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생각해 봅시다] 엘리야의 시대와 생애

행복자 2019. 11. 10. 08:44

[생각해 봅시다]

                                       엘리야시대 생애

                                                                                                                                                    - C. H. 매킨토시

   서문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들의 사역이 출현하는 것은 항상 나라가 기울어간다는 증거였다. 나라의 위대한 법이 그들의 힘으로 지켜지고 모세를 통해 증거된 말씀들이 그 본래의 모습대로 실행되는 한은 외적인 어떤 것도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실패가 시작되었을 때 즉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선포된 법과 제도가 그들의 본래의 정신과 능력 안에서 실행되지 못하면 부가적인 조치가 필요해지고 예언자들 속에 있는 성령의 힘으로 어떤 것이 공급되었다.

   솔로몬의 영광과 위대함이 있던 시대에는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의 사역은 필요 없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질서정연했다.  모든 조직의 상태는 건전했다. 모든 기구와 부서는 자기 위치에서 효과적으로 작동되었다. 왕은 왕좌에서 이스라엘을 이롭게 하기 위해 왕권을 행사했다. 성전에서 제사장은 그의 섬김을 질서를 따라 감당했다.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자들은 다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한마디로 모두 다 선지자의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질서정연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상황은 곧 변했다. 곧 강력한 악의 물결이 침투되어 이스라엘의 국가적 종교적 시스템이 황폐화되었다. 불경건한 자들이 점점 다윗의 위에 올라서 그들의 악한 욕망의 제단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권리가 희생되었다. 그들의 죄악은 극도로 고조되었고 마침내 악한 아합이 그의 동반자 이세벨과 함께 솔로몬이 하나님의 재판을 집행하던 왕좌를 차지했다.

   여호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으셨다. 그분은 악의 물결이 더 이상 고조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어서 그분의 전통에서 잘 다듬은 화살을 쏘아 이스라엘의 양심을 찔렀다. 아마 그분은 그들이 회복되어 자신에게 기꺼이 충성하기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 화살이 바로 디셉 사람 엘리야였다. 그는 담대했고 타협을 모르는 증인으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섰다. 그 때는 모든 사람이 전장에서 도주하는 것 같았고 압도하는 물결을 저지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뛰어난 인물의 생애와 사역을 상고하기 전에 선지자 사역의 이중적인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선지자들의 사역을 숙고함에 있어서 각 선지자는 그에게 맡겨진 분명한 사역이 있었고 또한 수행해야할 이중적인 목적이 있었다. 주께서는 당시 악한 세대의 양심을 다루었고 한편으로는 그의 충성된 사람이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게 했다. 그  선지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빛과 진리를 그 양심과 마음에 두게 했다. 그것은 내면의 숨겨진 악의 방들을 넓게 철저히 개방하는 것이었다. 그는 백성의 비참한 타락과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것을 분명히 외치고 그들의 주변에 세운 거짓된 종교 조직의 근거를 제거했다.

   그러나 선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만약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비참한 실패의 역사와 옛 영광을 떠난 것으로 마쳤다면, 그것은 진정 비극이었을 것이다. 그는 은혜를 통하여 엄숙하게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할 수 있었다. "오 이스라엘아 너희 자신을 찢으라." 그리고 이어서 위로가 되는 확신의 음성이 발해진다. "그러나 내가 너의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두 가지 요소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것은 선지자의 사역이 이룬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실패와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인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영광의 시작은 이스라엘의 순종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최종적인 회복과 건설은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과 죽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진실로 이것은 고양된 거룩한 인격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영광스런 사명으로서 파괴되고 황폐한 조직의 파편 가운데 서있으라는 사명이며, 그 때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때는 하나님께서 그의 구속의 은혜의 영원한 결과에서 자신을 나타낼 복된 시간이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서 그의 구속받은 백성들의 기쁨을 말한다.


   1. 선지자가 최초로 전한 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의 통치 시대는 이스라엘 집에는 어둡고 음울한 시기였다. 불법이 최고조에 달했고 여로보암의 죄악은 아합의 범죄의 목록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돈의 할례 받지 않은 왕의 딸, 악한 이세벨이 그의 마음과 왕권의 파트너였다. 이러한 상황만으로 이스라엘을 옥죄는데 충분했고, 이전의 예배는 파괴되었다. 한마디로 성령께서 이렇게 요약하셨다. "아합은 그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왕상 16:33). 그에 대한 묘사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여로보암 이후 모든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그러나 아합은 그들 모두보다 악행의 정도가 더욱 심했다.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가 예언적 증언을 시작했을 무렵 하나님의 백성들의 왕의 자리에 있었다.

