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생각해봅시다] 시몬 베드로 (10)

행복자 2019. 10. 25. 09:30

[생각해 봅시다]

                                                   시몬 베드로 (10)


                                                                                                                                                      - C.H. 매킨토시


   결말


   우리는 이 글을 마치기 전에 탐구심을 가지고 사도가 그의 여러 가지 사명을 수행하는 방법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그가 "사람을 낚는 것"을 본다. 그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천국을 열어 보여주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어린 양과 양무리를 먹이고 양육한다.

   가련하고 유한한 영혼도 이 고결한 섬김으로 부름 받을 수 있으며, 특히 베드로와 같이 심히 타락한 자도 이러한 고결한 섬김에 부름 받았다. 그가 그의 사역을 성취할 수 있었던 놀랄만한 능력은 그가 실제로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확실히 입증한다. 복음서의 끝 부분에서 베드로의 마음과 양심이 회복되는 것을 보며, 사도행전과 그의 서신서에서 우리는 그가 그의 일에 회복되었음을 본다.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한두 가지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매우 훌륭하다. 여기에서 몇 가지 문장을 인용할 수 있겠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행 3:13-14).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완전한 회복의 뛰어난 증거를 볼 수 있다. 그의 영혼이 충분히 그리고 은혜롭게 회복되지 않았다면, 거룩한 분을 부인했던 군중을 그가 책망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도 그의 주를 부인했었다. 그러나 그는 회개했고 심히 통곡했고, 자신을 깊이 판단했고, 바로 그곳에서 그는 그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 했다. 그는 그의 주를 면대했고, 바로 그곳에서 그는 그들을 만나기를 갈망했다. 그는 하나님의 용서하는 사랑이 아름답고 자유스럽고 충분함을 맛보았다. 그리고 속죄의 거룩한 효력과 그리스도의 중보의 범위를 증명했다. 그는 용서받았고 치유되었고 회복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그들 앞에서 생명력 있고 놀라운  은혜의 기념비를 세웠다. 그는 그것을 그들에게 밝혔고, 그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충분히 상세하게 제시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실수했지만 회복되고 용서받은 베드로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하게 그러한 소중한 말씀을 전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청중 가운데서 누군가 설교자의 과거를 상기시켰다면 그는 무엇이라 대응했을까? 틀림없이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었을 것이지만 그의 모든 죄를 영원히 없이하고 그의 양심에 완전한 평화를 주신 고귀한 보혈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모든 죄와 실패를 극복한 고귀하고 풍성한 은혜에 대해서, 또한 그를 완전하고 충분히 회복케 하신 전능하신 중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주 많았을 것이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 영광스러운 테마는 그가 그의 능력과 그의 위로와 그의 기쁨을 발견하기 위해서 아주 철저히 배웠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견고함을 기이한 방법으로 증거했다. 그것은 그에게는 단순히 공허한 이론이나 교리나 의견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절실한 사실이었다. 그의 전 생명과 구원이 그 안에 연합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매우 가까이 접했다. 베드로는 수많은 장벽과 인간의 결함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보여주신 그 무한한 온유함과 동정심 그리고 확고한 헌신을 보았다. 여기에서 그는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힘입어 온 이스라엘에게 그의 피의 효력과 그의 마음의 깊고 무한한 사랑을 강력하게 증거할 수 있었다.

   "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 3:16).

   이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가! 비길데 없는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이 얼마나 기운을 돋우는가! 그것은 항상 온전히 기쁜 일이지만 모든 영역에서 예수의 이름을 축출하려고 끈질기고 단호하게 애쓰는 우리의 운명이 걸린 불신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당신의 주변에서는 예수의 이름을 제거하려고 과학의 영역이나 종교, 자선, 혹은 도덕적 개혁의 영역에서도 의도적으로 동일한 노력을 끈질기게 수행하는 것을 볼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학자들, 교수들, 대학의 강의도 "자연의 힘"에 대해서  강의하고  글을 쓰는데, 특히 자연의 전 분야로부터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축출하려고 과학적 사실을 그러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찬양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 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6-17). 다시 아들에 관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3).

