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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05 구원의 확신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 제9장 생각해볼 문제들(1)

    구원 확신

                                         갈망하는 이들에게

                                                                  H. A. 아이언사이드


                                              제9장

                               생각해볼 문제들(1)


   이어서 우리가 구원을 온전히 확신하며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의문점 내지 반론들은 확신을 갈망하는 이들이 거듭해서 나에게 물어온 것들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단순한 생명의 길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문제들 중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안에 설명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만일 당신이 마음과 양심에 안식을 얻지 못했다면 아마 당신이 안고 있는 문제가 여기서 설명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 내가 충분히 회개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종종 회개의 의미를 오해한데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회개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 용어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참회 즉 죄를 슬퍼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또 죄를 다소간 보상해보려는 고행이나, 죄에서 돌이키는 개선과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회개란 죄와 자신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는 문자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지적인 견해(관점)의 변화가 아니라 태도의 완전한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점검해봅시다. 전에는 죄 가운데 거하고 죄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까? 전에는 자신감이 있었고 자신이 제법 선하다고 믿었습니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전에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고 하나님의 권위를 거슬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시킵니까? 만일 당신이 이러한 질문들에 "예"라고 정직히 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회개를 한 것입니다. 당신의 태도는 이전의 태도와 전혀 달라졌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회개의 양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 그것이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의 은혜를 힘입는 위치로 인도합니다.

   엄격히 말한다면 우리 중 아무도 충분히 회개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이 보시는 만큼 우리의 죄악의 엄청남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주를 믿을 때 그 구주의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분의 무한한 가치와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달을수록 회개가 깊어집니다.


   "당신의 회개의 눈물도 기도도 아닐세.

   영혼을 속하는 피,

   그 피를 흘리신 분의 공로로

    당신의 무거운 죄짐이 사라지네."


 2. 나는 하나님께 합당치 않아요.  나는 정말 무가치해요. 하나님이 나 같은 자는 하늘나라에 데려가시지 않을 거예요.


   만일 당신이 스스로 하늘나라에 합당하거나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상상한다면 그건 얼마나 가증한 태도일까요! 바로 당신이 그렇게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심판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이 당신을 위해 죄가 되사 당신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조금이라도 합당한 것이 있었다면 구주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인 백부장은 그의 종을 위해 예수께 치료의 능력을 구 할 때 자기 대신 유대인 장로들을 그분께 보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나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주님을 대면했을 때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한 그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할 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에게 즉시 구원이 베풀어집니다. 죄인은 회개 없이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양심이 당신을 주저하게 하지 말라.

   합당한 것이 있나 미련을 갖지 말라.

   그분이 원하시는 합당함은

   당신이 그분을 필요로 하는 것 뿐이라."


 3. 나는 너무 흉악한 죄인이라 영영 구원받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선한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며, 사실 세상에는 나면서부터 선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

   만일 어떤 사람이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죄는 건강한 자를 사로잡는 더러운 질병 같으나, 예수님은 그 어떤 질병도 고치시는 위대한 의원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어떤 사람도 너무 사악하거나 너무 죄가 많지 않습니다. 그분의 치유의 능력은 한이 없습니다. 그분은 큰 죄인에게 큰 은혜를 베풀기를 기뻐하십니다. 다소의 사울은 죄인 중 괴수였으나 주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구원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죄악 됨이 크면 클수록 당신은 더욱 구주가 필요합니다. 당신의 상태가 나쁘면 나쁠수록 그분이 당신을 위해 죽으신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이 그 갈보리 십자가에 달렸을 때 우리의 모든 죄를 그 아들에게 넘기셨습니다. 그 아들께서 그 모든 죄를 위해 고난 당하셨습니다. 당신의 죄 중 어느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화목사역은 무한한 가치가 있기에 이제,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흉악한 죄인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내 죄가, 일부가 아닌 모든 죄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혔네.

   나는 더 이상 그 죄를 담당하지 않네.

   내 영혼아, 주를 찬양하라. 주를 찬양하라!"


4. 그러나 만일 내가 택함 받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하죠?