   아합의 통치 상황을 살펴볼 때 그 정신에 뭔가 특별히 비극적인 데가 있다. 모든 빛은 사라져갔고 모든 증언의 소리는 막혔다. 수많은 발광체가 빛나던 하늘은 어두운 구름에 덮였다. 죽음 자체가 온통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고, 악마의 손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 같았다. 그때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의 압제받고 길 잃은 가련한 백성에게 빛나는 능력의 선지자를 일으키셨다. 바로 그러한 때에 하나님을 위한 참된 증인은 강력하게 능력을 나타냈고 광범위한 최고의 영향력을 적기에 발휘했다. 오랜 가뭄 후에 비가 왔고 그것은 회복하는 힘이 되었다. 이때 이스라엘 상태는 어떤 대담한 능력자가 나타나서 하늘로부터 오는 힘으로 악의 물결에 대항하는 것이 필요한 때였다.

   그러나 그가 공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다른 종들이 그러했듯이 남모르게 연단을 받은 다음에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유익이 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종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그 특별한 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가 공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행하기 전에 비밀리에 하나님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더구나 가장 심오하고 가치 있는 훈련을 받은 종들이 그 공적인 섬김과 증거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영구적인 열매를 거두었다. 그러한 사람은 그의 운명에 큰 두려움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공적으로 맡게 된 직무를 감당하기에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남모르게 받은 영적 훈련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가 부족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기초가 든든하지 않으면 그 구조물은 흔들리고 무너질 것이다. 나무는 그 뿌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지를 치면 폭풍이 불 때 균형을 잃고 쓰러질 것이다. 공적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는 하나님과 홀로 있어야 한다. 그의 영은 은밀하게 훈련받아야 한다. 그는 경험으로 깊은 물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론가는 될지 몰라도 증인은 못될 것이다. 먼저 그의 귀를 열어 음성을 듣고 배우고 난 후에 그는 합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외관상 찬란했던 많은 빛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들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으며 왜 그렇게 사라져갔는가 그들은 인간 불쏘시개의 점화에 불과했는가? 그들에게는 깊이도 없었고 인내력도, 진실성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잠시 빛나다가 재빨리 사라져버렸고, 주변에 어두움을 남기고 아무 열매도 없었다. 그리하여 적어도 우울한 기억만 남겼다.

   하나님의 참된 모든 사역자는 사도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 1:3-4)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가 처음 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야고보서에서 그의 초기의 생애를 은혜롭게 우리에게 제공하시며, 그것은 우리의 섬김의 영역에 많은 교훈이 될 것이다. 그 경건한 사가(史家)는 우리의 예언자를 매우 퉁명한 인물로 소개한다. 그는 그의 일의 영역을 엄숙하고 당당한 고지와 함께 소개한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선지자의 이전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주께서 그가 말할 것을 어떻게 배우게 되었는지 사가는 말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하지만 우리가 알아야할 것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사가를 통해서 한 말씀도 안 하신다. 성령께서는 단순히 그를 사용하여 우리가 거룩한 훈련에 주목하도록 하시며, 그것은 하나님과 은밀한 중에 얻어진 능력이었다. 성령께서는 엘리야가 공적으로 행한 것만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보여주시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는 엘리야가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한 후에 사람들 앞에 나아가 능력 있는 사역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약 5:17).

   성령께서 야고보를 통해서 이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능력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자극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완벽하며 초자연적으로 완전하여 모자란 것이 없다. 여기에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엘리야의 은밀한 기도와 애쓰는 순간을 보여주고, 길르앗 산에서 내려오는 그를 보여주는데 거기에서 그는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통탄스런 상태에 대해서 애통해 하였으며, 또한 그가 행해야할 임무에 마음을 바쳤을 것이다.

   우리 선지자의 생애에서 이러한 환경은 우리에게 정말로 유익한 교훈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보통의 황폐와 영적 결핍 이상의 시대에 살고 있다. 교회의 상태는 에스겔의 마른 뼈의 골짜기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는 단순히 지나간 세대의 특징인 악과 대처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갈 때까지 간 부패와 대결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양한 이방세계의 갖가지 악들이 기독교의 입술만의 고백의 가면과 연결되어 있고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상태를 살펴보면 그 진리의 지식과 고상한 신앙고백은 당연히 좀 더 건전하고 힘 있는 기독교의 실행을 격려하기를 기대하는데, 불행히도 대부분 냉랭하고 영향력 없는 이론에 불과하고, 그 무의미한 고백은 속사람의 생각이나 정서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피상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는 아무 유익이나 능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이 이미 교제하고 있는 사람들에는 아무 것도 제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모든 진리의 설교는 듣지만 생명이 없음을 발견한다.

