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의 친구들

율법으로 난 의와 믿음으로 난 의(롬9:30-10:8)

행복자 2020. 3. 30. 09:12

율법으로 난 의와 믿음으로 난 의(롬9:30-10:8)

    조준안 여주교회


롬9장 후반부에 이제까지 말한 것의 요약이요 9장 전체를 종합하고 결론을 끌어낸다. 9:30절의 요점은 의를 쫓지 않는 이방인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다. 이방인은 하나님과 바르게 되기를 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없이 악한 생활을 추구하고 우상을 섬겼다(롬1:18-32, 엡2:1-3).그들이 믿음을 얻었다는 것은 그들이 무관심과 흥미가 없었는데 바울의 전도를 통하여 이방인이 기뻐하고 돌아오게 된다(행13:48). 그런데 9:31절에 의의 법을 따른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 비극적이고 슬픈 대조를 보여준다. 여기 31절의 따른다는 말은 추구하고 열심히 쫓는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애를 쓰지만 도달하지 못하였다. 사도는 로마서 2장에서 이것을 진술하였고 산상수훈에서도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천국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하는 자가 된다(약2:10). 9:33절에 어찌하여 그러느냐? 그것은 31절에 나온 왜 유대인들이 의에 이르지 못하였는가?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1. 율법으로 난 의
민족적인 유대인들이 어찌하여 의에 이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의도가 무엇인가?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은 도덕법과 의식법과 사회법(민법)이 있었다. 이 민법은 십계명인 도덕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서 사회를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허락되었다. 실제 살인을 하거나 간음, 토색, 도적질 등을 하게 되면 구체적인 형벌과 보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정도의 법을 지키는 것을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덕법을 주신 것은 세가지 이유가 있다.
 
(1)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롬3:20, 7:7-8)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한 지식이 있다. 그러나 율법의 거울을 통하여 죄를 자기에게 명확히 해주기 전에는 죄의 참된 본질을 알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율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질병이 있을 때 MRI나 초음파를 통하여 찾아 내듯이 율법은 이런 기능을 하게 된다. 사람이 죄의 진정한 본질을 알게 되면 자기 영혼의 질병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그러한 이해를 가져다 주는 것은 율법의 독특한 기능이다. 교회사에 대부분의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전에 율법을 철저히 다루었다. 죄가 하나님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2) 율법은 죄의 성격을 드러내고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음을 깨닫게 한다.(롬4;15, 5:20, 7:8)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의도는 율법을 행하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거울을 통하여 죄의 깊이, 어리석음, 본질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율법이 없는 곳에 범함도 없다. 롬7:8절에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고 한다. 죄는 인간의 본성안에 역사하는 하나의 원리요 세력이다. 주님께서 마5장에서 살인, 간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신다. 행동의 차원이 아니라 탐심의 차원에서 율법을 설명하신다. 살인이란 무엇인가? 마음으로 누구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화를 내고 욕설을 하는 것이 살인이다. 간음도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이다.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런 죄성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아래 있다.
 
(3)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갈3:23-24)
율법은 안전한 항구로 영혼을 몰아치는 폭풍이다. 빛이 방에 들어오면 먼지나 더러운 것이 다 드러난다. 율법은 죄의 결과와 해악을 보여준다. 인간이 철저히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마땅히 되어야할 완전에 이르지 못한 부족함을 알게 하고 우리에게 중대한 필요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중대한 필요는 하나님의 은혜요 그리스도다.
로마서 10:2절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열심은 참된 열심히 아니다. 참된 열심과 거짓된 열심의 차이는 무엇인가? 첫째로 참된 열심은 올바른 지식을 따라야 한다. 사람의 인격은 이지와 감정과 의지로 되어있다. 열심과 행동은 의지의 영역이다. 그 자체만 있으면 안된다. 속담에 불은 좋은 종이나 나쁜 상관이 될 수 있다. 불이 통제될 때 유용하다. 그러나 불이 통제를 벗어나고 주인이 될 때 무서운 파괴력을 가져온다. 먼저 지성에 진리의 지식이 오고 그 다음에 열심히 와야 한다. 참된 열심은 하나님을 알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하여 움직인다. 복음진리가 먼저 오고 그다음 열심이 와야 한다. 세상모든 이단과 종교는 열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을 배제한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므로 마치 죄인이 의나 선으로 하나님앞에 서려는 것과 같다.
 
2. 믿음으로 난 의
 
(1) 올바른 지식과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롬10:3절에 하나님의 의는 2절의 올바른 지식과 관련되어 있다. 딤전2: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이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셨다. 이 진리를 알 때 영혼의 참 자유를 얻게 된다.(요8:32) 이 지식은 잘 검증되고 주의해서 얻는 지식이다. 어떤 교훈을 주의깊고 철저한 검증으로 얻은 확실한 지식이다. 유대인들은 이 지식이 없었다. 진리를 아는 정확한 지식은 구원에 있어서 진수적인 요소다. 오늘날 시대는 실존주의, 상대주의가 지배하므로 개인의 주관적 느낌이나 체험을 강조하므로 성경의 핵심 진리를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무엇을 가르치냐가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다. 복음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느낌이 아니다.
 
(2)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의가 없이는 구원받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이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율법을 범한 죄의 값을 다 지불하였다는 말이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성품을 보여준다. 그 하나님의 거룩앞에 죄인들은 그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한다. 그것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죗값을 십자가에 처형을 통하여 다 갚아주셨다는 말이다.(요1:29,19:30, 벧전2:24, 고후5:21, 히9:12) 그가 피흘리심으로 우리 모든 죄의 값을 지불해 주셨다. 둘째로 주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다.(시40:8, 마5:17-19, 롬3:31) 이 의의 혜택을 입을 사람은 모든 믿는 자라고 하였다.
 
(3) 율법과 그리스도와 믿음이 왜 걸림돌이 되었는가?
첫째로 율법은 지키라는 명령으로 주어졌지만 그것은 지킬수 없는 조건에 있는 죄인들에게 주어졌으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죄인됨과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해야 하는데 자기 의를 세우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오히려 그것이 거치는 반석이 된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넘어지는 돌이 된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이 걸림돌이 되었다. 주님이 이땅에 오신 방식과 탄생, 가난과 비천함, 구유에 출생하심 등이 유대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주님의 주장과 선포가 걸림돌이 되었다.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고 하나되신 신성을 말함으로써 유대인의 걸림돌이 되었다. 또한 주님이 하신 일 때문에 걸림돌이 되었다. 주님이 다윗왕처럼 군사, 정치, 경제, 찬란한 왕으로 오시지 않고 초라한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또한 주님께서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어가는 것이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와 다르므로 걸림돌이 되었다.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복음을 아는 우리들은 십자가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 셋째로 믿음이 걸림돌이 된 것은10:6-8절에서 너무 쉽고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방식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또한 오늘날 어느 누구도 복음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다. 복음이 명백히 밝혀졌기 때문이다.복음을 탐사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복음이 다 드러났고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발견하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갈 필요도 음부에 내려갈 영웅적인 행동을 취할 필요도 없다. 구원의 길이 불가능하지 않다. 우리편에서 어떤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