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신랑의 친구 침례 요한의 생애 묵상 (14)
[인물연구]
신랑의 친구
침례 요한의 생애 묵상(14)
- R. H. 샤익스
전파자의 청중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마 3:5,6).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막 1:5).
"요한이 침레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7).
이 강가의 전파자는 수많은 군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방에서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유대 광야의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 다음 이 전파자에 대한 소식이 예루살렘까지 퍼져나갔습니다. 그러자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또한 요단 골짜기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이 새로운 전파자를 보기 위해 떼를 지어 몰려왔습니다. 아주 먼 북쪽의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도 사람들이 왔습니다. 대규모로 혹은 소규모로, 부자들과 빈자들이, 도시의 시민들과 시골의 농부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상인들과 무역업자들이 상점의 문을 닫았고, 노동자들이 휴가를 냈고, 농부들이 밭을 떠났고, 목자들이 양무리를 놔두고 왔습니다. 아마도 학교 문도 닫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사들과 학생들도 서둘러 요단강으로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여든 군중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에 우리는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왜 모든 사람들이 이토록 흥분했을까? 무엇이 이 모든 이들로 하여금 모여들게 했을까"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선지자가 출현한 것이 수백 년만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기도 합니다. 여하튼 많은 사람들이 그 골짜기를 넘어 울려 퍼지는 이 전파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는 중에 우리는 거기에 비범한 능력이 담겨 있음을 감지합니다. 그의 강렬한 얼굴, 열정적인 호소, 진실된 말은 그가 정치가나 혁명가가 아님을 알게 합니다. 요한은 그보다 더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비결이 무엇인지를 일러줍니다. 이는 그가 성령님으로 충만한 까닭이었습니다(눅 1:15). 또한 그가 하나님에 의해 친히 보내심을 받은 까닭이었습니다(요 1:6).
이렇게 해서 성령님의 능력이 군중을 끌어당겼습니다. 즉 커다란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수많은 무리는 자신들의 삶속에서 엄청난 필요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어떤 이들은 오직 이방인의 통치로부터의 자유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얼마 후면 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회개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군중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그들이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전파자의 말은 옳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관통을 당하고 그들의 머리는 슬픔 가운데 숙여질 것입니다. 눈물이 흘러 내릴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자백이 드려질 것입니다. 어떤 이들의 마음에서는 회개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와서 듣고 죄를 자백한 다음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강가의 그 전파자에게 가서 들으라고 말합니다. 그 후 이 이야기를 들은 이들도 요단강 기슭의 경사지를 가득메운 대열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면서 회개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 지역 전체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가득해집니다.
그러나 이 무리 중에서 어떤 이들은 극히 종교적인 자들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며 당시의 이 두 종교적인 분파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처음으로 언급된 때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대략 150년 전 쯤입니다. 이 이름은 '분리되었다'라는 뜻을 지니며 이들은 모세 율법을 아주 세세히 준수하기 위해 엄청난 주의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뿐 아니라 그들은 랍비들의 구두의 가르침까지 지켰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공허한 종교의 공허한 신앙고백자들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참된 믿음을 갖지 못했고 영적인 생명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외적인 종교 형태를 가졌을 뿐 진정한 능력을 알지 못했습니다.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5). 그들은 교만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분파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솔로몬왕 밑에 있었던 제사장 사독의 후손들이었던 듯합니다(왕상 2:35).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상류층의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율법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장로들의 전통은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일부 가르침들을 부인했습니다. 가령, 미래의 부활과 심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영 혹은 천사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행 23:8).그리고 영원한 삶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행 4:1-2). 요한 시대에 그들은 "현대주의자"로 불렸을 것입니다. 이 두 분파 역시 군중과 함께 요한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왔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들은 큰 무리로부터 떨어진 두 무리를 형성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대체적인 태도는 이러했습니다. "나는 너희보다 더 거룩하다. 내가 가는 길에서 비켜서라!" 하지만 충격적인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성경의 사실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느낌'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느낌은 믿음과는 어떤 상관도 없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느낌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느낌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조지 뮐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