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신앙 (행 7:1~8)
아브라함의 신앙 (행 7:1~8)
조준안 여주교회
행6:15절에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하였다. 얼굴은 그 사람의 정신과 마음의 표상이요, 인격의 거울이요, 신앙의 나타남이다. 세익스피어는 얼굴은 책과 같아서 그 사람의 마음을 다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링컨은 40세가 되면 자신의 얼굴을 책임지라고 했다. 배우자의 얼굴은 당신의 이력서라고 하였다. 사람은 자기 얼굴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90%이고 고칠 수 있다면 고치고 싶다는 사람이 95%라고 말한다. 얼굴은 내적 자아상을 보여준다. 마음이 아름다우면 얼굴이 아름답다.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을 하는 것은 단순히 외모가 잘 생겼다는 말이 아니다. 그의 내면의 영적인 상태가 얼굴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평소에 주님을 사랑함으로 영적인 충만함 가운데 있으므로 나타난 모습이다. 어떻게 스데반은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었는가? 한마디로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주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르며 성령이 인도하심에 늘 민감한 삶을 살았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지혜가 충만하고 은혜와 믿음,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스데반은 많은 유대인들과 복음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때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을 매수하고 종교지도자들을 충동시켜 공회에 모이게 하고 성전과 율법에 대해 스데반이 잘못 가르친다고 고소함으로 스데반은 그 고소내용에 대해서 7장에서 변증적인 설교를 하게 된다. 그 설교의 첫 번째가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스데반은 왜 이런 설교를 하였을까? 그는 죽음의 위기 앞에 서있다. 그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신앙과 다를 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럴 때 스데반은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기회를 찾지 않고 자기를 변명하지 않고 자기 동족에 대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할 기회로 활용한다. 우리는 누구나 위기 앞에 설 때가 있다. 암선고를 받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큰 사고를 당하거나 큰 문제를 만날 때 절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주님 앞에서 나름대로 똑바로 살려고 힘쓰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실까? 그러나 스데반은 그런 위기 앞에서 불평이나 원망이나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목숨을 걸고 전하려고 한다. 왜 아브라함을 먼저 언급하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의 신앙과 너희의 신앙이 다름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먼저 영광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신다. 또한 유대인들은 성전 안에만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성막이나 성전이 있기 전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선민으로 선택된 것은 무언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치 그가 우수품종으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자질이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런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에서 최고의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었다. 또한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 (수24:1~2)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찾지도 않았다. 최고의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자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보이는 세상을 위해서 살았고 하나님이 아닌 달의 신을 섬기는 정령 숭배자였다. 영광의 하나님이란 하나님께서 장엄, 위대함, 경이로움, 놀라움, 권능, 초월자 되신 것을 말한다.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 (딤전6:17, 요1:18, 요일1:5)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는 신이다. 세상의 신들 중에 이렇게 인격적으로 자기를 계시한 신은 없다. 하나님은 목적과 뜻을 가지고 자기를 계시하신다. 만물을 통해 자기를 계시하시고 역사를 통해 계시하시고 성경을 통해 계시하시고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신다. (시19:1, 요1:14, 히1:1-2) 기독교 복음 진리는 단순히 사상, 관념, 철학, 개념만이 아니다. 살아계신 인격적 하나님의 계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사람들과 만나서 말씀하시고 관계를 형성하시고 삶을 같이 하였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등. 그러나 타락한 유대종교는 하나님과 실제적인 만남과 그 분의 계시와 삶의 관계가 없는 형식종교일 뿐이었다.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인도하신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11:8) 행7:3~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척과 고향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명하신다. 복음의 메시지도 이렇게 부르심의 방식으로 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부르시는가? 설교나 전도를 통한 형식으로 부르실 때가 있다. (롬10:13~15) 설교나 전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쓰시는 한 가지 방식이다. 때로 전도책자나 글을 통하여 부르신다. 때로 큰 풍랑, 사건, 사고, 질병 가운데 부르신다.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다양한 부르심이 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항상 단체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부르신다. 이 부르심은 과거 그릇된 삶의 방식을 버리고 포기한다. 아브라함도 세상적인 가치를 버리고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했다. 이교와 세상 삶의 방식을 버려야했다. (요일2:15~16, 엡2:1~3) 세상은 마귀가 장악하고 있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삶이다. 이 세상은 장차 망할 성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이는 땅으로 가야한다. 우리의 관점을 바꾸고 전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 복음의 약속인 하늘의 도성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유대교는 아브라함처럼 세상을 버리고 하늘의 소망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는 권력이 되어있고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을 상실한 세상정신과 가치가 살아있는 곳이었다.
3.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아브라함은 믿고 순종한다.
행 7:5~8절에 하나님의 약속이 나타나있다. 약속의 내용은 무엇인가? (창15: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신다. 그 때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무엇을 주실수 있는지 묻는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시고 하늘의 뭇별을 가리키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과 능력을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이것을 신약 롬4장에서 아브라함이 할례나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구원의 길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과 목적을 일러주신다. 그것이 훗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성취될 것이었다. (갈3: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고 하셨다. 이것은 이삭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게 되고 그 메시아의 구속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구원받는 복을 말한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놀라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지금 사라가 불임이고 자기는 백세인 상태에서 자식을 갖는 것은 의학적으로는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었다. 또한 이삭을 요구하였을 때 모리아산으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갈 때도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을 믿고 자기 종들에게 이삭과 함께 돌아올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이다. (창22:5, 롬4:17~22, 히11:17~19)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 성품과 능력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고 그 믿음으로 살았다. 그러나 유대교는 전혀 이러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인도하심, 의롭다하심 등은 은혜로 되는 것이다. 약속으로 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잘나거나 잘했거나 하나님을 찾아서가 아니다. 스데반은 그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율법은 훨씬 후에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율법이 약속을 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갈3: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