   그 문제는 당신 스스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정과 같은 심오한 교리에 심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다 택함 받은 사람이라고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단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전반부 말씀에 너무 오랜 시간을 끌지 마십시오. 후반부 말씀에 주의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의 책임이 거기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예수께로 나왔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결코 당신을 내어쫓지 않겠다는 그분의 약속의 말씀이 주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께로 나왔다는 사실이 아버지께서 당신을 그리스도께 주셨음을 증명합니다. 즉, 당신은 자신이 그 영광스런 택함 받은 백성의 무리에 속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D.L. 무디는 이것을 이렇게 간단히 표현했습니다. "택함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이고, 택함 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지 원하지 않는 자'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초청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초청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택함 받은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말씀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말할까요?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당신은 경건치 않은 자인가요? 그렇다면 그분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제 그 사실을 의지하고 평안을 누리십시오.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선언하신 이 말씀을 마음에 담으십시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 1;15).

   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께서 택함 받은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인"이란 말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말인데,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롬 3;23). 당신은 자신이 죄인임을 확신합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구원받을 줄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 너무 차원 높은 문제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그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께서 죄인을 영접하시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인가!

   죄 중에 방황하던 모든 이들이

   거듭해서 외치는 말,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영접하시네!"


5. 때때로 내가 버림받기로 예정된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두려운 운명을 도저히 바꿀 수 없을 거예요.


   아무도 버림받기로 예정되지 않았습니다. 예정은 올바르게 이해하면 무한히 가치 있고 무한히 위로가 되는 소중한 진리입니다. 성경을 펴서 "예정하다"는 말이 나오는 두 장을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로마서 8장 29,30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다음 장은 에베소서 1장입니다. 먼저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리고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상 네 구절에는 하늘나라나 지옥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본받는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도록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림받도록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사람이 구원받거나 영원히 버림받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 때문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예정은 언젠가 모든 구속받은 자들이 주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소중한 사실이 아닌가요! 구주를 믿는 자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기 위해 주어진 말씀에서 괜한 근심거리를 끌어내지 마십시오!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형상을 온전히 본받도록 당신을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 아들을 닮게 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최고의 형상을 닮는 영광을 허락하셨네."


6. 믿으려 애써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어요.


    누구를 믿으려 애쓴다는 거지요? 거짓말하실 수 없는 그분을 김히 믿으려 애쓴다는 말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을 면전에서 모독하는 말이 아닐까요? 가령 절친한 친구가 어떤 이상한 얘기를 들려주며 사실이라고 강조한다면 당신은, "네 말을 믿어보려고 노력할 거야"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것은  그를 전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 아닐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시고 그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믿어보려 노력하겠다는 말은 제발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믿든지 아니면 믿지 않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사실 당신은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다면, 즉시 그분께 나아가 그 동안 범한 그 큰 잘못을 고백하고 이후로는 그분의 말씀을 단순히 믿겠다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느낌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이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어린 소년처럼 말입니다.


   "나는 믿어요, 이제 나는 믿어요,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셔서

   죄에서 나를 해방하신 것을."


7. 그러나 뭔가 특별한 느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신약성경에서 "느끼다"(feel)라는 동사가 단 한번 발견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전한 설교 가운데 그 단어가 나오는데,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은과 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기는 그들의 모습을 꾸짖고, 참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증거합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if haply they moght feel after him, '혹 그를 찾고픈 느낌이 들면')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26~28).

   여기서 드디어 "느끼다"라는 단어를 찾았지만, 그것은 복음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이교도들이 어둠 가운데서 "혹 더듬어 찾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당신은 이교도들의 무지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복음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사시고 참되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뭔가 느끼라는 요청이 아니라 그분의 기록을 믿으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느낌"(feeling)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 단 두 번 발견되며, 구원의 메시지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에베소서 4장 19절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일부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저희가 감각 없는(past feeling)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이것은 죄 가운데 탐닉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무감각해집니다. 이러저러한 방탕에 걔속해서 빠지므로 더 이상 양심이 그들을 일깨우지 못합니다.

   "느낌"이란 단어가 나오는 또 하나의 본문은 이와 전혀 문맥이 다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이런 복스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the feeling of our infinities)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밖에 신약성경에는 느낌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믿음, 신뢰, 의지함, 확신 등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요! 그렇습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위한 단어들입니다. 당신의 느낌을 완전히 무시하고 이제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주 예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예수님, 내가 당신을 믿습니다.

