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글] 도시락을 든 아이를 향한 독백
[독자의 글]
도시락을 든
아이를 향한 독백
- 차 광 선
1.
영창을 통해 아침 햇빛이 들어와 엄마의 손 위로 내려앉습니다. 흰 곡식 가루가 조금씩 묻어 있는 두 손은 단정하면서도 익숙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얀 면박에 노르스름하게 잘 구워진 떡이 가지런히 포개어져 쌓입니다.
아이의 눈은 시종 엄마의 손끝에서 연출되는 장면에 유심히, 흥미롭게, 그리고 진지하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엄마의 손은 불순종을 했을 때는 매서운 회초리와 같고, 슬프고 아파할 때는 따뜻하고 자애로운 품과 같으며, 밤낮으로는 기도하는 손이 됩니다. 엄마의 손을 바라보며 아이는 어떻게 그렇게 여러 모양으로 변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양미간이 약간 치켜 올라가서 조금은 머쓱한 표정인, 그러나 청정한 사슴의 눈처럼 맑은 아이의 표정을 얼핏얼핏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는 감람나무 이파리들에 미끄러지는 고운 햇살들처럼 행복한 미소가 빛납니다.
"떡을 다섯 덩이 쌌으니까... ."
잘 익힌 물고기 두 마리를 다른 천에 가지런히 싼 후, 떡과 함께 다시 반듯하게 여미면서 엄마는 말씀합니다. 중단되긴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질 말씀이란 가지고 오지 못한 친구들과 나누어 먹으라는 것, 끼니를 놓치지 말라는 뜻인 줄을 잘 아는 아이는 "예" 하고 변성기의 소년처럼 약간의 저음으로 대답하며 엇박자로 고개를 끄덕여 보입니다. 그게 아이의 대답하는 습관이었는데, 엄마는 그 때마다 웃음이 절로 흘러나와 그걸 참느라 가끔은 즐거운 고역을 합니다.
도시락을 받아든 아이는 가슴에 밀착하여 안고 내쳐 밖으로 달려 나갑니다. 멀리 아이들의 소리가 문가에까지 와서 기웃거리다가 아이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 함께 멀어집니다. 그 바람에 아침 햇빛에서야 비로소 그 존재가 확인되는 미세한 먼지들이 화들짝 놀란 물고기 떼처럼 소용돌이로 유영하며 흩어집니다. 엄마는 아이가 나간 문 밖을 바라다보며, 장엄한 출애굽의 하이라이트인 유월절 이야기 그리고 홍해를 통과한 이야기에 이어서 약속의 땅을 향해 행진하는 이스라엘 선조들의 스토리를 어떻게 구성하여 들려줄까 티끌들처럼 부유하고 있는 낱말들을 퍼즐 조각들처럼 맞추어갑니다.
2.
아이들이 쾌활한 웃음소리를 흩어 날리며, 떠들며 일정한 방향 없이 이리 저리 달리다가 언덕길을 돌아 지천이 흐르는 곳으로 몰려갑니다. 처음에 아이도 그들과 어우러졌다가 길게 꼬리를 이어 빈들로 나가는 어른들의 행렬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자기들 쪽으로 오라는 친구들의 외침에 멈칫했다가, 아이는 이내 방향을 바꾸어 어디론가 일정한 방향으로 이어지는 어른들의 행렬에 끼어들었습니다. 그것은 강한 호기심과 미지의 은근한 기대감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보다 어떤 이끄는 힘에 의해 이끌려서 방향이 바뀐 것이 더 맞는 말이 될 것입니다.
아이의 마음은 어느 덧 저 나지막한 언덕 위에 계신 분께 마음이 쏠려 있습니다. 어서 가까이 가야만 한다는 마음이 어린 가슴에 가득해집니다. 무리지어 걸어가는 어른들 사이를 지나칠 때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들려옵니다.
"저 분이 나사렛 예수님이래요!"
어떤 사람은 그가 옛날의 그 엘리야가 돌아온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선지자 중 하나가 다시 살아났는가보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바로 그 병 고침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라 하며 그 신비한 능력에 놀라워 하는 기색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새 빈들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둔덕 위에 예수님이 서 계셨고, 제자들이 가까이 둘러 있었습니다. 아이는 제자들이 둘러서 있는 곳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서 부근 평평한 돌에 걸터앉았습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소리가 차츰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말씀은 고요한 중에 들리는 물결 소리 같다가도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천둥소리 같기도 하였습니다. 표정은 백합화처럼 환하고,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위엄에 가득 찬 모습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3.
