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봅시다] 순례자
[생각해 봅시다]
순례자
- J. M. 데이비스
인류의 역사 속에는 언제나 적은 무리가 있다. 그들은 끊어지지 않는 신성한 전통을 늘 지켜왔으며, 자기들의 땅에서 순례자 또는 나그네라고 고백해왔다. 묘비 위의 조개껍질은 그 밑에 잠들어 있는 인물이 전에 바다를 건너 온 순례자라는 표지인데, 그와 같이 영적인 순례자들의 독특한 분위기는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찾고 있다는 표적이 되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때때로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있어서 사막과 산중을 헤매며 동굴 속에서 살았다. 세상은 그들의 세상적이지 않은 태도에 조금도 동정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땅위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시대의 풍조와 시대적인 감각에만 정신을 팔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성별된 사람들은 이와 같은 태도에 너무나도 강렬한 빛을 던지기 때문에 미움을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쫓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 사람들은 시장과 일반 가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그 복장이 검소하며 허리가 힘껏 졸라매져 있어서 식욕을 절제하고 있었으며, 금전에는 욕심이 없고, 주위 사람들의 주장, 의견, 칭찬 따위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었다.
또 그들은 때때로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보여주곤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애정이 때와 함께 변하기 쉬운 땅 위의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눈에만 비치는 영원의 현실로 향해져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이것이 순례자의 모습이다. 그들로서는 인생의 여러 가지 번잡함과 시련은 그다지 압력으로 느끼지 않으며, 또 그다지 견딜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그들의 참된 보화에 저촉되거나 그들의 참된 관심이 있는 곳에 영향을 끼치거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인간의 권력과 영광, 명예와 보수, 즐거움과 자랑 따위는 조금도 매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더욱 뛰어난 영토의 자녀이며, 더욱 위대한 국가의 일원이며, 전에 태양이 비쳤던 어느 거리보다도 더욱 고귀한 도시의 특별대원이다.
영국인은 해외여행 도중, 외국인에게 사기를 당하여 수중에 있는 돈을 전부 빼앗기더라도 만일 그의 재산이 영국의 은행에 예금되어 있다면 조금도 곤란을 당하지 않는다. 또 어떤 대제국의 황족이 제왕의 권한을 받기 위하여 기차를 타고 급히 귀국하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 여행 도중에 작은 영토의 주인이 되어 달라는 신청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유혹에는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순례자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잘 다져진 일정한 코스를 급히 통과하여 자기 자신의 영원한 가정에 도착한다. 그 외에 어떠한 소망도 가지지 않는다. 그는 여러 가지의 의무를 이행하고 여러 가지 요구에 대답하여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다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이곳에는 영원히 존재하는 도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장차 나타나는 도시만을 대망한다.
이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불멸의 문자로 기록한 위대한 꿈꾸는 사람(죤 번연)은, 순례자들의 풍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특징을 들고 있다.
첫째, "순례자들은 그 장터에서 매매하고 있는 어떠한 종류의 의복과도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을 향해 바보라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고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이방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둘째, "사람들은 그들의 옷에 놀란 것처럼, 또한 그 말에도 놀랐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 사람은 적었다. 그들은 물론 가나안 말을 했지만 시장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었으므로 시장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야만인처럼 생각되었다."
셋째, "그러나 상인들을 적지 않게 당황하게 한 것은 이 순례자들이 한결같이 시장의 모든 상품을 대단히 경멸한 일이었다. 그들은 물건을 구경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만일 '사주세요'라고 어느 상인이 말이라도 건넨다면 그들은 귀를 손가락으로 막고 '나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하고 부르짖으면서 위를 쳐다보고 자기들의 상품거래는 하늘에 있다는 표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은 저 위대한 꿈꾸는 사람이 꿈을 보았던 시대에,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이전에는 잘 알려진 존재였음에 틀림이 없다. 사도 베드로는 본토에서 흩어져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벧전 1:1)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이 '나그네이며 거류민'이라는 것을 거듭 인식시키고 육욕을 피하라고 말하고 있다. 또 그보다 훨씬 이전의 유대 전성시대의 무렵,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을 빌려서 그들이 조상들처럼 나그네이며 거류민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땅 위에서의 나날이, 지금은 주위의 풍경을 뒤덮고 있으나 태양이 모습을 나타내면 곧 사라지는 언덕 위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초기시대에 가장 두드러지게 순례의 길을 떠난 저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의 족적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 전연 알지 못하는 미지의 땅으로 갔으나, 믿음으로 순종하여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지내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에게서 본받을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겠으나 아쉬운 대로 다음의 세 가지 주제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세 가지의 것은 순례자가 된 우리에게 깊은 영적 의미를 준다. 그것은 장막, 제단, 약속이다.
