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전략] 전도의 5단계 진단 해설(5)
[전도전략]
전도의 5단계
진단 해설(5)
- 허 윤욱
2. 죄인
(1) 하나님 거역함이 악하고 무서운 것임을 깨우치기 위함
(1)의 항목을 조금 더 다룬다.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실제로 죗값을 받는 예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매우 좋다. 부모에게 잘못한 사람들이 망하는 경우가 사회에 허다하다. 전도자는 주변 사람들이 죗값을 치른 사연들을 알고 있으면 좋다. 아내에게나 자식에게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고 잘못하여 벌을 받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러한 것들이 다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벌을 받는 것이다. 중국의 공자도 하늘을 순종하는 자는 살아남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고 설파하였다. 온 세상은 하늘을 거역하는 길이 망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하늘을 거역하여 망한 자들의 이야기는 찾아보면 널려있다. 전도자들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발굴하여 전할 필요가 있다. 어찌되었든 양심을 거스르고 순리를 거스르는 자들의 장래는 잘 될 수 없다는 진실을 잘 전하여 구도자들의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거역하는 자들이 당장에는 잘 되는 듯해도 결국은 망하는 것이며, 또한 흥하는 듯해도 후세에 가서라도 집안이 망하는 결국을 수없이 보게 된다. 부모가 사람들에게 악하게 하여 자식들과 자손들을 망하게 한 집안도 수두룩하다. 따라서 당장은 잘 되어 보이나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도의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사 1:2).
(2)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깨우치기 위함
성경은 타락한 인생이 얼마나 더러운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깨닫게 함이 죄인을 전함에 중요한 목표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더러운 모습을 깨닫지 못하면 자신이 구제받아야 할 불쌍한 처지인지를 모른다. 일반으로 생각해도 몸이 더러워졌다고 여길 때 목욕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가. 집안이 더러워졌다고 여길 때 청소의 필요성을 깨닫듯이 죄인들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더러움을 알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인간의 더러움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 몇 가지 살펴본다.
첫째로 양심과 생각이 더러워졌음을 증거하고 있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20-23).
이 말씀에서의 핵심 포인트는 사람을 악하게 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더럽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죄들은 사람을 더럽게 하여 거룩한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게 한다. 전도자는 세상이 더러워지고 사람이 더럽게 행하는 것은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잘 설명하여 깨우쳐줄 필요가 있다. 예컨대 마음에 탐욕이 있으니 도적질을 한다는 것이다. 또 사람의 마음에는 음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을 통제하지 못하여 죄를 짓는다. 세상은 교육이나 훈련을 통하여 이 생각들을 통제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있다. 종교는 수많은 교리와 가르침과 무력적인 방법으로 더러운 생각들을 통제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악하고 더러운 생각이 밖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양심의 더러움은 곧 행동의 더러움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양심의 악을 깨닫고(히 10:22)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임을 생각할 때 이 부분을 깨우쳐줌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양심이 더러워진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하면 더럽고 불쌍한 죄인으로 살다가 멸망의 지옥에 산채로 던져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진실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또한 중요한 부분은 복음을 듣고 있는 당신만 더러운 것이 아니고 아담의 피를 받은 모든 인생이 더러워졌다는 것을 각성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자기에게만 더럽다 하면 자존심 상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상례다. 아담 이래로 양심이 더러워진 인생들에게는 소망이 없다. 그러므로 오직 양심의 죄악을 씻어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더러운 인생은 결국 거룩한 하나님 나라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는 매우 불행한 처지에 있음을 알게 함이 중요하다.
둘째로 행위가 더러워져 있음이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 1:4).
지금 세상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기가 막힌 세상이다. 자유라는 이름을 빙자한 방종으로 말미암아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더러운 죄를 지어도 죄라고 하지 않는다. 인권이라고 하는 편리한 방법으로 죄를 합법화시킨다. 최근의 간통죄 폐지가 그 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하나님이 죄라고 규정한 행동을 사람들이 인권이라고 하는 커튼으로 가려 버리고 있다. 전도자는 이것이 사회현상이기에 죄를 잘 증명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간통죄를 분석하여 보자. 죄의 특징은 다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준다. 폭력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드러난 죄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간통죄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가? 실제로 상대에게 정신적 피해를 주고 그로 인하여 자살을 비롯하여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이혼하는 경우도 많으며 그로 인하여 자녀들의 방황이 시작되며 가정은 파탄의 길을 걷는다. 방황하는 자녀들로 인하여 사회문제가 심각하다. 실제가 이러한데도 간통은 죄가 아니라고 이 나라는 결정했다.