   이 구절의 말씀은 우리를 사물의 신성한 근원까지 인도하신다. 성경은 "자연 힘"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분의 손의 능력과 그분의 덕을 말씀하신다. 불신자들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를 빼앗고 대신 "자연의 힘"을 주려한다. 우리는 당연히 사랑하는  주님 편에 선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이 그 광대하고 놀라운 영역에서 창조와 확고하게 결되어 있음을 기쁨으로 본다. 우리는 무신론의 교수들이 작성한 모든 훌륭한 이론보다 영원한 성령의 기록을 더 신뢰한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 모든 종교와 선행의 분야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기쁨으로 본다. 우리는 모든 시스템과, 모든 클럽, 모든 질서, 모든 사교로부터 오는 계속 증가하는 공포로 위축되며, 그것은 감히 도덕적 개혁과 종교 조직에서 예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종교와 자선, 도덕적 개혁은 단지 지옥의 종교, 지옥 자선, 지옥의 개혁일 뿐이라고 엄숙하게 선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이름을 알파와 오메가가 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강하고 너무 극단적이고 속 좁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깊이 확신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모든 무신론과 미신적인 이론에 대하여 담대하게 이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는 사도의 설교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것은 저들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불타오르듯 선명한 감정을 일깨웠다.

   설교자는 또한 듣는 자들의 양심에 그들의 무서운 죄를 생각나게 해서 놀라운 능력과 아름다운 말씀으로 치유하고 위로하는 복음의 향기를 계속해서 적용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이 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 그것은 그의 괴로워하는 형제들에게 한 요셉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나를 여기에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니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은혜가 이와 같으며, 우리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선하심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일으키시고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행 3:9-26).

   이 사랑받는 유명한 사도는 마태복음 16장에서 기록된 대로 그의 고귀한 사명을 실행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천국을 유대인에게 널리 선포했다. 이것이 소위 처음부터 끝까지 탄복할 만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상 더 이어가고 싶지만 제한된 지면으로 여기서 줄이고자 한다. 다만 이방인에게 천국을 소개하고 있는 사도행전 10장을 진지하게 연구할 것을 독자에게 권하는 바이다.

   우리는 독자가 베드로에게 위탁된 천국의 열쇠에 관한 진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인도하는 능력이 우리의 사도에게 있다는 무식한 변론에 시간을 쓰지는 않겠다. 독자는 우리가 그렇게 확신한다면 격렬하게 반대했을 것이다. 그것은 증오할 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하나님의 길인 그리스도를 완고하게 거절하는 것이며,우리 같이 불쌍하고 죄인 된 유한한 영혼을 기초로 하여 무모하게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베드로 자신이 지상에 있는 교회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고귀한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설명으로 충분하다. 모든 지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천국 문을 열도록 위탁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 그 교회의 열쇠나 하늘(Heaven)의 열쇠(keys)들을 맡기신 것이 아니라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의 열쇠들"을 맡기신 것이다. 우리는 그가 사도행전 3장과 10장에서 그 열쇠들을 사용한 것을 본다.

