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편지] 길은 어디에 - 길을 찾는 구도자
[복음 편지]
길은 어디에
-길을 찾는 구도자
- 차 광선
"끝없는 세상의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로 시작되는 타고르의 시 "바닷가의 아이들" 은 우리를 팔월의 바다로 안내합니다. 모래로 집을 짓고, 조가비로 놀이하며, 마른 해초로 배를 만들어 띄우고, 소리치며 춤추어 뛰노는 아이들의 바다! 하늘에는 폭풍이 일고, 먼 바다 어디쯤에는 배가 난파되어 가는 어른들의 세계에는 탐욕에 젖은 다툼과 배신 그리고 거짓이 난무하지만, 바닷가에 모인 아이들에게는 시원의 순수와 청명한 빛과 파란 희망이 있습니다. 문득 그 바다가 그리워집니다.
오 선생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마른장마 끝에 제법 빗줄기가 굵게 뿌렸습니다. 무더위가 무례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마당에 어느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한 장애아를 집단 따돌림하고 폭행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니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또한, 스크랩 된 신문 조각을 정리하다가 몇 해 전에 미국에서 한 초등생이 권총으로 자신의 교실에서 발포하여 몇몇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어른들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었던 폭력성이 어느 덧 아이들의 세계를 점령했다고 생각하니, 우리 세대는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더 이상 동심의 울타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방파제 같은 역할을 다하려 온 힘을 다하시는 교사들에 대한 소식도 있어 조금이나마 안도하게 됩니다.
어느 야생 생태계 관련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룩말 하나가 길을 잘못 들어 수렁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수렁 표면은 다른 지표면처럼 마른 땅처럼 보였습니다. 수렁에 발을 딛는 순간 얼룩말은 돌이킬 시간도 얻지 못하고 수렁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게 빠져들 뿐이었습니다. 얼룩말은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는 결코 되돌아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서히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얼룩말. 마침내 그것을 삼켜버린 수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평한 지면의 형테로 돌아와 다음 희생물을 기다리는 듯했습니다. 아귀처럼 은신한 채 희생자를 기다리고 있는, 조용하고 은밀한 죽음의 '수렁.'
그 장면은 죄의 망망한 바다에서 표류하며 서서히 죽어가는 인생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노력하고 애쓰지만 그것이 죽음을 재촉하는 허무한 몸짓일 뿐 그 죽음의 심연으로부터 빠져나가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죄인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을 통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 왔다. 그 결과 그 모든 후손이 죄인들이 되었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한 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하신바 되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이 성경말씀에 대하여 마음에 큰 불쾌감과 반발심과 적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현대 교양에서 크게 동떨어진 말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고 있는 사람에게, 암이 생겨 급속도로 전이되고 있으니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진단과 소견에 대해 기분 상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스인(흑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 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예레미야 13:23).
하나님을 등지고 불순종의 길로 떠난 순간부터 사망이 시작되었는데,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죄인이게는 죄를 없이할 능력도 방법도 전무하다는 사실입니다.
흑인은 자신의 피부색을 그 어떤 방법으로도 희게 만들 수 없습니다. 선한 일에 목숨을 걸고 간절히 소원해도 불가능합니다. 굳게 결심하고 결의를 다진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표범이 자신의 몸에 나타나 있는 반점이 사라지도록 만들 수 없습니다.표범이 어떤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겠으며, 어떤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방도로 태어나는 새끼들에게 그 반점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죄인들이 죄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게 되고 선을 행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전자가 불가능한 것처럼 후자는 더 불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양심은 피조물로서 창조자 하나님을 의식하고,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인식하게 만듭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느끼거나 깨닫지 못해도 내면의 심령 깊숙한 곳에서는 죄를 씻어내고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자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죄를 사랑하고 죄를 탐닉하는 성향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닮은 자로 창조된 존재이기에 창조자처럼 거룩하고 깨끗하게 되고 싶어 하는 영혼의 소원이 있습니다. 어떤 노력,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죄로부터 자유롭고 순수해지고 싶은 내적 소원이 있지만 그런 소원은 죄의 세력에 의해 종종 묵살되고 잊히고 맙니다.
그러나 결심하고 뜻을 세우고 비장한 각오를 해서 어떤 방편을 동원하고 수단을 사용한다 해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한 터럭의 죄를 털어낼 수 없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고, 행악의 종자이며, 마귀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해 주고 있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검은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표범이 제 몸의 반점을 없애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이 자기 죄를 스스로 없앨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느니라" (예레미야 2:22).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여 그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하여도 하나님 앞에 그 무서운 죄를 조금도 없앨 수 없으며,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감지하고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자 사람들이 그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해서 종교를 이루고 구도의 행진을 시작합니다. 진심으로 하기만 하면 되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되며, 선하게 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과 믿음으로 각종 종교행위를 고안해 내었으며 그렇게 하여 언젠가 죄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잿물로도, 비누로도 그 어떤 방편으로도 변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수고에 수고를 더하고, 애씀에 애씀을 더하여도 선에 이를 수 없고,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모든수고는 헛되고 허무할 따름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첨단 문명을 이루어낸 것처럼 죄로부터 해방되는 구원의 문제도 종교적인 열심과 정진을 통하여 이룰 수 있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구도의 길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둥병에 감염되면 감각을 상실하는 것처럼 죄로 감염된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에게는 아무 능력도 방법도 길도 없습니다. 이것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게 나타난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불순종으로 죄의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여줍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않겠느냐" (에스겔 18:23).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4).