   내 마음을 다해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힘없고 곤하고 지친 나를

   온전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당신 같은 이는 없습니다.

   당신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으니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8.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편에서 할 일을 하신 것을 알아요.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 편에서 할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이 성경 반에 참석해서 성경공부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놀랍게 구원하셨는지 간증을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로 충만했고 그의 입술은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와 주로 고백했습니다. 간증이 끝나자 율법주의자인 성경공부 인도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형제님이 주님께서 그를 위해 하신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구원받기 위해 한 일은 빼놓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역할을 하시고 우리는 우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형제님, 형제님은 하나님께서 형제님을 구원하시기 전에 형제님의 할 일을 했나요?"

   그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물론 제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죄가 이끄는 대로 빨리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났습니다. 그것이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뒤를 따라와서 결국 저를 붙잡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역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두 우리 역할을 했으며, 그것은 매우 슬픈 역할이었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범죄요 하나님이 하신 것은 구원입니다. 구원받은 후 우리는 그분의 은혜가 행한 일을 생각하며 밤낮 이렇게 감사를 올립니다.


   "내 죄를 스스로 씻으라 명하지 않았네.

   나는 어리석고, 연약하고, 무력하여

   도저히 죄를 씻을 수 없네.

   그러나 나는 복스런 진리를 아네.

   죄로 타락한 이 몸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셨네.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죄를 씻어주셨네."


9.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어요. 내가 진짜 믿는 것인지 확신이 없어요.


   믿음이 구주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주입니다. 그분은 변치 않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믿음이란 그분을 붙잡는 손에 불과합니다. 당신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신은 덜 의지할수록 좋습니다. 주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십시오. 그분은 진실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그분께 초점이 맞춰져 있는 한 당신은 영원토록 안전합니다.


   "에수님, 나는 당신을 의지합니다.

   당신께로 피합니다.

   죄 짐에 눌린 이 몸이

   어디서 안식하리이까?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품에서만

   내 영혼이 쉼을 얻습니다."


10. 하지만 성경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데요? 아마 내게는 그런 믿음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요.


   믿음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원하면 모두가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며, 그런 까닭에 불신앙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제시하시지만 우리편에서 성령의 은혜로운 손길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 말씀을 듣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까닭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유대인의 제단에서 죽임 당한

   모든 짐승의 피로는

   범죄한 양심을 평안케 할 수 없고

   죄의 흔적을 지울 수 없네.

   그러나 하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가셨으니

   그 모든 짐승보다 더 나은 제물이요

   더 값진 피일세.

   나는 믿음으로

   어린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내 죄를 자백하며

   참회자로 거기 서 있네.

   나는 저주가 사라졌음을

   믿음으로 보고 즐거워하며

   어린양을 즐거이 송축하며

   구속의 사랑을 노래 부르네." (아이작 왓츠)


11. 내가 과연 그리스도를 영접했는지 확신이 가지 않아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분을 당신의 주와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열납하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우리 죄를 지우셨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죄를 구속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사 영광 가운데 취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온전히 만족히 여기신 증거로 그리스도를 열납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영혼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나는 단순히 그 아들에 관해 품으신 하나님의 생각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계시니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뤄졌네.

   하나님은 빛이요

   하나님은 사랑이라.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대적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물러갔네."


12.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믿어지긴 해요. 하지만 내가 지은 죄를 잊을 수가 없어요. 밤낮 그 생각에 시달려요. 내가 정말 용서받았다면 과거를 잊을 수 있을 텐데요.


   오, 번민하는 영혼이여, 당신이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면 할 수록, 당신의 죄를 더욱 깊이 뉘우치고 그 죄로 인해 자신을 더욱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잊으셨다는 그 복스런 사실로 인해 위로 받으십시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이 당신을 괴롭히고 어지럽힐 때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잊으셨다는 사실을 의지하고 다시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평안을 누리십시오.


   "두려운 죄의 형벌이 영원히 치러졌네.

   예수께 영광 돌리세.

   그분의 이름을 송축하세.

   구주께서 죽으셨을 때

   형벌의 일부가 아닌

   모든 형벌이 치러졌네."


13. 나는 종종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 결단을 끝까지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뒤로 물러나곤 해요.


