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라합에게서 배우는 믿음
[펌] 라합에게서 배우는 믿음
조준안 여주교회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어느 날 여우와 토끼가 동네 음식점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화는 무르익어 그들의 공통의 적인 사냥꾼들의 사냥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우는 자기는 얼마든지 피할 수가 있기 때문에 사냥개는 전혀 겁나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만약 사냥개가 가까이 온다면 땅 속 굴로 도망해서 사냥개가 사라질 때까지 숨어있거나, 아니면 번개같이 달려나가면 어떤 사냥개도 뒤따라오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또는 가장 가까운 냇가로 가서 한동안 몸을 담그고 있으면 사냥개들이 냄새를 못맡아 완전히 방향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원을 그리며 맴돌면서 개들을 어지럽게 만든 후에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이리저리 헤매는 얼빠진 사냥개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다고도 했습니다.
정말 그 여우의 도피법은 무궁무진한 듯이 보였고 자신감에 넘쳐 보였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만약 사냥개들이 온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한 가지ᆢ '겁먹은 토끼'처럼 달리는 것뿐이라고 부끄러운 듯이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사냥개들의 나직한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토끼는 겁먹은 모습으로 바로 뛰어 문을 박차고 힘껏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여우는 땅 속 굴에 들어가 숨을까 말까, 빨리 나가서 달아날까 말까, 냇가에 들어갈까 말까, 맴돌이를 할까 말까 생각하느라 주저주저하고 있다가 그만 득달같이 달려온 사냥개에게 잡아 먹히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보다는 그중 한가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실천의 종교입니다. 영국 속담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더 존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처음 건너가서 청소부 생활을 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한 백인이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당신은 청소부가 아니라 신사입니다."라고 감탄하면서 작정했던 것보다 더 많은 월급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신념을 생활에 실천하는 사람은 비록 청소부 생활을 할지라도 신사의 대접을 받는 법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 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무슨 일이든지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말만 앞서는 것보다 실천의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 참으로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성경 속 인물 중 천한 기생의 신분에 이름없는 비천한 이방인이었지만 신실한 믿음과 행함으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 예수님의 족보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되어 이스라엘 왕가의 조상이 된 기생 라합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야고보서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히브리서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무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어려운 사람이었고 여러 불리한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기생 라합.. 그녀는 누구일까요?
라합이라는 이름의 뜻은 '넓다' '넓은 광장'이란 의미입니다. 라합은 마음만 넓은 것이 아니라, 영원을 바라보는 거룩한 눈으로 넓은 영적 시야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라합은 우상을 숭배하는 아모리 족속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 여리고에 살았던 이름 없는 기생이었으나 자신의 신앙과 슬기로 이스라엘 왕가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5~6]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의 길고 긴 광야 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여리고라는 거대한 성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때 지도자 여호수아는 두 사람의 정탐꾼들을 그 성으로 보내어 살피고 오도록 하였습니다. 여리고 왕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찾으려고 혈안이었는데, 라합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 명의 정탐꾼을 자기 집 지붕 위에 숨겨 주었습니다.
그녀의 결단력있고 용감한 행동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경외심의 발로였습니다.
[여호수아 2:9~11]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은 라합의 신앙고백인데 생략된 주어를 넣어서 쉽게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여리고 사람들은) 당신들 때문에 두려워하고 다 당신들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당신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당신들이 요단강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 여리고 사람들은)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여리고 사람들은 이를) 듣고 너무나 무서웠고 당신들과 싸우는 것을 (우리 여리고 사람들이) 두려워 하나니, (제가 판단하기로) 당신들의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땅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읽으니 라합의 믿음이 보이시나요?
이는 라합의 놀라운 신앙고백인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하여 전적으로 지지하는 동의와도 같은 것입니다.
여리고성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들었고, 홍해 물을 가르고 아모리 왕을 정복한 이야기를 들었고,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그들도 들어서 알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굉장했는데, 그 하나님의 권능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네 성으로 향하여 온다는 소식을 듣자 두렵고 무섭고 떨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손길과 화평하기보다는 성문을 굳게 잠그고 성안 단속을 든든히 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기려고 하였습니다.
단 한 사람 라합을 빼고는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 자기 입장,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지, 자기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과 화평하고 하나님께 항복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왜 하나님을 향하여 두려움을 가지면서도 하나님께 나아 오지 않을까요?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 입장, 그동안 살아왔던 습관적 관행, 기득권이나 자존심을 포기하거나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의 경고만 주시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에게 더 크게, 더 선명하고 더 분명하게 사랑과 용서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딸, 아들아!
너의 마음이 두려움에 쫓기고 있음을, 그 두려움을 나도 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별 수 없이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너의 연약함을 나도 안다.
나에게 나아 오렴. 그래도 반항하고 싶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싶고 너의 생각, 너의 길 고집하고픈 그 마음까지도 안다. 아직도 자아를 내세워 나 하나님과 싸우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있을지라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기꺼이 너를 용서하며 넉넉히 너를 사랑하여.. 네 마음을 몹시도 시달리게 하는 죄책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싶단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생각을 버리고 내게 나아오렴. 네 고집, 프라이드를 버리고 내게 나아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렴.
사랑하는 딸아, 네 안에 죄가 용서받음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평안과 생명을 위하여, 죄책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난 참된 자유를 위하여, 심판과 형벌의 공포에서의 영원한 해방을 넘어 너로 살맛나게 하고 꺼지지 않는 소망을 주는 생명과 영생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아들아, 내 사랑 안에 거하여라. 네 생각을 고집하고 네 느낌을 고집하고 네 길을 고집함이,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처럼, 네게 고역이지 않더냐?
더 이상 두려움에 쫓겨서 분노와 반항과 싸움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내가 너를 위하여 너를 대신하여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를 지어 죄값을 다 치루었으니, 내 사랑을 믿고 내 안에 거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