해가 기울어 가고, 말씀이 끝날 무렵 사람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였습니다. 그제야 아이는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제 그 떡을 먹으려는 참에 그분의 음성이 가까이 들려왔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의 말씀에 빈손뿐인 제자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아이는 또렷이 보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떡을 다섯 덩이 쌌다고 하신 엄마의 음성이 정말 희한하게도 또렷이 기억되어 돌아옵니다. 엄마는 무엇을 예견이라도 한 듯 그렇게 말씀하신 걸까요? 그런 생각이 들자 아이는 품고 있었던 도시락을 가까이에 있는 제자 중 한 사람에게 건네려 합니다. 도시락을 그의 손등에 가볍게 대자, 그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고 잠시 놀란 눈으로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아이는 그 도시락이 손에서 손으로 옮겨져 예수님의 손에 이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시락을 받아들고 예수님은 아이를 온유한 눈빛으로 바라보십니다.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에 아이는 그분이 마치 도시락을 싸던 엄마의 손놀림까지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잠시,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무리지어 앉도록 하시고, 그분은 떡을 높이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머쓱하고 의아스런 표정으로 주춤주춤 그분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 때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사이 제자들의 품에는 떡과 물고기가 한 아름씩 안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속하게 그것을 날라다가 무리지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무리 중에 앉아 있다가 눈치 빠르게 제자들의 일을 돕는 자원자들이 생겨났는데, 그들도 민첩하게 움직이며 떡과 물고기를 분배하는 제자들을 도왔습니다. 광야에 마련된 풍성한 식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빈들에서 이 축복의 음식으로 뜻밖의 잔치를 누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배불리 먹고 남은 떡을 사람들이 다시 거두어 오니, 열두 광주리 가득 남게 되었습니다.
4.
아이는 그 제자가 입에 넣어준 떡 조각을 오물거리면서 생각합니다. 작은 도시락, 빈들의 큰 잔치, 그리고 남은 떡 열두 광주리... .
(아이야! 너희 조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지나서 바로 약속의 땅을 향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단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은 약속의 땅으로부터 광막한 황야로 들어가게 만들었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대신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야. 씨를 뿌릴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 거두어들일 수도 없는 그곳, 곡식 낱알 하나 물 한 방울 얻을 수 없는 그곳에서 그들의 생존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그들은 깨달아야 했던 거야. 그들은 장망의 도성으로 비유될 애굽에서부터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도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었어.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창을 여시고 자비와 긍휼의 양식을 내려주셨고, 바위를 깨뜨려 생명수를 마시게 하셨단다. 사십 년간 변함없이 이루어졌던 은혜로운 대 역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오신 하늘양식의 은혜였던 거야. 그 광야에서 그렇게 이루어졌던 하늘양식의 역사가 이제 예수님께서 네가 가지고온 작은 도시락의 떡과 생선을 통해 재현하신 것이니, 아이야, 놀랍지 않니?
그분은 너 같은 어린 아이가 그에게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단다.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지. 아이야, 너의 도시락을 통하여 빈들에서 풍성한 식탁을 마련해주신 그 예수님이, 그 옛날 모세시대에 하늘 문을 여시고 만나를 내려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어 주시는 거란다.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영원히 주리지 않게 할 생명의 떡이 되심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
밤이 깊도록, 아이는 엄마의 그손을 붙잡고 성경 이야기의 원시림 속으로, 푸르른 벌판으로 나아가겠지요.
5.
오늘도 갈거니?
마지막 떡을 가지런히 포개어 놓고 생선을 함께 싸면서 엄마가 말씀합니다. 아이는 양미간이 약간 치켜져 올라가서 약간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엇박자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런 아이의 표정에 웃음 또한 쏟아집니다.
"떡을 조금 더 싸았으니까... ."
아이는 도시락을 받아 가슴에 안고 달려 나갑니다. 옷자락이 펄럭이며 문밖으로 사라지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갑니다.
문득, 라마에서 울려 퍼졌던 한나의 슬픔의 노래가 감사의 노래, 축복의 노래가 된 것을 생각합니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 한나의 기도가 가슴으로 울려오는 듯합니다.
그래, 더 가까이 가렴. 아주 가까이 가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렴. 네 인생의 얼마나 큰 축복이 될 것인지!
아이야,
요셉처럼 신실하여라.
모세처럼 충성스럽고
다윗처럼 담대하여라.
다니엘처럼 지혜롭고 총명하여라.
창조의 신비이며
생명의 신비인
아이야,
빛으로 가까이 더 나아가라.
진리의 길을 따라 나아가라.
환란의 폭풍에도 넘어지지 않을 백향목처럼
역경의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처럼
믿음의 사람으로 강건하여라.
빛이 되어라.
아이야,
너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나의 생애
내 삶의 행복이었어.
내 생의 기쁨이었어.
아름답고 영광스런
네 미래를 위하여
두 손을 모은다.
보드라운 깃털을 남겨두고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언젠가 아이는 자라서 엄마의 품을 떠나게 되겠지요. 하지만 가슴으로 품어 들려준 성경 이야기를 잊지 않고 일생 기억할 겁니다. 빛이 되어 그가 가는 길 내내발걸음을 비춰 주겠지요.
엄마도 서둘러 나설 준비를 합니다. 옛 선지자들이 예언해 왔던 그대로 이 날에 그 놀라운 역사가 성취되고 있는 현장을 놓칠 수 없으니까요. 빈들에서 어린 아이를 위해 준비되는 아름다운 만나의 축복을 기대합니다.
아이는 지금쯤 잰 걸음으로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겁니다. 참 곱고 아름다운 빛이 하나 가득 쏟아지는 길로 나섭니다. 그 길은 아이가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을 빈들,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요 6:1-15; 막 6:30-44; 눅 9:10-17; 막 19:14; 믹10:15; 요 6:35; 삼상 1:10,11,27,28; 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