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봅시다] 엘리야의 시대와 생애 (3)
[생각해 봅시다]
엘리야의 시대와 생애 (3)
- C. H. 매킨토시
2. 숨어 있는 선지자(2)
믿음의 사람은 그릇을 비워야함을 이미 보았다. 그리스도의 학교에서는 신자의 삶의 연속적인 각 장면과 단계는 새로운 형태로의 입문에 불과하다. 거기에서 그는 신선하지만 좀 더 어려운 교훈을 배운다.
질문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엘리야는 그릿 시내에서보다는 사렙다에서 어떤 시련의 환경과 씨름해야 했는가? 그에게 공급하는 통로로서 까마귀를 택하는 것보다 인간의 동정심에 맡겨지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서, 그의 영혼에게는 홀로 고독하게 그릿 시내에 거하는 것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즐겁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것이 확실히 그러했을지 모르지만, 고독은 그 자체의 달콤함이 있으며, 익속해지는 것 그 자체의 시련이 있다. 거기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육신적인 이익이 없다.
선지자는 그릿 시냇가에 자리 잡았을 때는 "나와 나의 아들" 이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거기에는 그의 생존과 즐거움에 방해가 되는 어떠한 이기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은거(隱居)를 벗어나서 인간 사회로 진입하는 순간, 인간의 마음은 적어도 간섭받는 대상이 있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나와 나의 아들"이라는 말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기심의 숨은 근원이며, 그것은 타락한 인간성의 발로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 과부의 마음이 그녀 자신과 그녀의 아들을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은 확실히 당연한 일이었으며, 인간 본성이 원래 그렇다. 순진한 자연인에서 나온 다음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삼상 25:11).
본성(nature)은 항상 먼저 자신의 것을 추구한다. 멸망하는 이 세상 범위내에서는 영혼을 채워서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흘러넘치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외에는 어떤 수단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넓히려고 수고하는 것은 전적으로 헛된 일이다. 이 은혜만이 인간의 마음을 넓혀서 사랑을 모든 가난한 자들에게 나타낼 것이다. 인간적인 자선이 많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풍부한 자원으로 개인적인 결핍의 가능성을 막을 수 있겠지만, 은혜만이 사람의 이기심을 버리게 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사람은 누군가 당신에게 잘할 때 그를 칭찬한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며, 아무것도 그 생각을 잊어버리게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계속 끝까지 그렇게 행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만 이 잘못된 생각을 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의 선지자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왕상 17:13) 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하나님의 원칙을 잘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야는 그의 설교에서 단순히 과부의 자원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실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요구에 대해서 진실하고 준비된 반응의 결과는 그 영혼에게 풍성한 복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과부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일이고, 또한 그것은 과부에게 어렵고 시험이 되는 역할이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지면에 비를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왕상 17:14).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얻는 에너지가 공급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신자마다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그렇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해야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자의 영혼 속에서 위대한 움직이는 원칙을 구성해야한다. 통이 가득 찼었다면 믿음의 실행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통이 비어있고, 가루가 한 줌으로 줄었을 때, 그것을 먼저 나그네에게 주라는 명령은 정말 무리한 요구였다. 그것은 그녀에게는 믿음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주 제자들이 무리를 먹일 때처럼 그의 백성을 다루신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저희를 시험코자 하심이라" (요 6:6). 그는 자주 우리로 적지 않은 시련을 각오하고 전진하도록 말씀하시며, 시련 가운데 앞으로 행할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알뿐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힘도 얻는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출 14:15) 라고 명하실 때 포함된 원칙에 근거한다.
그들이 어디로 가야했는가? 이상한 길, 바다를 통해서 가야했다. 그러나 이 시험의 명령 배후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모세가 말한 바,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출 14:16)는 말씀을 실행할 능력을 주는 은혜이다. 믿음은 부름 받은 사람에게 그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나가게 하는 힘을 준다. 그러나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 사이에 있었던 정말 흥미로운 장면은 순종 이상의 원리를 가르쳐준다. 또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초능력 외에는 아무것도 타락한 사람 속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냉정한 이기심의 존재를 넘어서 인간의 마음을 끌어 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영혼에 비추이는 하나님의 자비의 광채가 세상에 속한 안개를 사라지게 해서, 사람을 더 높고 고상한 원칙을 생각하고 행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 주변에서 작용하는 거대한 영향력 이상의 능력이 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이기심과 자기 보존 이외의 더 높은 동기의 영향 없이 집을 떠났고, 그녀 앞에는 죽음보다 더 분명한 대상은 없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차이가 있는가? 없다. 세상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는 좀 나은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나 최고의 지성들, 학자들, 한마디로 그의 영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가난한 과부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자기 이익과, 자기 보존이라는 욕망의 영향을 받아, 그 앞에 죽음 외에 아무런 가망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사물의 양상을 재빨리 변화시키신다. 과부의 경우처럼 진리는 매우 강력하게 작용한다. 진리는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서 또 다른 것에 마음을 채우고 관심을 일으키고, 그녀의 영혼은 활기 있는 생각으로 채워졌다. 이것은 항상 그러했다. 영혼이 진리와 하나님의 은헤를 접하게 되면, 그것은 즉시 악한 이 세상에서 해방되고, 그 영혼은 수백만을 급속하게 떠나게 하는 세파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하늘의 동기로 활동하고 하늘의 목적으로 살아간다.
