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인물연구] 신랑의 친구 침례 요한의 생애 묵상(17)

행복자 2019. 12. 7. 09:24

[인물연구]


                                                          신랑친구

                                                                                                                                                                                                                                           침례 요한생애 묵상(17)


                                                                                                                                        - R. H. 샤익스

   도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마 3:10).


   예나 지금이나 도끼는 나무를 베어 내고 목재를 만드는 데에 쓰이는 일반적인 도구입니다. 또한 성경 시대에서는 전투용 도끼도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도끼를 언급하는 전파자 요한의 말을 듣습니다. 그것은 도끼로 나무를 찍어 넘어뜨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심판에 대한 경고를 강화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도끼를 언급하는 구절들 중 절반가량은 집안에서와 농사에서의 사용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의 구절들은 심판과 관련됩니다.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상을 찍을지어다" (출 34:13).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신12:1-3).

   교만한 왕 느부갓네살은 크고 높은 한 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신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단 4:10-14, 22-23). 베어내고 겸손케 하고 낮추는 것, 이것이 도끼가 하는 일입니다.

   요한은 도끼의 목표물이 나무의 뿌리라고 말했습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들은 반드시 그 뿌리가 찍혀야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에 대한 추가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이미 우리는 회개가 악에서 돌아서는 완전한 변화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죄악된 옛 삶을 개선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작은 죄들 몇 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감으로써 삶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시덤불에서 일부의 가시들을 제거하듯이 도둑질과 거짓말 등을 삶에서 쳐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한다고 해서 가시덤불이 아름답고 크고 달콤한 포도를 산출해 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가시덤불의 모든 가시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 무엇을 거두게 되나요? 당연히 가시들입니다! 왜냐하면 가시덤불에서는 포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가시덤불은 본질적으로 가시들이 자라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즉 가시덤불은 가시들을 산출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나쁜 뿌리는 나쁜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마 7:15-20).

   그러므로 이 전파자는 오래 되고 나쁜 죄를 가진 나무는 반드시 뿌리부터 완전히 잘려나가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뿌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성품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온갖 그릇된 행동, 악한 행위와 생각을 유발합니다. 우리는 죄악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악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도끼가 우리의 뿌리에 놓일 때 우리는 회개하면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되면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우리에게소망이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두 차례 우리는 도끼가 손에서 빠져나감에 대한 구절들을 읽습니다. 그 첫 번 구절은 신명기 19장 1-6절입니다.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그로 죽게 함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이럴 경우 죽임을 당한 자의 친척은 이 살인자의 목숨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벌목하는 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제일 가까운 도피성으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요한의 경고가 이와 관련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여 도망하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언급은 열왕기하 6장 1-7절에서 발견됩니다. 어떤 선지자들이 요단강에서 나무를 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의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져 깊이 가라앉았습니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엘리사는 그 도끼가 어디에 빠졌는지를 물었고 그는 그 지점을 가리켜 보였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나뭇가지를 베어 그곳에 던졌고 도끼는 물의 표면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를 보고서 그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도끼를 물에서 건져내어 다시 자신의 수중에 넣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구원에 관한 예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려진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더럽고 진흙투성이인 깊은 데로 빠진 채 일어설 수 없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죄의 물속에 나무(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던지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빛을 선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 뿐 아니라 요한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주인의 손에 들린 도끼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솜씨 좋은 나무꾼과 같았습니다. 그분은 요한을 사용하여 도끼로 잘라내는 것과 같은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도끼에 대하여 네 가지 사항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도끼는 달구어 단련한 훌륭한 강철입니다.  두 번째로, 도끼는 날카로워야만 합니다. 세 번째로, 도끼는 녹이 슬지 말아야 합니다. 네 번째로, 도끼는 주인이 쓸 수 있도록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강철은 불의 열기로 단련된 후에 일정한 조건 하에서 냉각됩니다. 이렇게 하면 무언가를 잘라낼 수 있을 만큼 단단하고 날카로워집니다. 이미 우리는 요한이 광야에서 거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역경은 그에게 좋은 훈련이 되었습니다. 혹독하고 야생적인 생활 환경은 그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게 했습니다. 즉 광야생활의 열기와 냉기는 요한을 연단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믿음과 은혜 속에서 점점 더 강해져 갔습니다. 요한의 전파는 그가 충성스런 참된 강철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확고했고, 헌신되었고, 주님께 바쳐졌습니다.


   두 번째로, 도끼의 날은 날카로워야만 합니다. 요한의 경우에 자기훈련의 맷돌이 이 일을 잘 해주었습니다. 이 맷돌은 자기부인과 단순한 삶과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런 것들이 그의 전파의 날을 날카롭게 해주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은 꿰뚫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 날카로운 날은 효력이 있었고 뿌리를 깊이 잘라냈습니다.


   세 번째로, 도끼의 날은 녹이 슬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19-21절에 보면 녹은 땅에 쌓아진 보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땅에 보물을 쌓아놓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도끼의 날은 녹이 슬지 않았고 항상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네 번째로, 요한은 자신의 주인께 철저히 복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유용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끼는 나무들의 뿌리에 놓였고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이렇게 능력있게 사용하여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0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주님을 섬기다가 그는 정말로 이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열왕기하 6장의 선지자와 같이 그는 주님의 일을 진보케 하려고 분주히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그 선지자의 도끼와 같이 요한이라는 도끼 역시 빌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목숨이란 자신의 주님을 섬기게 해주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에 그는 자신의 목숨을 원래의 소유자인 주님께 되돌려 드렸습니다. 다윗과 함께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대상 29:4).


   그러나 엘리사는 도끼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왕하 6:6).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복스러우신 주님도 그분의 종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요한은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췰 것입니다(단 12:3),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가서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즉 도끼는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명백히, 능력은 도끼를 사용하는 자에게서 비롯됩니다. 앞에서 확인했듯이 요한은 성령님이 충만한 이였습니다. 따라서 그 도끼가 나무들의 뿌리를 잘라낸 것은 바로 그분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교훈들은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들은 우리 신자들에게 지극히 중요한 교훈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의 유일한 근원은 어디에 있나요? 그것은 성령님에게 있습니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6). 요한이 자신의 상을 받으러 가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좋은 도끼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