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생각해 봅시다] 엘리야의 시대와 생애(7)

행복자 2020. 2. 6. 09:29

[생각해 봅시다]

                                                           리야의 시대와 생애(7)

                                                                                                                                              - C. H. 매킨토시



   5. 호렙산의 선지자(1)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에서 그의 위치가 드러난 인물은 거의 없다. 그의 생애는 특별한 태도나 변화에 의해서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간 자들, 커다란 세파에서 일하는 자들"이라고 하거나,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깊은 데로 내려가서 그들의 영혼은 고난으로 녹았다." 그들은 때로는 산 위에서, 때로는 골짜기에서 볼 수 있다. 한 때는 햇볕을 쬐기도 하고, 어떤 때는 폭풍에 쓸려가기도 한다. 이러한 사태가 뛰어난 인물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변화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정말로 그것은 마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차별 없이, 아무도 계획된 경주를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막을 통과하는 길은 험한 것이 확실하며, 그것은 당연하다. 이는 "미끄러운" 길을 간다고 하기보다는 거친 길을 간다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거칠고 험한 길로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우리는 마지막에 더 즐거운 안식을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좀 더 효과적으로 훈련받고 우리가 감당해야할 위치에 합당하게 하신다.

   사실 천국에서는 시련이 필요 없지만 광야의 시련과 슬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영혼의 습성과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금생에서 삶이 너무 험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피할 수 없이 당하는 운명적인 사건들을 겪게 된다. 우리는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없으며, 자주 많은 시련과 슬픔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모른다. 더구나 우리의 참지 못하는 본성은 자주 불평하고 불순종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거할 성으로 데려가신다."

   위에 있는 생각은 열왕기상 19장의 선지자의 상황에서 암시하고 있다. 그는 그에게 갑자기 닥친 무서운 폭풍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그는 갈멜산을 내려와 아합을 능가하는 성령의 힘을 가지고 이세벨에게 나타났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격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것은 배후에서 그녀를 지키는 자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는 악한 이세벨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집을 개방하고 바알 선지자들을 대접했다. 그녀는 그의 주인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서 이 일을 자행했다.

   이세벨 개인을 주목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한 영적인 집단의 대표이다. 그렇다! 더구나 그는 대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여 역사해온 어떤 원리를 수행하는 세력이다. 그것은 계시록이 말하는 큰 음녀의 성품에서 온전히 성숙해진다. 이세벨의 영은 핍박하는 영으로서 모든 진리를 대적하는 입장을 취하는 영이며 그것은 적극적이고 정력적이며 분발하는 영이다. 그 안에 그 악한 힘의 근원인 사단이 매우 분명히 나타난다.

   아합은 매우 다른 영이다. 아합의 성품 속에서 한 인물을 보는데 그는 그의 육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자로서, 신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이다. 아합은 하나님의 요구와 바알의 요구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자신을 괴롭게 했다. 그에게는 둘 다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는 이세벨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아합의 욕망을 만족시키면서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데 자신의 힘을 적극적으로 영리하게 사용했다. 아합 같이 악한 자들은 항상 이세벨의 도구로 사용되기에 적합하다. 계시록에서 나타난 이러한 원리들은 지금도 역사하며 미래에도 역사하여 그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그녀가 짐승을 타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즉 그녀는 세속의 권력을 행사하는 부패한 종교 혹은 완전히 성숙한 이세벨의 영이 완전히 성숙한(full - gown) 아합의 영을 이용하는 음녀이다.

   이 모든 것은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주는 엄숙한 경고이다.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중요성과 그 운명에 대해서 점점 무관심해진다. 공리주의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돌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모두 차이가 없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당신들은 당신이 좋아하는 어떠한 원칙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와 같이 가장 모순되는 원칙을 소유한 사람들은 미정 상태에 있는 원칙들을 수용할 수 있고 세속적인 유령을 열광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세대의 정신이고 경향이며, 이제 이세벨의 영이 일어나서 그들을 인도하여 그들이 명백하게 들어선 길을 따르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 길은 영원한 어둠에서 끝나는 것이 확실하다. 가장 엄숙하고 엄숙한 생각이다! 다시 말하건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러나 우리가 말했지만 그것은 엘리야의 영을 압도할 만큼 엘리야를 방해한 이세벨로부터 왔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주목할 것은 "아합이 이세벨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일에서 충분한 권한도 없어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도 없었으며, 권한을 소유했더라도 제한적이었다. 그는 충분한 비가 내리는 것과 선지자들이 죽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조용히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바알이나 여호와는 무엇이었을까? 둘 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합과 그의 학교는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진리와 신앙의 모든 문제는 가볍게 여겨졌을 것이다. 거대하고 무의미한 미운 물건! 쾌락에 비참하게 빠져버린 아합! 이 세상의 자녀들의 감각주의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다. 아합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 두려운 종말을 기억하자. 그의 종말은 먹고 마시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개가 그의 피를 핥았더라." 그의 영혼에 관해서는, 아, 영원만이 그의 운명을 밝힐 것이다.