은혜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행하고 살라고 가르친다. 우리 영혼이 구속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맛볼수록, 다른 사람을 섬기고자하는 열망이 더 진지해진다. 애통해할 만큼 냉정하고 무관심한 이 세대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으로 더 깊이 지속적으로 강권받기를 원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며 값으로 산 바 되었음을 기억하며 행동하고 살아가기를 원한다.
사렙다 과부는 이 진리를 배웠다. 주께서는 가루와 기름을 요구할 뿐 아니라 그녀의 소중하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손을 대셨다. 죽음이 그 집을 방문하는데 그곳은 선지자가 과부와 그 아들과 동거하며 하나님의 자비로 주신 고귀한 열매를 함께 먹고 살고 있었다.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녀의 아들은 그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선지자가 제시한 신성한 요구에 기꺼이 응답하는 일에 방해가 되었다. 여기에서 그 아이의 죽음에는 성도를 위한 엄숙한 교훈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단순히 순종하고 헌신하는 길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이 부모나 자식, 남편이나 아내, 형제나 자매라도 목적을 확실히 고려할 때, 그 대상은 분명히 제거될 것이다. 이 과부는 그녀의 아들을 선지자보다 더 귀하게 생각했고, 그 아들을 빼앗겼다. 그녀는 여기에서 그녀가 잃은 것은 단순히 주께 순종하고 선지자를 위한 준비를 포함하는 "가루"가 아니라 그녀의 가장 소중한 이 땅에서의 목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의무라고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와 우리 자신은 주님께 속해 있고, 그분이 요구하시면 언제든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쉽게 우리의 소유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올바른 순종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지막 축복이요 행복을 위한 것이다.
과부는 그녀의 한줌의 가루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셨을 때 응답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녀와 그 집은 수년 동안 유지되었다! 다시 주께서 그녀의 아들에게 안수하신다. 그리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녀의 아들이 하나님의 강한 능력으로 죽음에서 살아났고, 이렇게 해서 그녀는 주님께서 생명을 유지시킬 뿐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배운다. 부활의 능력이 그녀의 처한 환경에 역사해서, 그녀는 그녀의 아들을 되돌려 받는다. 그녀는 이미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공급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은혜를 의지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리고 일용할 가루와 기름을 구하고 매일 너그러우신 우리 아버지의 손길로 계속 공급받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부활의 능력 안에서 우리의 가장 소중한 대상을 소유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이러한 축복은 예수님을 믿는 가장 연약한 신자라도 누리는 특권이다.
이 글의 주제를 마치기 전에 살펴볼 것은 하나님이 이 과부를 방문하신 영향으로 그녀는 그녀의 죄에 대한 그녀의 양심에 대한 엄숙한 질문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당신이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까?" 주께서 우리 가까이 오실 때 거기에는 항상 가장 진지하게 추구하는 양심의 민감함과 소생을 보게 된다.
사람은 자주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깊은 성찰 없이 계속 공급되는 한줌의 가루와 기름을 즐기면서 판에 박힌 하루하루의 일상을 보낸다. 각성된 삶은 하나님과 아주 가까이 동행하거나 그의 손길의 특별한 방문이 있을 때 가능하다. 주님께서 단순히 그녀의 하루하루의 필요를 채우셨다면, 그녀의 마음 속에서 '죄'의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들어왔을 때 양심은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죽음은 죄의 삯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데는 모두 이중적인 활동이 있는데, 즉 진리의 활동과 은혜의 활동이 있다. 전자(진리)는 악을 찾아내고, 후자(은혜)는 그것을 제거한다. 전자는 인간이 무엇인지 밝히고 후자는 하나님이 누군지 밝힌다. 전자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숨어 있는 악의 역사를 빛 가운데 드러내고, 대조적으로 후자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풍성하고 마르지 않는 은혜의 샘을 드러낸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한데, 진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하기 위해서, 은혜는 우리의 축복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또한 전자는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후자는 죄인의 마음과 양심이 완전하게 반응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은혜와 진리가 둘 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이 장의 끝에서 포함된 그녀의 다음 고백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사렙다 과부를 다루심은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그녀의 필요를 놀랍게 공급하심에서 그녀는 은혜를 배웠고 그녀의 아들의 죽음에서 진리를 배웠다.
우리가 영적으로 더욱 민감하고 안식(眼識) 이 예민하다면, 우리는 항상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다루심에서 이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인 그분의 수혜자이며 계속해서 그분의 손이 우리를 다루심에서 진리의 본을 받게 된다. 그것은 특히 우리 마음의 숨은 방에서 나오는 악을 드러내시며 그것을 판단하시고 버리게 한다. 우리가 우리의 가루와 기름이 계속 채워지는 동안은 양심이 잠들기 쉽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징계의 다스림으로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릴 때 즉시 양심은 깨어나서 시기적절하게 자신을 판단하여 활력을 찾는다.
