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심판대'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5.08.17 갈라디아서- 제11과 권면의 원리
  2. 2015.01.27 로마서 - 11과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
  3. 2013.02.2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갈라디아서


                        제 11 과

                            권면의 원리(5:26-6:10)


   바울은 수신자들에게 성령으로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성령에 충만한 삶에 대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할 것의 실제적인 몇가지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5:26 (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취하지 말아야 할 세가지 태도는 자만, 격동, 투기입니다. 율법 아래 사는 사람은 종종 그들의 하찮은 업적으로 교만해지며, 그들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이에 반하여 재능이 별로 없는 사람이나 약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한 모든 태도들은 은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깁니다. 율법준수자는 잘못된 영광을 구합니다. 참으로 큰 자는 무시받는 사람들을 섬기는 자이고 보이지 않게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개선되어야 할 세가지 습관(6:1-10)


   1. 범죄한 자를 바로잡음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에 범죄한 신자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범죄자를 심판함으로 꾸짖어야 하지만 이것은 율법과는 뚜렷이 대조됩니다.

   범죄한 일이 드러났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범죄에 놀랐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기 보다는 어떤 범죄 행위에 연루된 사람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신령한 사람들에 의해 다루어지게 됩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은 무정하고, 냉정한 태도로, 이롭게 하기보다는 더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범죄한 사람도 주님과 접하고 있지 않은 사람의 훈계는 받기를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이 구절은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하게 합니다. 만일 참으로 신령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신령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신령한 사람들은 그들의 부족함을  가장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만일 그러한 일을 한다면  신령한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렇다면 누가 바로잡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겸양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그 답은 이렇습니다. 참으로 신령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상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죄한 사람을 바로잡기 원하는 돌아보는 목자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교만하거나 우월한 심령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유혹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온유한 심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 이라는 단어는 실패, 유혹, 시험, 시련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근심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형제에 대해, 거리를 두고 비판하면서 가까이 하지 않기 보다는 곁으로 다가가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를 돕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율법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모세의 율법은 순종에 대해 생명을 약속했지만 순종할 아무 능력도 주지 않았으며, 형벌에 대한 두려움 만이 순종하도록 권할 뿐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법은 이미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교훈입니다. 신자들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 교훈을 지킬 수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동기입니다

6: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우리는 모두 동일하게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제의 죄를 보게 되면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우수하다는 이상심리는 자기기만의 한 형태입니다.

6:4 (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이 구절은 만족을 위한 이유를 찾으려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습관에 대해 경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시험될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패 보다는 자신의 일로 인해 자랑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 주의해야 합니다.

6:5 (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처음 볼 때, 이 구절은 2절과 모순되게 보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원어로는 2절에서 번역된 "짐" 이라는 단어와 5절의 단어는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생에서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과 문제들을 함께 하라고 가르칩니다. 5절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자기 자신의 책임의 짐을 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 대한 부양


6:6 (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을 부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하라" 는 것은 그들이 기도와 경건한 열심을 유지하도록 생활에 대한 물질적인 것을 그들과 나누라는 의미입니다.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비록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계시며 그에 따라 거두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심은대로 거두며, 우리가 심은 것보다 여러 배로 거두게 됩니다. 농부가 밀을 심으면 밀을 거두는데 때로 삼십배, 육십배 또는 백배로 거둡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성령님은 여기에서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그들의 천한 행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라고 평했습니다.

6:8 (자기의 육체를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비록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이 일반적인 진리이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베풀도록 권하는 것임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해 우리가 자기의 돈을 자기를 위해, 자기의 쾌락과 안락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육체를 심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심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돈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은 사람들은 그들이 더 늙어지면 쾌락을 위해 살았던 그 육체가 쇠퇴하여 죽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바로 이 땅위에서 실망과 패배를 거두는 것입니다. 이제 그때가 되면 그들은 영원한 상급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은 사람은 성령으로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영생을 두가지로 사용하였습니다 (1)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신분으로(요 3:36) (2) 이 땅위에서의 신자의 삶이 끝났을 때 그가 받을 것으로(롬 6:22)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심은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영생을 어느정도 누립니다. 그리고 그에 동반된 신실함에 대한 상급을 그들이 하늘 본향에 이르게 될 때 거두게 될 것입니다.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어떠한 사람도 낙심하지 않기 위해 바울은 수신자들에게 즉시는 아닐 지라도 어떤 상급이 있을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씨를 뿌린 다음날 밭에서 추수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영역에서도 신실하게 뿌린 것에 따라서 적당한 시기에 확실히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3.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함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믿음의 가정은 교파나 교단에 관계없이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신자들에게만 제한하여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특별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틀렛은 " 이 권고의 명확한 강조에 주의하라. 그것은 얼마나 조금 해를 끼쳤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선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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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과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