   그는 전자를 후자만큼 이해할 정도로 민감하지 못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항상 편견은 비극적으로 방해가 되었다. 그는 마음을 넓혀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유대인 체제의 영향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유대인들을 왕국에 받아들이는 것과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다른 일로 보였다. 우리의 사도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더 많이 배운뒤에야 "차별이 없다"는 교리를 그의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고넬료에게 말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지나간 세대에는 그러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변했다. 중간에 막힌 담이 무너졌고 방해물이 제거되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그릇 속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 을 보았다. 이어서 하늘로부터 그에게 잡아먹으라는 명령의 소리가 있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부름 받고 가서 시몬 피장의 집에서 배운 놀라운 교훈이었다. 그는 거기에서 처음으로 이방인에게로 갔고,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아무도 속되다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침 받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사도의 영혼에 유익하고 건전한 것이었다. 그의 마음을 넓혀서 하나님의 고귀한 생각을 받아들인 것은 잘한 일이다. 길을 잃은 세상에 하나님으로부터 흐르는 장엄한 은혜의 물결 앞에서 옛 장애물은 사라졌다는 것을 그는 이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굽과 습성을 살펴서 "깨끗함과 불결함"을 결정하는 것(레11장)은 더 이상 안 된다는 것과, 유대인을 정결케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은 동일하게 이방인도 정결케 하실 수 있다는 것과 더 나아가서 이방인과 똑같이 유대인도 그 보혈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사도 베드로에게는 그 마음과 총명에 아주 가치 있는 교훈을 주었다. 그리고 독자가 그가 이 교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다는 것을 알고 싶다면, 사도행전 15장으로 돌아가서 그 문제에 대한 사도의 언급을 보라. 교회는 엄숙한 위기를 맞았다. 유대교 교사들은 이방인 회심자들을 율법 아래로 끌고 갔다. 이것은 심히 중요하고 매우 흥미 있는 일이었다. 바로 교회의 기반이 흔들렸다. 그 적이 이방인 신자들을 율법 아래로 끌고 갈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끝장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을 모두 찬양하자.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적의 힘이나 비열함에 넘기지 않으셨다 적이 홍수처럼 밀려 왔을 때 주의 영이 그를 대적할 표준을 세우셨다. 위대한 모임이 개최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구석에서 열린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개최되었다. 그곳은 당시 종교적 영향의 중심지였고 근원지였다. 바로 그곳에서 악도 또한 퍼져나갔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대한 문제가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안디옥에서 결정되지 않고,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의 일치하는 목소리로 예루살렘에서 결정하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고, 성령 하나님께서 통제하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셨다. 이 위대한 모임에서 우리의 사도는 우리의 영적 생명의 가장 심오한 근원을 감동시키는 방식으로 설교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아! 얼마나 빨리 비참한 논쟁이 시작되었는가.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이것은 도덕적으로  위대하다, 그는, "저희도 우리와 동일하게 구원받는다" 라고 말한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구원받는다" 라고 말한 것이다. 동일한 기초와 본을 따라서,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유대인들이 높은 경륜적 신분에서 내려와, 가련한 이방인과 똑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다.

   할례 받은 사도의 그 말씀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모임에 참석한 바울의 마음을 얼마나 유쾌케 하고 기쁘게 했겠는가! 바울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의 체면을 봐주거나, 사람의 지지나 권위를 얻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는 그의 복음과 그 소명을 베드로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주님으로부터 받았다. 또한 지상에 계실 때의 메시야로서의 그분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사 영광 받으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받았다. 여전히 우리는 그의 사랑받는 동역자의 증거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에게 깊이 주의를 끌고 정중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때 회의에서 있었던 놀라운 증거와는 아주 사소한 정도로 불일치 하는 점이 그의 동역자의 후반 사역에서 있었을 것이다. 아!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의 행동은 예루살렘에서 그의 말과는 매우 다르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라.

   그러나 가장 선한 사람이라도 인간은 그 자신에게 맡겨지면 그렇게 된다. 인간은 실수하게 되면 더 높아질수록 그만큼 더 해를 끼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뛰어난 두 사람 사이에 안디옥에서 있었던 슬프고 고통스런 장면에 계속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은 하늘에서 사랑하는 주님앞에 있으며, 거기서 과거의 실패와 죄는 다만 모든 죄에서 정결케 하시는 보혈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를 통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통치하시는 은혜의 가치를 높일 뿐이다.

   성령께서는 안디옥에서 우리의 사도가 실패한 사실과 더욱이 복된 이방의 사도가 그를 면책해야했던 것을 솔직하고 성실하게 기록하는 것을 적당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더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다. 우리는 그 일을 통해서 유익을 얻기를 원한다. 이는 거기에는 깊은 교훈과 엄숙한 경고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그의 모든 것을 경험한 후에 즉 그의 타락과 회복, 오랜 기간 동안의 섬김의 삶의 과정, 그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가까운 교제, 그가 받은 모든 교훈, 그의 모든 은사와 지식, 그의 모든 능력 있는 전도와 가르침, 이 모든 것을 경험한 이와 같은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사람의 평판을 얻기 위해서 위선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면,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단순하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 하나님의 어린양,

   여전히 나를

   주의 찔리신 못 자국

   가까이로 이끄소서.


   그곳에서만 내 영혼이

   안전함과 평안 중에

   거할 수 있나이다.

   원수와 유혹이 나를 둘러싸고,

   탐심과 두려움이 내 안에 있어도,

   내 영혼을 찾으시고 구하시는

   주의 은혜만이

   내 영혼을 정결하게

   지킬 수 있나이다.


   주여, 우리의 영혼을 축복하사 시몬 베드로의 생애를 묵상하게 하소서! 그의 생애와 그 교훈을 성령께서 사용하사 우리 영혼의 철저한 연약과, 무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