이 시대에 죄가 일반화되어 사람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슬픈 시대가 되었다. 성도들이 경건하게 살기가 너무 힘든 시대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더러움을 더럽게 여기지 않는 현실이 전도자들을 고뇌하게 한다. 따라서 전도자들은 더욱 죄를 지적하는데 지혜와 영력을 구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눈에 더러운 모습이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욥 25:4-6).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 전도자들은 이것을 강조하여 증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판단하고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후하고 남에게는 냉정하여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죄인이라 할지라도 남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또 죄인이되 지옥 갈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도자는 하나님이 심판자이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증언해야 한다. 욥기의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강조하고 있다. 판사 앞에서 범죄 혐의자가 아무리 자기는 깨끗하다고 주장해도 판사가 보기에 죄인이면 피할 수 없다. 세상 재판의 원리가 그러하지 아니한가. 하나님 앞에서 유죄 판정이면 멸망의 지옥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앞서 본 욥기 25장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구더기 같은 죄인이라고 하고 있다. 거룩하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구더기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재래식 화장실의 구더기는 얼마나 더러운가. 아무 가치도 없다. 냄새가 하늘을 찌르는 더러운 구더기다. 더러워서 쳐다보기도 싫은 구더기다.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냥 죽여 없애버릴 수밖에 없는 구더기 죄인이다. 구더기는 결국 파리로 바뀌지만, 파리 또한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사람들에게 더러운 병균을 옮겨 병을 유발시킬 위험만 소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나님의 눈에는 사람이 이렇게 비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도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가를 알려주어야 한다. 두려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에 떨어지되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불쌍한 죄인이다. 죄인들이 판사 앞에서 떨면서 두려워하듯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서워 벌벌 떨어야 하는데 알지 못하고 있다.
구더기는 더러운 화장실이 가장 살기 좋은 호텔이다. 인간들도 더러운 세상에서 더럽게 살면서 그것을 가장 즐겁고 좋은 호텔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화장실은 구더기의 낙원이다. 죄인들도 썩고 타락하고 더러운 세상이 살기 좋은 낙원이다. 육체의 쾌락을 즐기고 더러운 삶을 즐기는 인생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이다. 더러움은 더러움을 좋아한다. 죄인들이 세상을 좋아하는 이유다. 저들은 빛 가운데로 나오기를 거부하니 이는 자기의 더러움이 드러날까 함이다(요 3:19-20). 전도자는 죄가 얼마나 더러운 모습으로 그 자신들을 만들어 놓고 있는지 그들이 죄인임을 증거하여 깨닫게 함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18-19).
그리스도 안에서나 밖에서나 이것은 사람의 본질이다.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하나님으로 출발한 인간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선을 행할 힘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 앞에서 무능하다. 죄를 거부할 능력이 전혀 없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전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세상은 사람에게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인본주의다. 그러나 인간이 노력해서 되는 일이 있고, 될 수 없는 일이 있다. 인간은 죄를 거부하고자 하는 소원은 있으나 거부할 능력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아담의 실패 후에 인간은 계속적으로 실패의 역사를 써오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죄 앞에서 얼마나 무능한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죄에 끌려오는 역사다. 죄인들이 구원받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자신이 스스로 죄와 싸울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나올 수 없음을 알 때 구조를 요청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찬송가에도 죄에 매여 죽을 인생이라고 쓰고 있다. 구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도 그렇다. 살아나올 수 없는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죄인들에게 자신이 스스로 죄에서 탈출 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죄인이 자신의 무능을 알면 겸손해지고 그래서 구원을 요청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자신이 구원을 요청하는 수준까지 되지 못하면 참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차원이 아니면 필자는 대부분 복음을 풀지 않는다.
구원은 자동차 없는 사람이 만약을 대비하여 면허를 따 두는 것과는 다르다. 구원은 천국 가는 자격증을 얻는 것이, 만약을 대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분명코 알아야 한다. 내가 구원받지 못하면 죗값을 받으러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무능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죄 앞에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죄인이니 어찌 할꼬 하는 통곡과 탄식으로 하나님앞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복음전도에서 죄인임을 전하는 목표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바 죄인임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 구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대단이 중요한 전도자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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