고백한 말을 떠올렸다. 그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했었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추궁의 질문에서 그는 분명히 그가 세 번 거듭 부인한 일이 생각났을 것이다.
베드로의 마음은 감동되었다. 그 감동은 전 존재의 뿌리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베드로의 경우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경우에 필요하다. 회복의 역사는 뿌리까지 도달되어 판단되지 않으면 온전할 수 없다. 단순히 표면적인 것은 아무 효험이 없다. 싹을 베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깊이 숨겨진 근원, 도덕적 근원까지 내려가 하나님 임재의 빛 가운데서 판단해야한다. 이것이 모든 참된 회복의 비결이다.
좀 더 심사숙고해보자. 우리가 확신하기는 그것은 우리가 매우 엄숙하게 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뿌리는 그대로 두고 너무 쉽게 일상생활의 표면에 나타난 싹을 잘라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슬프게도 그 결과 싹은 재빨리 다시 자라서 우리에게 애통함과 수치스럽게 하고 우리 주님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한다. 정말로 성장하려면 좀 더 심각하게 판단해야한다. 우리는 대단히 천박하고 경솔하다. 우리는 깊이와 진지함, 도덕적 엄숙합이 대단히 부족하다. 우리는 디베랴 해변에서 요나의 아들 시몬 속에 역사했던 그 마음의 변화가 좀 더 필요하다.
"베드로가 슬퍼한 것은 주께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하는 칼이 도덕적 질병의 뿌리까지 도달되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은 필요했고 충분했다. 시몬 베드로는 슬퍼했고 지신을 판단하고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위대한 사실로 돌아간 것으로 해결되었다. "주여,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주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아십니다."그것은 이렇게 말한것과 같다. '주여, 주의 전지하신 눈은 가련하고 실수한 자의 마음에 있는 주께 대한 사랑의 단 하나의 불꽃도 알아차리십니다."
진실로 이것이 참된 역사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철저히 회복된 영혼을 본다. 양심과 마음이 회복된 것이다. "무엇이 남았는지?" 묻는다면, 어떤 일꾼이 그의 일로 회복되었다는 것이 답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타락하면, 그는 결코 그의 위치나 일에 회복될 수 없다고 말한다. 확실히 통치(authority)하에서는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둔다. 그러나 은혜는 다르다. 통치는 아담을 에덴에서 내쫓았고 다시는 거기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은혜는 승리하는 여인의 후손을 선언했다. 통치는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나, 은혜는 그를 비스가산 꼭대기에 서게 했다. 통치는 다윗의 집에 영원한 칼을 보냈으나, 은혜는 밧세바의 아들을 가장 지혜롭고 부요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이 차이를 놓치면 안 된다. 은혜와 통치를 혼동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무거운 주제를 다룰 수 없다. 우리는 앞서 기록한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룬바 있다. 그러나 독자는 이것을 이해하고 마음에 항상 두기를 바란다.
시몬 베드로는 처음 부름 받은 일로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좀 더 높은 데로 회복되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는 새로운 사명을 주었다. 그는 주님을 맹세하며 부인했던 사람이었다. 이것은 "사람을 낚는 것 이상이 아니겠는가?"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라." 섬김의 방법에서 양을 치고 어린 양을 먹이며 형제를 굳게 하는 것보다 더 고상한 것이 있는가? 이 세상에서 그분의 양과, 그분의 어린 양, 그분의 형제들보다 더 가깝고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분의 가장 소중한 깊고 온유한 사랑의 대상을 그에게 돌보도록 위탁함으로 주님은 베드로를 신뢰하고 있음을 감동적으로 증거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맺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말씀은 얼마나 엄숙한가! 주님의 그 깊이와 능력과 중요성을 알 수 있겠는가? 철없고 급하고 서둘고 자랑하고 자신에 찬 시몬과 늙어서 절제되고 원숙하고 겸손하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베드로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과 어둡고 좁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영광의 고향을 향하여, 버림 받은 주를 따르는 사람은 얼마나 차이가 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