한편 우리는 자신을 판단하는 행위를 너무강하게 반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주 그 영혼이 영접되었는지의 사실에 관하여 의심을 일으키지만 자신을 판단해야하며 그렇지 않으면 함께 좌절된다는 것이다. 신자는 그가 믿음이 없음을 발견하려고 자신을 살피려는 생각으로 자신을 조사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고린도후서 13장 5절의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는 구절을 잘못 해석한 데서 기인한다.
문맥상 조금만 주의해보면 즉시 알수 있듯이, 사도의 마음속에 있던 생각은 그의 말에서 추론해서 찾고자하는 것과는 반대이다. 고린도 교회는 거짓 사도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 여자를 준 것 같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사역에 의심을 품으면서 뻔뻔스럽게 부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사도권을 방어하는 것이 필요했고, 첫째 그의 전반적인 섬김과 증거의 과정을 언급했다. 두 번째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감동적으로 호소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너희 자신을 확증하라(examine yourself)."
그들에게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게 그의 사도권의 권위를 증거하는 것은 그들이 믿음 안에 있다는 사실로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확증한다는 것이 그들이 전혀 믿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examination)이라면 사도가 그들에게 그의 소명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 자신을 조사해보라고 말했다는 것은 잠시라도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반대로, 사도의 소명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증거로서 그들에게 명백하게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다"는 근거 있는 그의 확신 때문이었다.
"자기 조사"(self-examination)와 "자기 판단" (self-judgement)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부연 설명할 만큼 난해한 것은 아니다. 본성을 판단하는 일을 연습하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본성은 우리의 경주를 막고 방해한다. 우리와 함께 붙어다니는 이 악한 본성을 우리는 정직하고 엄격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판단해야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모두에게 이 판단을 연습하도록 좀 더 영적인 능력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매우 조심할 것은 자신을 조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불신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살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에 근거를 두어야한다. 만약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모든 것은 종말이 올 것이다.
그러나 역시 엘리야를 위한 이 방문에서 한 소리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의 특성으로서 그 자신을 과부에게 드렸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특성에 따라 그의 주장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여호와께서 은혜롭게도 그를 위하여 아이를 살리심으로 이것을 증명하셨다. 그때 여인이 말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아노라." 그녀의 확신에 대한 그의 주장을 입증한 것은 부활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삶속에서 부활의 능력이 있어야만 그 특성에 대한 그의 주장이 증명될 수 있다. 이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의 모든 싫은 일에서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그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이지만 아직 세상에 있기 때문에 부끄러움의 몸을 지니고 있다. 그가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면, 그는 곧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특성이 의심받게 될 것이다.
단순히 자기를 옹호하려 한다면 그것은 비참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는 더 높고 고상한 목적이 있다. 즉 그의 입에 있는 주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마땅한 목적이다. 그의 입에 있는 주님의 말씀과 관계있는 것 외에는 그 자신의 특성과 평판은 그에게는 사소한 일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서에서 그의 사도직 방어를 시작한 목적은 그가 전한 복음의 신성한 근원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바울 자신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가 간절히 소원하는 것은 그의 입에 있는 주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그들을 위해서 증명하는 것이었다.
진실로 중요한 점은 선지자가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장면은 18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사렙다 과부에게 갔지만 바로 그 때 이와 같은 증거를 얻었다. 정말 그것은 적은 일이 아니었다. 복되게도 그의 영혼은 확고해졌다. 그는 그의 사역에 하나님의 보증을 받은 것이다. 그는 그와 오래 함께 했던 사람의 양심에 그의 자신을 증명했고 그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입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기꺼이 자신의 직무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엘리야의 생애의 중요한 단계를 마치게 되었고, 그 때가 이스라엘의 시야를 떠난 3년 반 동안 숨어 지낸 시기였다. 우리는 단순히 엘리야의 생애의 표면에 나타난 진리의 원칙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삶의 과정에서 영적인 의미에서의 교훈을 끌어낼 수는 없을까? 내 생각에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방인 과부에 대한 선지자의 소명을 언급하신 것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그림자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 같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동안 닫히고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5-26). 주 예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선지자로 제시했으나 시온의 딸은 그 주인의 목소리 듣기를 거절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우신 말씀" 에 대하여 그들은 육신적인 질문,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는 말로 응수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조롱과 배척에도 그의 영이 위안을 찾게 되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영역을 넘는 다른 대상이 있어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풍성하고 순전하게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의 교만이나 불신, 굳어짐으로 멈추게 되면, 그들로부터 떠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더 풍성하게 흘러가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그가 가라사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 49:5-6).
이방인을 부르시는 고귀한 진리는 성경에서 상징이나 지침으로 널리 가르쳐지고 있으나 지세한 것은 다음 기회에 충분히 상고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선지자의 삶과 사역을 간단하게 실제적으로 상고할 것이다. 주께서 모든 명칭과 이름을 가진 그의 백성을 위로하고 세우기 위해서 이러한 간단한 연구를 인정하여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