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 (행 7:9~16)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 (행 7:9~16)
조준안 여주교회
스데반의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복음의 요약을 볼 수 있었다. 주님께서도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라고 말씀하셨다. 롬4장에서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요셉 이야기다. 요셉이야기는 창37~50장에 나온다. 무려 13장에 다뤄지고 있다. 왜 스데반이 요셉이야기를 꺼낼까? 지금 스데반은 목숨이 걸린 재판이요, 진술 하나하나가 신중하고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구약 역사 중 중요한 부분들을 발췌하여 어떤 경우는 생략하고 어떤 부분은 부각해서 말하고 있다. 요셉이야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배척을 받아 팔리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자기 동족과 세상의 구원자로 세우신다. 이스라엘 민족은 오랜 역사 동안에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을 배척하였다. 그리고 재판을 주관하는 산혜드린 공회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오랜 역사동안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육신적 세상적 인간적인 방법으로 바라보았다. 영적으로 어두웠음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다. 이스라엘의 굴절된 역사를 뒤집어보면 유대민족이 당한 온갖 시련과 고통은 하나님의 역사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이것을 호되게 책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죄가 조상과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했기 때문이다.
1. 왜 그들이 요셉(그리스도와 복음)을 배척하였는가?
(1) 그들이 자신이 처한 실상을 몰랐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는 영원한 안전과 안식을 제시한다. 인간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방황한다. (마9) 또한 인간은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가는 쉼없는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 (마11:28) 또한 인간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와 같다. 그들이 처한 심각하고 비참한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은 영접치 아니하였다. (요11:11) 그래서 복음을 올바로 전하기 위해서 먼저 율법을 전해야 한다.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질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면 치료를 위해서 온 마음을 쏟을 것이다. 사람이 영적인 상태를 알게 되면 자신의 진정한 필요를 알게 되고 그 필요를 해결해주실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이 되었는가? 불행, 실패, 수치, 타락, 고통, 전쟁 등을 볼 수 있다. 답은 그리스도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2) 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배척하였는가? 요셉이 형들 앞에 채색 옷을 입고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의 편애도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배척의 원인은 꿈 때문이었다. 묶은 열한개의 곡식 단이 자신에게 절을 하고 해,달,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을 한다고 하였다. 요셉은 형들보다 우월성을 강조하고 너희들이 장차 나를 복종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 말에 형들은 격분하게 된다. 자기가 누구라고 우리의 왕이 되어 다스린단 말인가? 너와 우리와 같은 형제인데 하였다. (창37) 이와 같이 요셉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예수님께서 비판을 받으신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왜 배척을 당했는가?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 선포하고 주장하고 가르침 때문이다. 특히 요한복음에 보면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요. 하늘로부터 왔으며,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고, 나는 세상의 빛이요, 문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라고 선포하셨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그런 그를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워 그들을 다스릴 것을 먼저 보여주신 것이다.
(3) 그들이 요셉과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은 시기심 때문이다. 죄의 속성은 자기가 왕이 되고 자기보다 높거나 앞선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자기 중심이요, 자신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경쟁을 원하지 않는다. 나보다 잘난 것에 시기심을 가지고, 그 시기심이 선악과를 따먹게 한 것이다. 하나님까지도 그의 경쟁대상이 된 것이다. 인간의 죄로 어둡고 무지하고 맹목적이 되었다. 또한 편견의 사람이 되었다. 야곱은 요셉이 꿈 이야기를 했을 때 자기가 꿈꾸던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요셉을 통해서 전개 될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 산혜드린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눈멀었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해 눈이 멀었는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 눈이 멀었다. (요1:14, 3:19) 그들은 세계적으로 지성을 자랑하고 석학들이었지만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었다. 야곱이 요셉의 꿈을 이해했으므로 핍박하지 않았다. 형들도 아버지의 영적인 마음을 가졌으면 핍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종교지도자들도 영적으로 눈이 멀어서 주님의 교회를 핍박한 것이다.
2. 여호와께서 요셉(그리스도)과 함께 하셨다. (행7:9~10)
요셉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보여주는 사례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을 완벽히 보여주고 있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한다.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판 것은 그리스도께서 역사 안에 뚫고 들어온 것과 같다. 애굽인 세상은 죄악과 어둠, 부패와 거짓의 세상이었다. 이러한 세상에 주님이 오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개입에 여러 방법을 보여준다. 때로 위대한 사람들을 일으키는 방식이다. 요셉, 모세와 같은 경우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오셨다. 예수라는 이름과 인간의 몸을 입고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오셨다. 그래서 인류역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구원이다. 인류역사는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한편으로 요셉은 왕자복인 채색옷을 벗고 노예복을 입는다. 주님께서도 영광과 권세와 부와 존귀의 모든 옷을 뒤로하시고 천한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리고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시험을 당하셨다. 요셉도 노예복을 입고 죄수복을 입고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겪었다.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순종함을 배우듯 요셉도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형들이 요셉에게 몹쓸 짓을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요셉의 온 가족, 애굽 전체를 구원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 한 것은 구원의 반대 일만 하였다.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그리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 된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간접적이다. 하나님 역사 전면에 직접 나타나지 않고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역사를 이루신다. 왜 하나님께서 요셉을 감옥에서 2년 동안 방치해두었는가? 왜 이런 지연을 허락하셨는가? 즉각 구원하지 않으셨는가? 일을 이루시는 과정이나 수단이 미약하게 보인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심이 무력하게 죽으신 것 같다. 원수들이 승리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 부활로 결국 승리하신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요셉과도 주님과도 함께 하셨다.
3. 하나님께서 요셉(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치리자로 세우셨다. (행7:10)
요셉은 꿈 해몽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은사를 발휘한다. 바로는 이렇게 하나님께 감동 된 사람을 볼 수 없다며 요셉을 애굽의 치리자로 세운다. 그래서 7년의 풍년으로 7년의 흉년을 대비하게 하는 일을 한다. 자기 가족과 온 세상을 기근과 굶주림에서 구원하는 일을 한다. 우리 삶에도 풍년과 흉년이 교차한다. 그래서 항상 넉넉할 때 어려울 때를 대비하여 살아야 한다. 결국 형들과 가족들이 만나게 되고 다 애굽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1)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주의 구원자요 통치자로 세우셨다. (마28:18, 행5:29/31, 골1:19, 마2:6) 왜 주님이 세상 일에 개입하셨는가? 세상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
(2) 주님께서 우리의 앞날을 완벽히 준비해놓으셨다. 요셉이 다가올 가뭄을 대비하고 예측하듯이 말이다. 왜 주님이 세상에 오셨는가? 주님이 세상을 잘 아셨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영적 가뭄과 죽음의 현실을 해결하고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다. 죄 용서의 필요, 새생명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3) 이 큰 구원은 간절히 필요할 때 얻는다. 요셉의 형들이 식량이 절실히 필요할 때 애굽으로 내려갔듯이 그들의 주변에는 소망이 없을 때 애굽으로 내려갔듯이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절실히 필요로 할 때는 죄와 죽음과 지옥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인식할 때다. 주님은 생명의 떡으로, 빛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분이다.
(4)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주님은 먼저 우리를 알아보시고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 문제해결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