   이세벨에게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에너지와 사욕이다. 그에게 심각한 싸움이 있고 그녀는 결단을 내리기로 작정했다.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그때 선지자는 핍박의 폭풍을 인내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치상태에 있었다. 그의 길은 하나님과의 교통의 결과로 승리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보기에 태양은 기울고 있었고 그의 수평선은 어두워 보였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셍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엘리야의 영은 온통 낙심에 빠져있다. 그는 어두운 구름에 매몰된 채로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그가 보기에 그의 모든 노력은 무가치하고 헛되게 보여서 그는 앉아서 죽기만을 바란다. 그의 영은 안식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의 백성의 믿음을 회복시키려는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아서 그는 지쳤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조급함과 불신이 하는 일을 깨닫게 된다. 엘리야는 갈멜산에 섰을 때는 죽고 싶다는 것에 대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 거기에서는 무엇인가 성취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유용한 존재로 보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해야 될 일" 뿐만 아니라 "고난도 받아야할 것"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전자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후자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행동하는 종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참아내는 고난 받는 종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신다. 오랜 고난을 참을 수 있는 종을 통해서 나타나는 향기는 실행하는 종에게서의 향기만큼 향기롭다. 이 종은 마음이 거듭났어야 했다. 그러나 아, 그의 우울함과 실망함에서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주의 종들은 언젠가 옷을 벗고 무거운 짐을 벗고 싶어 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증거가 헛된 것 같고 그들 자신이 일터에서 방해가 되는 것 같을 때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고 그때까지 참고 불평하지 말고 계속 섬겨야 한다. 슬픔과 시련을 도피하는 것과 아버지 집에서 쉬기를 갈망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틀림없이 안식한다는 생각은 수고하는 사람에게는 특별히 즐거운 일이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신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다가오는 영광의 시대에 어린양께서 그의 양떼를 인도하시는 푸른 초장과 생수의 샘을 생각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한마디로 믿음의 눈에 나타나는 전체의 광경은 아름답고 격려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오 주님, 나의 생명을 거두어 주소서" 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 조급한 영혼만이 그러한 말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사도 바울의 고백과는 얼마나 다른가!  "내가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저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빌 1:23-25).

   이러한 고백은 참된 기독교 정신이다. 교회의 종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바울이 자신을 생각하면 그는 한시도 지상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를 생각할 때 앞날의 교회의 기쁨과 믿음을 위해서는 계속 머물기를 원했다. 엘리야도 이러한 마음을 품었어야 했다. 그는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남기를 원해야 했으나 그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불신의 영향으로 광야로 도피해서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고 그의 생명을 데려가기를 열망했다. 그것은 그의 신분 때문에 당하는 시련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 모두에서 우리는 귀중한 교훈을 배운다. 불신은 간증과 섬김의 위치에서 떠나게 한다. 엘리야는 오래 동안 믿음으로 살았고 섬김과 증거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이 둘을 포기하고 광야로 도피하고 말았다. 불신은 섬김에 합당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를 무익한 자로 여기게 한다. 믿음의 힘으로만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게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등을 돌리고 있을 때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다음 사실을 진리의 확고한 원칙으로 제시하는 바이다. 즉, 누군가 증거의 분명한 입장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그를 인도해온 진리에 대한 적극적인 불신에서 온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한 때 교회 안에서의  성령님의 임재를 배움으로 확실하고 뛰어난 위치를 차지한다. 이제 그 진리를 참으로 배우고 능력을 소유했을 때 그것은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권위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를 인정하고 지키는 조직으로부터 밖으로 인도한다.

