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중에 이루어진 사실 (눅 1:1, 엡 2:3~5)
우리중에 이루어진 사실 (눅1:1, 엡2:3~5)
조준안 여주교회
새해가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성도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하면 좋은데 복음과 관련해서 말씀을 나누게 됩니다. 제게 그런 부담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자주 말씀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돌아서면 주님의 사랑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주님의 은혜를 상기하기 위해서 복음을 교제하고자 합니다. 복음은 구도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 로마서는 성도들에게 씌여진 편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주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시험과 환란과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환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환란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길들이 무엇일까요? 기도, 말씀, 찬송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인가, 어떤 은혜를 입었는가에 대한 것이 우리를 환경을 이길 수 있게 하고 어떤 시험과 환란이라도 주님의 사랑이 이 어려움들을 이기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벧후 1:16~21
주님이 강림하셔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사시고 희생하셨는가?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없던 일을 꾸며낸 이야기라고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의 광적인 팬들이 나쁜이야기는 빼고 좋은 이야기만 성경에 기록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 제자들의 인격을 보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좋은 이야기뿐만 아니라 나쁜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다. 그냥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관찰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는 그대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록하였다. 여러 사람이 각자 입장과 관점에서 기록하였다. 성령이 개입하고 역사하신 것이다. 성경은 참된 진리를 전하고 있다. 성경을 믿을 수 있는가? 이런 기초적인 것이 정립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격과 말씀은 분리할 수 없다. 기독교 가정 안에 자란 아이들은 정체성의 혼란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아는 것인지 믿는 것인지 혼돈한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눅1:1절에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미 과거 역사에 이루어진 사실이다. 성경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다. 믿음은 말씀에 기초가 되어야 한다. 우리 마음이나 감정으로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의 느낌, 감정은 늘 변한다. 그래서 감정을 의지하면 불안하고 마음이 답답할 수 있다. 찬양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을 할 때는 감정이 기쁘다가 그렇지 않고 화를 내거나 잘못을 하게 되면 기쁜 감정이 사라진다. 느낌이나 감정은 순식간에 수백번 변한다. 우리는 그 감정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 중에 이루어진 변하지 않는 사실을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6.25전쟁을 사실로 믿는다. 역사는 내가 믿고 안 믿고에 따라서 사실이고 아니고가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도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정립이 필요하다. 말씀에 근거해서 확실히 정립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바꿀 수 없는 진리를 믿는 것이다.
엡2:3~5 성경은 인간이 꾸며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에서 모든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한다. 본질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본래 진노의 자녀이다. 그 진노를 피할 수 없다. 진노란 화가 차서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화는 한 순간 내고 끝날 수 있다. 마치 운전하다가 화가 나는 것은 순간뿐이다. 그러나 진노는 화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진노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른다. 분노는 상대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그 일에 대하여 분개하는 마음이다. 누르기 어려운 감정이다.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분노가 절정에 달해 고정된 것이다. 왜 진노가 임하는가?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이신가? 왜 진노를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분이시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어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의 법칙대로 움직이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대로 복종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을 만드셨다. 인간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 숨 쉴 때 공기, 육신의 모든 먹고 마시는 것들을 공급해주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만 주신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공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거져 주신다. 인간은 이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왜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욕심 때문이다. 사람은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앞세운다. 욕심을 이루는데 이용한다. 사람은 화가 났을 때 감정과 기분에 따라 말씀을 무시한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고 지키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지킬 수가 없었다. 내 마음속의 욕심 때문이다. 그것은 내 마음에 있는 죄성과 욕심 때문이다. 사람은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렘3:5절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악을 행한다고 말하였다. 죄는 결코 작은 죄가 없다.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행악의 종자라고 하였다. 죄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고 내 스스로 왕이 되는 주객이 전도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최대 원수요,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는 자다. 마귀와 연합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그냥 두실 수 없으셨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자식이다. 마귀가 기뻐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그냥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표출하지 않으실 수 없었다. 인간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이 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간은 감사하지 않고 저주의 대상이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찾아온다. 피할 수 없다. 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선행도 하고 이것저것 해보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고 소망이 없고 위안거리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이런 아무런 소망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기를 원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죄 문제를 해결하여 화목하게 하시려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누군가 대신하여 해주어야 했다. 우리 사람은 화목 제물이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 두루 살펴 보사 누가 저 사람을 용서하고 저주와 진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그에 합당한 대상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을 보내기로 하신 것이다. 요일4:10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죄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셨다. 이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죄로 죽을 수 밖에 없고 진노의 대상이었던 우리었다. 우리는 죽고 저주받아 영원히 멸망받을 자였다. 이것은 변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구약에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 수많은 짐승들이 죽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뿐이고 계속 제사가 필요하였다. 하나님은 이런 것에 흡족하실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완성하게 하심으로 흡족해하셨다. 그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기뻐하시는 아들이었다. 그를 희생제물로 삼으신 것이다. 그 피를 남기지 않고 다 흘리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피를 보고 흡족하고 만족해하셨다. 완전하게 죄 문제가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
롬5:10에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된 것은 과거시제다.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하여 죄사함과 용서, 화목하게 되었다. 옛날 우리가 알 수 없는 시간에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진 사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셨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아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정죄나 진노를 받을 필요가 없다. 살다보면 늘 즐겁게 살 수 없다.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들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 교제가 담이 형성되므로 기쁨을 잃을 수 있다. 이런 것을 해결하지 않고 죄가 계속되면 아들임으로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 주님과 교제가 단절될 때 기쁨은 사라지고 슬픔과 고통과 근심가운데 지낼 수 있다. 우리는 구원받고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 죄를 자백하고 주님과 바른 교제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요일1:9) 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깨뜨릴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집에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했다고 하여 이제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할 아버지가 없다. 한번 죄용서는 영원한 것이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영원한 것이다. 그 어떤 피로도 죄를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 짐승의 피는 잠시 죄사함과 기쁨을 줄 수 있지만 영원하고 완전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만이 용서가 가능하다. 우리가 그 아들이 되게 하기위해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이 사랑은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관계는 나로 근거하지 않고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은 끊을 수 없다. 요3:16절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처럼’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우리는 늘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혜의 공로와 선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이길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세상사람은 이 어려움을 넘어설 수 없고 슬퍼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