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신자 양육] 그리스도인 생활의 이정표들(2)
[초신자 양육]
그리스도인 생활의
이정표들
- D. 힘튼
2. 침례
이제 우리는 두 번째의 이정표를 만납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두 번째 이정표가 되게 하셨습니다. 구원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영적인 경험입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변화입니다. 한편 침례는 주로 실제적인 경험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비밀스럽게 발생한 일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이정표를 통과했나요? 구원받은 다음에는 얼마 후 침례를 받는 것이 우리 주님의 명확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고 하면서 아직 이 지점을 통과하지 않았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이 명령을 모든 이들이 따를 수 있음은 감사한 일입니다. 형제이든 자매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은사 및 교육 수준이 어떠하든 이런 것들과 상관없이 우리는 침례에 순종합니다. 더욱이 이 예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보이신 모본을 따르는 특권까지 누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구원이라는 첫 번째 이정표를 통과한 모든 이들은 반드시 이 두 번째 이정표에 이르게 됩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이 그것을 확실히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사도 시대에는 이 명령을 잘 따랐습니다. 오순절 날 이후 구원이 이루어진 모든 경우마다 침례가 뒤따라 행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침례가 복음 전파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침례" 라는 말은 '담그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담금(물속에 잠김) 이후 다시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른 의미로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을 뿌리는 것은 성경의 의미와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실상 그것은 침례가 말해주는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이 단어를 천 염색과 관련하여 사용했습니다. 그 천은 새로운 색깔의 염료에 완전히 잠겨야 했습니다. 그래야 염색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침례 역시 언제나 물속에서 행해졌습니다. 요한복음 3장 23절을 보십시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
침례는 유대인 신자들만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와 에디오피아 내시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지상명령을 내리실 때 "모든 족속"을 포함시키셨고 이들은 그에 따라 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침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절대로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침례 받은 이들 중 아무도 자신들이 행하는 일의 의미를 다 알았던 이는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침례를 명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핑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성경에서 그것을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혹시 당신은 유아세례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나요? 유아세례는 이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침례는 구원에 뒤따르는 것이며 당사자가 그것을 원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침례는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 발생한 일을 공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데 어떻게 구원전에 침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물속에 잠김으로써 우리는 구주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에 대한 우리의 동일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옴으로써 주님의 부활 생명에 대한 동일시를 나타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합니다" (롬 6:4).
침례는 구원의 일부가 아닙니다. 또한 침례는 신자들 무리의 일원이 되는 허가증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슬픈 이야기이지만, 구원은 받았는데 침례는 받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더욱 슬픈 것은 침례는 받았는데 구원은 받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침례는 신자들 무리에 더해지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 4-42절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일을 행하고 난 다음 사도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침례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요단강을 건넌 사건에서 설명됩니다(수 3-4장). 그 백성 앞에는 언약궤가 위치했습니다. 이제 그것을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그 백성은 마른 땅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강바닥에 열두 돌을 세웠습니다. 이는 언약궤가 위치한 곳과 그 백성을 동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후에 또 다른 열두 돌이 길갈에 세워졌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 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수 4:20). 길갈은 "애굽의 수치가 글러갔다" 라는 뜻을 지닙니다. 옛 생활이 끝났고 새로운 연합과 함께 새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구주의 죽으심을 인해 신자들은 심판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침례를 받을 때 우리는 자신이 마땅히 심판받아야 했지만 그분이 우리를 대신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이후의 삶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이 사는 모든 날 동안 요단강의 이 돌들을 기억하고자 했듯이 침례는 우리에게 그러한 지속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와 자신을 공적으로 동일시했던 그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침례를 우리 생애의 중대한 이정표로 여겨야 할까요?
첫 번째로, 침례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고백과 충성이 참된지에 대한 최초의 시험입니다. 만약 우리가 침례로 그분께 복종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적인 생명을 지녔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와 반대로, 이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도 침례로 그분께 복종하기를 거절한다면 그는 참으로 주님께 속한 자인지를 의심받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분을 주님으로 모셔 들였다면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뜻을 그분의 명령에 굴복시키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그분을 주님으로 시인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침례는 이것을 공적으로 드러냅니다.
두 번째로, 침례를 거절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성장이 방해를 받고 심지어는 중단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문제에 있어서 주님의 소원을 고의적으로 무시한다면 그렇습니다.
세 번째로, 침례로서 공적인 입장을 취할 때 우리는 "돛대에 자신의 소속 깃발을 답니다." 이는 우리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볼 때 침례는 확실한 경계선이 됩니다. 심지어 구원 받지 못한 자들조차 침례를 받은 이들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으로 명확히 나타냈음을 어느 정도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박해를 받던 시대에 침례 받음은 순교의 신호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적대시하는 어떤 나라들에서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네 번째로, 비록 일회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침례에는 우리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침례와 관련된 가르침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유혹의 때에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다섯 번째로, 만약 이 주제에 대한 주님의 명령을 제쳐놓고자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명령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따라서 침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기꺼이 복종하는지에 대한 시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