"사랑하는 자들아,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8-9).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것을 원치 않으시고 구원 받아 진리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모두 다 회개하여 돌아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빛 되신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싫어하였고(요한복음 3:19-21),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였으며(로마서 1:28),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도자들을 통해서 부르고 또 부르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부를수록 점점 더 하나님을 멀리하며 허무하고 무능한 우상으로 달려갈 뿐이었습니다(호세아 11:2).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된 인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그 역사를 성실하게 진행하여 오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인은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설혹 잊는 일이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이사야 49:15).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셔서 어떻게 성실하게 일해오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 나뭇잎 옷과 가죽옷(창세기 3:7, 21절).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결과 죄의 어두운 증상들이 즉시 나타났습니다. 두려움, 수치, 미움... 벌거벗은 사실이 부끄러움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엮어 입었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그들은 계속해서 부질없이 나뭇잎으로 치마를 엮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끊임없이 반복될 일이었습니다.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죄 문제를 사람의 힘으로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세기 3:21).
두려움과 수치를 제거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2.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창세기 3:4-5)
아담은 그 아들들에게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나아가 무엇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가인은 최선을 다하여 지은 농산물로 제사를 드렸으나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은 아버지 아담의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순종하였습니다. 아벨은 자신에게 있는 양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용서를 받는 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3. 노아의 방주(창세기 6-8장)
세상에 죄악이 가득해졌고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작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노아는 방주를 지었습니다. 장방형의 배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계획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때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사람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장차 임할 심판과 의를 전했지만 귀기울여 듣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노아의 식구 8명만이 순종하여 방주로 들어가서 홍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4. 유월절(출애굽기 12장)
사백여 년간 이스라엘은 애굽(이집트)에서 혹독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끝없는 강제노역, 그리고 죽음, 하나님께서 모세를 일으키셔서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의 지시에 따라 양을 준비하였습니다. 정해진 날, 그들은 양을 잡아 피를 그 집 기둥과 인방에 발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피를 발랐습니다. 이 피가 발려진 곳은 죽음과 심판의 천사가 넘어갔습니다(유월). 그 피가 없는 집마다 맏아들과 짐승의 첫 새끼가 다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때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절기로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죽음을 피하게 하는 길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5. 만나(출애굽기 16:3)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넜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불신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간 머물러야 했습니다. 파종도 할 수 없고 수확도 할 수 없는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 양식인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하늘에서 이슬처럼 내려 하얀 씨앗처럼 쌓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양식 삼아 살았습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양식을 얻을 수 없는 그 황막한 땅에서 만나는 영원한 생명 양식이 오직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영원히 주리지 않게 하는 생명 양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6. 십계명(출애굽기 20장)
광야에 머무는 동안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그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완전한 계명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 확인될 뿐이었습니다. 참되고 영원한 사랑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7. 성막과 제사(출애굽기 26장, 29장)
하나님의 산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께서 성막의 구조와 만드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고 화목을 이루며 영광을 돌리는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하게 되는 방법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화목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8. 구리 뱀(민수기 21:8-9)
백성들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을 때 독사에 물려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게 매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마다 치료되어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상식과 치료방법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라봄으로써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라는 무서운 병에서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9. 붉은 줄(여호수아 2:18, 6:25)
여리고 성의 한 가련한 여인 라합은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을 때 그녀는 죽음을 무릅쓰고 두 사람의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부터 안전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들어올 때 창 밖에 붉은 줄을 매달아서 표시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약속대로 성이 함락될 때 라합과 그의 가족은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붉은 줄은 믿음과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죄인을 살리는 생명의 언약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10. 도피성(민수기 35:9-15; 여호수아 20장)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곳곳에 도피성을 설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고한 죄인이 그곳에 피신하여 안전을 도모하도록 하셨습니다.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죽음으로부터 안전했습니다. 그곳은 긍휼의 장소였으며 속죄의 장소였습니다. 은혜의 장소였습니다. 죄와 사망의 위협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일관되게, 그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인생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사망과 어둠뿐입니다. 하나님을 저버린 구도자의 길은 허무와 절망뿐입니다.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생 중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세력 앞에 무기력할 뿐입니다. 수렁에 빠져 있는 상태와 같이. 모든 수고와 모든 애씀이 무위로 돌아가고 마는 수렁 같은 인생.
참 자유와 용서와 화목과 사랑과 생명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또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거친 인생의 험한 바다 위에서 표류하다가 서서히 그리고 마침내 사망과 어둠의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야 말 우리 인생들이 찾아야할 길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 뿐입니다.
오 선생님, 날씨도 더운데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이 팔 월에 누구의 노래처럼 꿈에서 조차 잊을 수 없는 '고향 바다'로의 피서도 좋을 듯싶습니다. 그 바닷가엔 언제나 천상의 웃음으로 뛰놀며 노래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될 테니까요.
오 선생님,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깨닫게 되는 바다여행이 되면 좋겠습니다. 폭염의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평안하세요.*
2015년 8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