   그러한 상태에서 신실한 자의 자원이 무엇인가? 그는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기도뿐, 오래 참고 끊임없이 드리는 기도,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 그분의 임재 하에서 깊고 진실한 영혼의 훈련, 거기에서만 참된 우리 자신과 사물의 가치를 바르게 평가하고 되고, 나아가서 형제 사이에서 혹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행동할 영적 힘을 얻을 수 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어두운 배도와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소외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자녀들 중에  충성된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악의 물결이 주변에서 일어나서 진리의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바알의 제단이 여호와의 제단과 교체되었고, 바알 제사장들의 외침이 레위인들의 노래를 압도했다. 한 마디로 그의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거대한 황폐의 물결이었다. 그는 그것을 느꼈고 오열했다. 그는 더 나아가서 "진정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여기에 힘의 원천이 있었다. 그것은 비탄에 빠진 선지자에게 참된 좌절하지 않는 힘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면전으로 피했다. 그는 거기에서 그의 마음을 바쳐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슬픔과 황폐함을 보고 울었다. 그는 진실로 그 주변에 슬픈 사태에 대하여 집중했고 기도했다. 그는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냉정하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그리고 불굴의 기도를 드렸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복된 본보기이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열정적인 기도가 오늘날만큼 절실한 때는 없다. 악마는 영혼들을 좌절시키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활동을 방해하려고 악의에 차서 전력을 기울인다. 어떤 경우에는 공공연히 개입하고 다른 경우에는 내적인 시련을, 그 외에 개인적인 슬픔과 갈등을 사용한다. 한마디로 "수많은 대적들이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만 그들에 대처해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단순히 개인으로서 악을 벗어나 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부름 받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는 백성들을 그들 조상들의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개인적으로 더욱 더 하나님을 추구할 필요가 있었고, 하나님 임재 속에서 영적인 힘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홀로 도피할 수만은 없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는 도구가 되었다. 엘리야는 이 모든 것을 실감했고 따라서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으며 그는 실패하지 않았고 목표를 달성했다. 즉 기도한 대로 "비가 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올 때에 결코 거절하지 않고 응답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선지자가 하나님께 단순히 나아간 것을 안다. 선지자에게는 그 땅이 메마른 불모의 광야로 바뀌거나 그의 형제들이 기아에 빠졌고 그 결과 두려움으로 쇠약해지는 것을 보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자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잘못된 원칙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선지자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가 사랑하는 선지자의 영혼 속에서 성령으로 나왔기 때문에 응답하셨다.

   진실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복된 결과를 얻게 되며, 또한 그 자체로 역사하여 큰 위로와 즐거움을 얻는다. 시련과 시험을 겪는 신자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의 영혼이 흘러 나와서 주님께 올라간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분만이 그를 현재 압제로부터 벗어나서  그의 가장 복된 임재의 고요함과 빛으로 끌어올리실 수 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는 법을 알기를 기도한다. 그 때 우리는 오늘날의 어려움이 하나님의 자비의 보좌로 더 가까이 이르도록 하시고 각자의 영역으로 유익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이 우리 아버지를 은밀히 의지함으로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될 것이다. "주를 의지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요!" 고귀한 약속이 아닌가! 우리가 그 충분한 증인이 되기를 기도한다.

   이렇게 디셉 사람 엘리야는 섬김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하나님의 성소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하고 나와서 그의 동족들을 다루고 영향을 준다. 그의 말에는 능력이 있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내 앞에서 사시거니와"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 뛰어난 하나님의 종의 영혼이 쉬고 있었던 근거지를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제시한다. 또한 그의 섬김의 길에서 그를 지탱하는 원칙을 제시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서서 어느 정도의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합은 엘리야의 영혼의 은밀한 연단을 거의 알지 못했고, 엘리야가 아합의 양심에 말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 앞에 서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엘리야가 자신을 공적(公的)으로 나타내기 전에 먼저 은밀히 무릎을 꿇은 적이 있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몰랐으나 엘리야는 알고 있었고, 그렇게 해서 그는 담대하게 바로 악의 괴수와 맞설 수 있었다. 그는 아합 왕 자신에게 말할 수 있었고 그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할 수 있었다.

   이로써 선지자는 부르심 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의 본보기로 여겨진다. 주님의 종과 사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모두는 사람과 환경을 넘어서 마음의 거룩한 향상을 알기 위하여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인간의 생각과 감정 이하로 내려갈 수 없다. 우리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전혀 상관없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수용하든지 거절하든지, 우리에 대한 평탄이 좋든 나쁘든 여전히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선지자가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을 살펴보자."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나 이슬이 없을 것이다." 그는 그가 주님 앞에 서있다는 것과 주님의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철저히 주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내 말에 따라"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 주님의 메신저의 특권이었었다. 이것이 은밀한 기도의 놀라운 결과였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약 5:17) 이 연약한 시대에 하나님을 위하여 행동하기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은 힘 있는 동기가 되기를 기도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필요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일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필요가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면, 우리는 기도의 영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주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자리를 합당한 곳에 두고 우리를 받는 자로서의 적당한 자리에  두는 영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기도의 영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기도의 단순한 형식으로 자신을 속이는가! 우리의 기도의 말 속에는 진실성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기도의 산을 만든다. 말 뿐인 기도를 그들의 영혼들과 기도의 하나님 사이에 놓는다. 이것은 커다란 함정이다. 우리가 항상 조심할 것은 기도가 단순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미신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