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되새김] 자 아

행복자 2020. 5. 10. 09:30

[되새김]


                                                                       자 아


                                                                                                                                                      - 마일즈 스텐포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자아 생명을 드러내주신다는 점입니다. 자아는 육신적이고, 자연에서 난 육신적인 생명이며, 첫째 아담의 생명입니다. 그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으며" (엡 2:1),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부패해 있고(갈 5:19-21), 하나님의 시야에서 볼 때 그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생명(롬 7:18) 입니다. 영적인 원리들이 여기서만큼 큰 의미를 갖는 부분은 없습니다. "네 자신을 알라"고 말한 플라톤은 그가 아는 것보다 더 맞게 말했지만 사실은 절반 정도만 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갈 2:20)라고 말한 바울의 말이 참으로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에 관해 단지 아는 것을 넘어서서 주님께 대한 개인적인 앎과 사귐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성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경험적인 계시를 사용하십니다.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아니요"를 먼저 배우고 나서 그 다음에 "그리스도라"를 배우게 됩니다. 먼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이고 그 다음에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나니" (요 12:24)입니다. 그리고 먼저 "항상 죽음에 넘기움은" 이고 그 다음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입니. 섬김에 있어서는 먼저"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이고 그 다음에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고후 4:12)입니다. 모든 부활생명은 사망으로부터 솟아나오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부활생명 곧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이 아닐 것입니다(롬 6:5-6을 참조할 것).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롬6:13).

   요새 몇 년 동안에 전도현장에서는 '헌신'으로 알려진 회심이 주도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것을 통해서는 영적 생명을 탄생시키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생명이 태어난 흔적이 조금이라도 보일 때에는 하루 밤 사이에 활짝 꽃을 피우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그런 초신자들이 열정적이고 밝은 성격을 바탕으로 분주한 봉사에 성급하게 뛰어들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이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종류의 일에 나타나는 비극은 자아가 평안함을 느끼고 뜨겁게 달아올라 번성하게 됨으로써 결국 자아의 참된 정체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잎사귀와 꽃들이 구분하기 힘든 모습으로 뒤엉켜 있게 됩니다.

   반면에,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하나님을 향한 회개가 바탕이 되는 경우라면 영적 출생은 건강하게 이루어지는데, 이때 생명은 구주되신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분명하고 강력하게 시작됩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는 애석하게도 내면에서 자신을 자기중심성, 세상, 율법의 규칙, 죄로 끌고 가는 요소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의 삶에서 자신의 전적인 죄악성과 자아의 다스리는 권세를 쓰라리게 경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아는 출생단계를 지나 주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으로 아는 성장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빌 1:21). 내면 깊숙이에 있는 끔찍한 자아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으로 알기 전까지는 우리는 결코 주 예수님을 참으로 자신의 생명으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래 전, 영적인 삶 수양회(Spiritual Life Conference)에서 스코필드(C. L. Scofield)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로마서 7장에 있는 것과 같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할 수 없고 옳은 것을 하고자 원하지만 그것을 행할 수 없는 자신을 보게 되는 갈등과 고뇌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로마서 7장으로 들어가 갈등과 패배의 끔찍한 고뇌를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큰 복이다. 왜냐하면 7장의 투쟁에서 빠져나와 8장의 승리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는 바로 7장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승리를 향한 고뇌와 갈등을 쓰라리게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라 갈등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승리도 없으며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게 속한 모든 소유들을 거의 누리지 못하는 데도 그저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멧카프(J. C. Metcalfe)도 동일한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성령께서 분명히 함께 하시는 이 필요한 탐사여행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많은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본성적인 죄악을 보게 될 때 거의 회복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죄들이 용서받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실에 대해 크게 기뻐했으나, 이내 모든 것이 좋지만은 않다고 느끼게 되고, 처음에 회심할 때 자신이 세워놓았던 높은 기준에서  떨어져 실패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는 바울이 생생하게 묘사한 대로 "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

   ...그리고, 그 결과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에서 바닥이 무너져 내린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고, 아마도 마귀가 자신에게 너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계속 나아가 봐야 소용없는 짓이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이런 상태가 사실은 얼마나 건강한 경험인지, 그리고 이런 흔들리는 경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부요를 위해 계획하신 것들을 발견해 가는 놀라운 일에 대한 서막이라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의 모든 생애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철저한 죄악됨과 궁핍함을 보여주신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관한 깨달음보다 먼저 찾아옵니다. 이것은 영적 출생과 영적 성장 모두에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갈등과 실패를 통과해 가는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주의 깊고 사랑스럽게 매우 개인적인 방법으로 다루십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의 경험을 수년간 통과해가면서 자아의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빌 3:10) 삶을 위한 유일한 기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설을 통해 일하십니다. 즉 성공은 실패를 통해 찾아오고, 생명은 죽음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무너져야 하는 그 유일한 요소(자아)는 제거되어야 하지만, 새로운 생명은 결코 해를 입거나 영향 받지 않습니다. 이러한 붕괴 현상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힘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스스로 계획할 수도 없습니다. 자아는 자아를 쫓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의 긍휼하심에 의해 절망적이고도 총체적인 실패로 인도받게 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고후 4:11).

   성령께서 이를 위해 흔히 사용하시는 수단들에는 구원받지 않은 배우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건강상의 어려움일 수도 있고, 때로는 심지어 건강의 양호함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가장 나쁜 것을 끄집어내시고 종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갈 2:20)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도록 하시려고 수천 가지 수단들, 사실상 모든 것을 사용하십니다(롬 8:28-29). 주변의 사람들이나 환경들 자체는 결코 실패의 이유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이나 환경들에 대한 자아의 반응이 바로 실패의 원인이고,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다. 어린 회심자들에게는 충만한 기쁨이 있긴 하지만, 육신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솔함이 자주 발견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확신에 차서 하나님의 은혜를 취하긴 하지만, 자아에 대한 불신, 즉 연약함에 대한 인식이나 하나님께 대한 의존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로 인해 그들은 연속적인 실패를 피할 수 없게 되고, 그러면서 그들은 육신 안에는 전적인 연약과 무능력함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로 인식하게 된다." (C. A. Coates).


   에반 홉킨스(Evan Hopkins)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 중요한 빛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자아는 나타나는 형태는 얼마나 무한한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자아가 선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신의 뛰어남에 대해 뿌듯해 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자아가 나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아를 개선시키기를 소망하면서 자신들의 불완전함에 대해 슬퍼하고 육신과 싸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쯤 자아는 개선시킬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악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까?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위로 올라가는 우리의 경험은 자아를 종식시키는 아래에서의 경험에 정확히 비례한다. 이것은 죄에 대해 자신이 연약하다고 여기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보다 더 낮다. 그렇다면, 자신이 죄에 대해 죽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뜻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이것보다도 더 낮다. 이것은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는 것'(롬 6:11)을 의미한다. ...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매우 연약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이 함축하는 바를 아는가?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그래도 약간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죽게 되면 그에게는 어떠한 힘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을 기초로 행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찾아오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과 관련된 어려움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장 낮은 자리를 취할 것이고, 그러한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로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십자가의 부활 측면에 우리의 자리를 취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옛 자아 생명을 뒤에 남겨두고 새 그리스도 생명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바르게 말했습니다.


   "...'세상과 분리되긴' 했지만 '자신과는 분리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