                                                        (14장 1절 ~ 15장 13절)


   그리스도인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실을 매일의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내야만 하는가?  (2)


   8. 연약한 형제에 대한 관대함(14:1~ 15:13절)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두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 곧 믿음이 약한 자와 믿음이 강한 자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약한 형제는 어떤 음식에 대해서는 먹기를 삼가고, 또 어떤 날은 특히 중요하게 여겨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이런 사람은 원래 유대교의 배경을 지녔던 사람으로 구원받은 후에도 계속 유대교의 신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믿음이 강한 형제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있어서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건전한 음식이면 무엇이든지 다 먹을 수 있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력에 얽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을 때, 그것이 교회에 분쟁의 여지가 있을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사랑의 관대함을 가질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권면한 후에 전체적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원리는 단지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만 국한 되어 있을 뿐 그 원리들이 성경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 교리나 의무에는 적용되어서는 안됩니.)


   1) 강한 자에게 : 그대는 약한 형제를 그대의 친교에 영접하되 그를 비판할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1절) 또한 그대는 약한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2) 약한 자에게 : 강한 형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를 영접하셨습니다(3절).

   그는 하나님의 종이므로 하나님앞에 책임이 있습니다(4절).

   그대는 그의 태도 때문에 그가 죄 가운데 빠지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4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3) 강한 자와 약한 자에게 : 도덕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각기 마음에 확증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니 우리의 모든 행실은 그를 기쁘시게 할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5~9절)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 대 앞에 설 때,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직접 고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10~13절).


   다른 사람에게 거칠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13~15절).

   첫째,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둘째, 만약 우리가 어떤 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이는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우리의 참된 사랑을 보이지 않은 것이 됩니다. 셋째, 그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위하여 죽으신 자들을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들이 낙심하여 신앙생활에 발전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해야 될 것입니다(16~18절). 참으로 가치있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영적인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다음과 같은 두가지 표본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행함이 화평을 이루고 있는가? 또 덕이 되는 일인가? (19~23). 만약 우리가 이 표본들을 좇는다면

   첫째, 다른 성도들의 생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거역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형제를 실족케 하거나 망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교만한 마음으로 우리의 자유함을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넷째, 우리의 양심이 정죄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보다는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하십시오(15:2~6). 구주께서도 자신을 기쁘시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발자취를 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받읍시다(7~13절).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를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약한 자와 강한 자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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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 15:5).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지' 란 말은 그리스도인을 일컫는 신약성경의 많은 칭호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약교회 진리 안에서도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신분을 가장 잘 표현한 말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이 '가지' 라는 칭호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묵상해볼 만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나무에 붙어 있는 생명 있는 가지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자라야합니다. 생명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성장하지 않는 가지는 죽은 가지입니다. 또 만일 가지가 살아있긴 하지만 자라지 않는다면 이는 어딘가 잘못된 기형적인 가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믿음에도, 믿음의 삶에도 또 말씀을 먹고 분별하는 깊이에도 항상 성장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성장이 없는 가지가 기형이듯이 성장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기형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만심 곧 교만입니다. 자만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신앙의 건전한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자만심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대개가 거의 처음 그리스도인으로 들어올 때의 영적으로 어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로 오랜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생명에 자양분이되고 생명을 양육시킬 수 있는 생명의 진리의 말씀에 눈을 감고 귀를 막습니다. 나아가 다른 앞선 성도들의 경험이나 가르침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도 스스로 높은 수준의 성숙한 신앙 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서들을 읽을 때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어떻게 성장하였으며 어떻게 꽃을 피웠으며,어떻게 발전하였는가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중이라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자로서의 전도의 일을 시작한 초기에 쓴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주로 주의 오심에 대한 성도들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쓰여 졋습니다. 그렇지만 비교적 그의 심오한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복음(福音)에 관한 진리(眞理)나 신약의 교회의 본질인 그리스도와의 한 몸 연합에 관한 신약교회진리(敎會眞理)등의 진리체계와 그 실행 등에 대하여는 충분히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3차 전도여행 중에 이신칭의(以信稱義)에 관한 심오한 진리체계를 로마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도 생활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옥중에서 쓴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같은 책에서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감추어진 비밀인 그리스도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敎會)에 대하여 가장 심오한 진리체계인 신약교회진리(新約敎會眞理)가운데서도 핵심 진리인 한몸 연합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진리를 잘 기록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지혜와 그 키가 자라났듯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키도 자라나야합니다(눅2:52).