1. 장막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는 75세였다. 따라서 일세기동안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면서 지금 베드윈족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약대의 검은 털로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가볍고 부드러운 장막에 살고 있었다. 이 장막은 그의 생애의 중심 되는 장소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는 본토인들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그들 가운데 살고 있었으나, 그들에게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또 그들의 부족회의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또 그들의 자녀들과 혼인 관계를 맺지 않도록 주의 깊게 감독하여 자기 아들이 장가를 들 때가 되자, 사람을 멀리 고국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는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실한 오라기도, 한 가닥의 구두끈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해서도 그 전부의 값을 치르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특정의 장소에 영주하는 일이 없이 언제나 이동하고 있었다. 기초가 없는 장막, 30분이면 세울 수 있는 장막, 그것이 그의 생애를 알맞게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하란으로 돌아가서 그 거리에 정착하여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유혹이 종종 그의 마음에 생겼을 것이다. 그 떠나온 곳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히 11:15). 그러나 그는 하란에서 정착하는 것보다는 가나안에서 방랑생활을 하는 펀을 택하고 최후까지 장막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 장막에서 그는 운반되어 막벨라의 바위로 이루어진 동굴에 있는 사라의 무덤 곁에 장사되었다. 어째서 그는 이렇듯 험난한 길을 택하였을까.이 의문은 신앙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는 저 웅대한 장(章)에서 충분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 11:9-10). 참으로 그러하다.
장막생활은 자기들의 고향이 별 저 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활 방법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대한 간증으로서 이와 같은 격리된 생활을 보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소망에 대하여 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부와 안락함과 명예와 정과 욕심을 따라 살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과 같이 이 변하는 세상의 쾌락과 매력에 열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고, 탐욕의 손을 뻗치기도 하고, 혹은 그것들에 의존한다고 하면, 그들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진실한 것인지 의심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결국 미래의 세계에 참된 성(도시)이 있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과 같은 생활을 그대로 계속해서는 안 된다. 자칭 그리스도인은 지나치게 마음에 근심하며, 쾌락의 추구와 사치한 생활, 자기방종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과 이 세대의 아들들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밖에 보이지 않는다. 날카로운 관찰자라도 그들의 가정, 그들의 자녀교육, 그들의 복장, 그들이 일하는 방법들에서 일반 사람들과의 차이를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나무를 심으며, 집을 짓고, 사고, 팔고, 장가간다. 그러나 홍수는 이것들 모든 것을 쓸어버리려고 무너지기 쉬은 제방을 벌써 파괴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지금까지의 인생을 고치면 좋겠는가. 현재의 관습을 버릴 것인가. 현 시대의 횡포한 세속주의를 향하여 극구 비난할 것인가. 이와 같은 방법은 영속성 있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요한이 보았던 영원한 성을 빛나는 색채로써 묘사하자. 우리가 목표하고 있는 세계의 영광을 대담하게 소개하자. 그리고 이 땅위에 있을지라도 자기를 부정하는 결단력이 있고 신앙이 있는 영혼은 날마다 황금으로 다져진 길을 걸을 수가 있으며, 천사들이 연주하는 거문고의 심포니를 들을 수가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자. 그렇게 하면, 제아무리 웅변적인 설교라 할지라도 능히 미치지 못하는 박력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현실을 인상지어주는 우리들의 성별된 삶의 길이 많은 사람들의 생애 속으로 뻗어 들어갈 것이 틀림없다.
2. 제단
아브라함은 장막을 친 곳에서는 어디서나 반드시 제단을 쌓았다. 그처럼 아메리카로 건너간 순례자의 아버지들은 가정을 쌓기 전에 신대륙의 바닷가에 예배의 제단부터 쌓았다. 장막이 거두어진지 오래된 후에도 제단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전에 그곳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룻밤의 잠자리를 빌리는 모든 가정에 제단을 쌓고, 우연히 거주하게 된 모든 장소에 개인의 기도와 가정예배의 모범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정열을 나타내는 복된 표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습관은 우리가 떠나간 후에도 오래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과단성 있고 용감하게 그와 같이 한다면, 주변의 가나안 사람들은 우리가 무릎을 꿇었던 곳에 엄숙한 마음으로 모여서, 이신성한 전통을 이어받아 다음 세대의 사람들도 거기서 무릎을 꿇게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권면할 것이다.