   성령께서 교회를 다스리신다면, 그 때에 사람은 간섭할 권리가 없어진다. 또한 신조와 의식을 만들 권리도 없다. 신조를 만들고 의식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심히 방해하는 것이다. 이 진리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그의 믿음이 그의 행동에 틀림없이 영향을 줄 것이다. 그는 이 진리를 부인하고 분리하려는 모든 조직에 반대하기 위하여 부름 받았다고 생각하는 한 그러할 것이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로서 숙고할 일이다. 사람의 첫 임무는 "악을 그치는 것" 이고 다음은 "행동을 잘하는 것을 배우는 것" 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안다고 고백하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행한다고 고백한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진리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렸다. 그 결과로 그의 분명한 위치를 떠나서 그가 전에 머물렀던 조직으로 돌아갔다. 엘리야와 같이 그들은 모든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이 바라던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들은 그 장면에서 도피했고,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이 "족하니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 때는 교회를 존중하며 큰 기대와 애정을 가졌던 많은 사람이 이제는 슬픔과 낙심에 빠졌다. 교회에서 성령이 임재하시는 진리와 이와 병행하는 진리들을 알고 이를 근거로 행하겠다고 고백하던 사람들이 대개 그것을 계속 실행하는 데 실패했다.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그들은 매우 부끄러운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원수는 이 사실을 이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적은 이를 이용해서 특히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확실히 낙심시켰고, 지상에서 집합적으로 증거하는 모든 것에서 실패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절망하여 포기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여 이것을 주목하라. 엘리야를 광야로 도피하게 만든 것은 불신이었다. 교회에서 반드시 성령의 임재의 진리가 인도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책무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도 불신이다.

   그들이 후퇴하는 것은 하나님과 영원한 진리가 함께하는 것을 부인하고 사람과 환경이 함께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의 근거가 하나님의 진리라면 인간의 요동함이나 실패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실행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순수하고 최선이라 해도 실패할 수 있고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진리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교회의 일체성의 복된 교리를 고수하기로 선언한 사람들이 분열한다면,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섬김과 다스림을 위해서 성령 임재의 교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사람들의 권위를 의지한다면, 또한 인자의 나타남과 통치를 개인적으로 추구한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개인적으로 추구한다면 고백하는 자들이 열심히 이 세상의 것들을 추구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하늘의 원칙들을 파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진리는 끝까지 진리이다.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의 생각보다 천배나 더 불완전하다는 것이 증명되더라도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사용하는 데 실패해왔어도 이 때문에 절망하여 포기하기보다는 우리는 그 진리를 우주적인 황폐와 파선 중에도 우리 영혼의 유일한 거처라는 것을 확고히 붙잡아야 한다.

   엘리야가 갈멜산에 섰을 때 그의 영혼을 채웠던 진리를 고수했더라면,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 주저앉았거나, "나는 나의 조상들보다 못하오니 내 생명을 거두어 주소서" 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비롭게도 로뎀나무 아래에 잠든 그의 가련한 종을 만나주신다. 그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괴롭고 낙심된 화를 잘 내는 종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그에게 좀 더 힘내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먹이고 강하게 하신다. 이것은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영원히 그 이름을 찬양할지니,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다. 하나님의 방법과 생각은 우리와 같지 않다. 인간은 그의 동료를 거칠고 심하게 다루며 그를 이해하지 않고, 급하고 엄격하게 대한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분은 늘 깊은 동정과 온유함으로 대하신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해하셨고 그의 이름과 진리를 위하여 그가 최근에 당했던 그의 처지를 기억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울한 상태에 있는 그를 보살피셨다.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솣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 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왕상 19:5-8).

   주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요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그분은 그 요구를 평가하시고 은혜롭게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선지자는 슬퍼져서 잠자고 싶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를 힘주셔서 그의 미래에 섬기도록 돌보셨다. 겟세마네 동산의 제자들처럼 그들은 깊은 슬픔에 압도되었고, 그들의 간절한 소망이 실패한 것이 확실해서 그들은 깊은 잠에 빠졌다. 한편 복되신 그들의 주님께서는 그들이 허리를 동이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시련의 상황에 대비하기를 바라고 계셨다.

   그러나 엘리야는 먹고 마시고 힘을 얻어 호렙산으로 달려갔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참을성 없는 영혼의 슬픈 행적을 추적하려 한다. 엘리야는 섬기며 증거하는 그의 위치에서 은퇴하기로 결단한 것 같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잘 수 없다면 그는 동굴로 숨을 것이다.

   "엘리야가 그 곳 동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사람은 믿음으로 지켜야할 자기 위치를 일단 벗어나게 되면 막다른 데까지 갈 수밖에 없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사람이 섬김의 길을 유지하도록 할 수 없다. 그것은 믿음만이 사람이 끝까지 기다리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신은 주변의 환경만을 보게 해서 완전히 낙담시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