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의 친구들

에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의 의미(마3:13~17)

행복자 2020. 1. 3. 09:20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의 의미(마3:13~17)

조준안 여주교회


주님께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그가 하는 일은 주님 앞에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일을 하였다. 그들의 마음에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하는 회개세례를 외쳤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내 뒤에 오시는 이인데 나보다 능력이 많으셔서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고 하였다. (마3:11) 이것은 최하위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다. 또한 마3:2절에서 그는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친다. 여기서 천국은 왕 되신 주님을 의미한다. 요한은 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았다. 또한 요한은 요1:29~34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전하고 또한 내 뒤에 오시는 자가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믿음은 인간의 지식과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되면 쉽게 믿을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도 예수님을 육신의 차원에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세례를 베풀면서 성령이 그에게 내리심을 보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주실 분임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침례는 높은 자나 먼저된 자가 낮고 나중된 자에게 주는 것이다. 산자가 죽은 자에게 주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구하신다. 우리가 주님께서 누구신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누구와 이야기해보면 그가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디 사는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를 알아본다. 알아볼 수 있는 끈이 있다. 요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기 때문이다. 3:15절에서 주님께서 ‘이제 허락하라,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살펴보자.

1. 예수님의 세례는 대표성의 원리가 들어있다. (눅12:50 막10:38)
주님은 삼십에 공생애를 시작하신다. 왜 그랬을까? 민4:1~21절에 이스라엘 자손 중 제사장지파인 레위자손들이 제사장직을 수행할 때 나이가 삼십이었다. 마3장만 하더라도 세례가 여러종류 나온다. 세례요한의 세례, 예수님에 의한 성령세례, 불세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받게 되면 받을 세례가 있다. 다 성격이 다르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다. 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런 차원의 세례를 받으신 것인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회개할 필요가 없으신 분인데 주님께서 세례를 요구하셨다. 그래서 요한이 의아해하고 당황스러운 태도로 주님을 말리면서 ‘내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내게 오시나이까?’라고 묻는다. 이제는 허락하라. 그래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의 세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례와 다르다. 주님께서 죄에 대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다면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의를 이룬다는 말은 무슨 뜻이고 여기서 세례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류를 대표해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음의 자리에 내려가시고 또한 다시 부활하심으로 죽음과 부활을 대표하신 것이다. 롬5:12~14절에 아담은 오실 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이는 대표자라는 말이다. 엄격하게 인류는 두대표자가 있다.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다. 첫째 아담이 죄를 범하고 사망이 왔고 심판이 따랐다. 이제 아담안에 출생한 모든 사람은 아담이 받는 모든 것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한일 축구가 이루어질 때 우리 국민을 대표해서 열한명의 선수가 뛰게 된다. 그들이 이기면 대한민국 전체가 이기고 그들이 지면 대한민국 전체가 지게 된다. 첫째 아담은 인류를 대표해서 실패하였다. 둘째 아담은 인류를 대표해서 승리하셨다. 이것이 대표성의 원리이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 대표의 모든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고전15:45~49)

2. 보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종종 ‘의’란 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동일하게 쓰였다. 주님께서 율법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므로 온전히 이루셨다. 사람이 율법을 범하므로 그 모든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청산해주셨다. 그리고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다. (요19:30) 또한 하나님의 모든 율법, 구약에 예언한 모든 말씀을 온전하게 성취하셨다. (마5:17~18 요17:4) 그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랑을 완전하게 이루셨다.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모든 예언과 약속을 이루셨다.

3. 세례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요, 확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결혼식을 생각해 볼 때 먼저 서로가 사랑하고 하나님의 허락하신 사람으로 확인하는 관계가 있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세례는 결혼식과 입학식, 대통령 취임식과 같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는 자리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식적으로 알리고 시작하는 것이다. 죄로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구속을 계획하고 경륜하신 그 모든 일들이 이제 아들을 통해서 성취되는 순간이다. 구약의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 공식 활동을 할 때 기름부음으로 사명을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도 왕, 제사장, 선지자로 공식적으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음으로 시작하신다.

4.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1) 하늘이 열렸다. 하늘의 엄숙하고 특별한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의 세례를 빛내주셨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고 나서 일어난 것이다. 주님 앞에 놓여진 영광과 즐거움을 보게 하므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격려하신 것이다. 우리도 주님을 영접하고 그에게 복종하겠다는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격려를 주기 위한 것이다. 이제 주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 하늘을 열려있다. 죄는 하늘을 닫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를 중지시켰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소에 들어갈 길이 열린 것이다.


(2) 성령이 비둘기같이 주님위에 임하였다. (사61:1)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성령안에 계셨다. 성령으로 잉태하고 성령으로 성장하였다. 주님께서는 죄없이 태어남으로 성령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신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첫째로 비둘기는 순결하고 온순한 동물이다. 독수리와 매는 공격적이고 죽이는 일을 하지만 비둘기는 사람 품에 안겨온다. 노아 홍수일 때 까마귀는 죽은 것을 먹고 살아서 사람을 떠나지만 비둘기는 죽은 시체들과 함께 할 수 없어서 사람 품에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흠없는 제물이고 온유한 성격을 가지고 계신다. 성령은 죄 없는 사람에게 임하신다. 둘째로 비둘기는 메신저와 같다. 노아 홍수 때 감람잎사귀를 물고와 홍수가 끝임을 알려주었다. 통신수단의 역할을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함께 오심으로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3) 하늘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영광 가운데 들리는 음성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언성취, 기적, 부활 등을 통하여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하였는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들 됨을 직접 증거하신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이런 일이 3번 있었다. 공생애가 시작되는 세례식 때, 공생애 중간의 변화산
(마17장), 공생애 마지막의 십자가를 앞두고 요12;27-30에서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이 된다. 사람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세례를 받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뻐하신다. 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을 의미한다. 우리는 날마다 이것을 확인하고 또 적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살아날 때 복음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주님이 자신을 비우고 돌아가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셨듯이 부활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셨듯이 내 자존심과 체면과 내 감정과 모든 것을 죽일 때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발할 수 있다(요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