둘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나무의 본분은 열매를 맺는 것인데, 그 열매는 몸 된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에서 잘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잘 붙어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할 때 그 때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잘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갈5:22-23).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 주인에게 열매를 제공해주지 못하고 버림받는 미운 가지와 같은 삶을 사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는 자로, 한 몸 지체로, 형제의 우애가 있고, 형제 사랑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온전한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포도나무인 그리스도의 몸에 잘 붙어 있음으로 인해서, 가지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타난 우리의 잘 익은 성령의 열매로서 판단을 받기 때문입니다(마7:16).

셋째,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도 살다가 겨울이 오면 죽음과도 같은 시련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가 나무에 튼튼하게 잘 붙어 있는 한 시련의 겨울은 결국은 지나가고 맙니다. 그리고 어느덧 다시 봄이 찾아오게 되면 끝까지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는 또다시 움을 틔우는 것입니다. 끝까지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는 봄이 되면 마침내 푸른 잎을 내놓습니다. 여름엔 녹음을, 드디어 가을엔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렇지만 겨울이라는 세파와 환란과 역경과 핍박에 부딛치면 가지는 벌거벗은 채 마치 죽음과 같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서도 살아있는 나무에 잘 붙어 있는 살아 있는 가지는 자신의 앙상한 삶에서 또다시 열매를 맺는 풍요로운 삶으로 옮겨집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온전히 연합된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포도나무에 온전히 잘 붙어 있는 포도나무의 가지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온전히 연합된 그리스도인은 포도나무 가지처럼 죽음 같은 시련을 겪을지라도 그 몸의 머리 되시는 주님께로부터 사랑으로 돌보심을 받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어떠한 무서운 세파에서도 온전히 보존되는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 같은 시련을 겪고 있을 때, 땅에서 우리와 동일한 시련을 체휼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동일한 고통을 느끼시며 우리를 위해 중보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잎을 모조리 떨어뜨리고 거무스름한 빛깔로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앙상한 가지들의 모습은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절이 지나 봄이 오면 그 몸통의 뿌리로부터 수액과 자양분을 풍성히 공급받음으로 그 앙상했던 가지들이 생명이 온전히 보전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 또한 하나님의 섭리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자이므로 삶에서 죽음 같은 겨울이 오나 머리되신 주님의 보호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자로서 영원히 안전한 자들임을 또한 믿습니다.

넷째, 나무에 잘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나무에서 떨어질 때 곧 죽습니다. 가지는 나무에서 생명의 원천을 찾습니다. 그래서 나무에서 떨어지면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원천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라는 성장의 능력도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착한 행실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능력 또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 살 수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교제권에서는 떨어 나가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교회의 교제권 밖에서 살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면, 이때의 그리스도인은 가지가 나무로부터 수액과 자양분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거의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되어 믿는 자로서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나무에 잘 붙어있어 열매를 많이 맺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나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현재의 삶을 살 수 있는 생명과 힘을 얻는 자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그날에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로부터 풍성한 상을 기대하며 이 놀라운 주님의 오심을 참 유일한 소망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붙어 있어야지만 살수가 있으며 그리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MM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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