제단은 또한 완전한 번제(燔祭), 자기부정, 자신의 명도(明渡)라는 희생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러한 의미에서 제단과 천막은 언제나 손을 잡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제단이 말하고 있는 아픔과 괴로움의 얼마만이라도 맛보는 일이 없이는 인간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장막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활에서만 가장 강렬한 헌신, 가장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 가장 복된 하나님과의 교류가 솟아오르게 되는 것이다.
만일 최근 당신의 기도가 막히고 있다고 하면 그 원인은 당신이 충분히 장막 가운데서 살지 않는데 있는지도 모른다. 격리를 의미하는 장막생활은 반드시 자기부정과 천국 교제의 제단을 만들어낸다. 당신이 이 땅 위에 있어서는 나그네와 또 순례자라는 것을 고백하라. 그리하면 주님의 이름을 불러서 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되고 자연스럽게 되리라.
아브라함이 하란에 살고 있는 동안에 제단을 쌓았다는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께 불순종의 생활을 보내며, 또 땅에 뿌리를 박고 안정된 셍활을 보내고 있는 한, 그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참된 순례생활의 한가운데서 갈망이, 소망이, 그리고 큰 뜻이 솟아 올라 왔다. 그런데 이것들은 그가 여행을 해나가는 곳마다 쌓은 제단에 의해서만 충분히 채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제단은 그만의 것은 아니었다. 어느 기간 중에는 한 가족과 동거인 전부가 공동으로 예배하기 위해 그곳에 모여 왔다. 애굽과 우르에서 산 노예와 사막을 여행하는 중에 출생한 아이들, 늙은이도, 젊은이도, 어버이도, 자식도 있는 잡다한 한 떼가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제단의 둘레에 서있는 가운데서, 족장은 공동의 희생과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창 18:19) 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땅 위의 모든 가족의 축복의 기초가 되는 그가 가정예배를 행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로서 제단이 없는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에 선명한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족장에게서 자극되어서 가정에 제단을 쌓고 매일 그 주위에 아이들과 동거인들을 모아 그들의 가정생활을 감미로운 것으로 만들고 또 고귀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를! 그렇게 하면 많은 사악한 자는 찬미와 기도의 신성한 영향 앞에서 완전히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3. 약속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창 12:7). 아브라함이 완전히 순종한 직후에 이 새로운 약속이 그의 귀에 들려졌다. 이 원칙은 지금도 옛날과 다름이 없다. 불순종하라. 그리하면 당신은 별 하나 없는 어두운 밤길을 걷는다. 순종하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뒤를 이어서 약속의 빛이 하늘에서 비쳐와 당신의 길을 밝게 한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약속은 전의 것보다는 한층 더 내용이 풍부하고 충실한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은 다만 가야할 길을 보여주신 다고만 보증하셨다. 그것이 이번에는 그 땅을 주신다고 맹세하신 것이다. 격리된 순례생활에는 언제나 약속이 따른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이 약속이 성취된다는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무렵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있었다." 마므레, 에스골과 같은 강대한 추장, 소돔, 살렘, 헤브론과 같은 번영하고 있는 도시, 여러가지 문명, 이러한 것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가나안 사람은 방랑의 백성은 아니다. 그들은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토지를 경작하고 있다. 그리고 날마다 힘을 쌓아 올려가기 때문에 그들이 자녀가 없는 목양자의 자손에 의하여 지배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실현된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 33:11).
독자여, 어떠한 약속이 당신의 생애에 걸려 있어서, 당신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가. 나는 알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만일 당신이 약속에 붙어서 따르고 있다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 찬란하게 성취된다는 것이다. 길을 막는 곤란과 불가능의 산에 눈을 돌리지 말고 약속하신 분의 크신 능력과 진실에 주목하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막 13:31).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一點) 일획(一劃)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8), 눅 16:17).
바위가 많은 바닷가에 서있는 등대가 배를 무사히 통과시킨다. 그리고 마침내는 태양이 올라와서 배가 목표로 삼는 항구를 가득비친다. 마치 그처럼 약속에 이어진 약속이 어느덧 당신의 생애에 빛을 던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