   마일 결단을 지키는 것이 당신의 능력에 달려 있다면 두려워할 만합니다  사실 당신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순간 당신은 다시 태어납니다. 그 때 성령께서 당신의 마음에 거하여 새 생명의 능력이 되기 위해 들어오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능히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당신 자신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그분의 뜻대로 행하시게 하십시오. 그분께 굴복할 때 그분께서 당신을 승리 가운데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 안에 안전하네.

   그분의 피로 인해 아무 의심 없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은

   아무것도 해하지 못하네!"


14. 하지만 내가 끝까지 지켜야만 마침내 구원받지 않을까요?


   내가 성경 이야기를 좀 바꿔도 되겠습니까? 만일 노아의 방주 기사가 이런 식으로 기록되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는지요? 가령 방주가 완성된 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가정해봅시다.

   "노아야, 이제 커다란 철심 여덟 개를 구해서 방주 옆에 박으라."

   "이제 너와 온 가족은 그 철심에 매달려 있으라."

   그래서 노아와 그 아내와 세 아들과 세 자부가 각각 철심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고 홍수가 왔습니다. 방주가 물 위에 뜨면서 그들은 철심에 대롱대롱 매달렸습니다. 팔이 끊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홍수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매달려 있으면 구원받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과연 안전하게 홍수를 지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성경 이야기는 얼마나 다른지요!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얼마나 철심에 매달리는 것과 다른지요! 방주 안에서 그들은 그 방주가 폭우를 지나는 동안 안전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능한 손길 안에서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자기 노력을 그만두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십시오. 방주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큰 구원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붙잡고 계시지, 당신이 그분을 붙잡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히 13:5).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당신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셔서 당신을 지키시며,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바라보십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 안에서 열납되게 하셨습니다.(엡 1:6), 우리말 성경에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라고 되어 있음-역주). 이보다 더 확실할 수가 있을까요?


   "그분의 선하심이 시작한 일을

   그분의 능력의 팔이 완성하리

   그분의 약속은 예요 아멘이니

   결코 빼앗기지 않으리."


15.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힘써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냥 믿기만 하는 것은 너무 쉬운 길로 보여요.


   우리 주님의 말씀은 물론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진지한 태도가 아니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느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도 목적도 없이 방황하며, 생명으로 가는 문을 그냥 지나쳐버리며, 오직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만 열중합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은 영적인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가장 우선된 일을 가장 우선시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위험을 자각하고, 무거운 죄짐을 통감하고, 옛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리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고 소리치며 멸망의 성을 도망쳐 나오는 천로역정의 순례자와 같습니다. 당신도 역시, 아무것도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그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마음을 굳게 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과 씨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바로 그 일을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모든 자기 노력을 중단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주 예수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가련하고 죄악된 모습 그대로 그분께 나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 모든 죄에서 당신을 깨끗케 하사 천국의 영광에 합당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절대로 이 약속을 저버리지 마십시오.모든 장애물을 물리치고 지금 구주께 마음을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구원 얻을 만한 말씀을 주시네.

   하나님이 뭔가 이뤄진 일,

   곧 사랑하는 아들께서 갈보리에서 이루신 일을 가리키시네.

   내 행위는 들어갈 공간이 없네.

   행위가 더해진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니네."


16.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분이 나를 구원하실 준비가 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지금입니다. 그분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고후 6:2). 다른 때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이 말씀을 읽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이 그분께는 당신을 구원할 더 없이 좋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순간보다 더 그분께 나아가기에 합당한 시간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하루 하루 시간을 연장할 때마다 당신은 당신의 죄의 목록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시간 시간 그분을 계속해서 거절할 때마다 당신은 그분의 복스런 아들을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죄를 키우고 있습니다. 순간 순간 그분을 멀리할 때마다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 분 앞에 무릎끓고, 자신의 곤고함을 자백함으로써 그러한 죄의 목록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용서를 기다리고 있었네.

   구원받기를 바라고 있었네.

   마음은 비록 단단했으나

   위경에서 건짐 받기를

   기다리고 바라고 있었네.

   마침내 하나님의 진리가 내 속을 비취었네.

   나는 죄인이라 고백했네.

   그분의 은혜는 정말 풍성했네.

   예수께서 내게 온전한 안식을 주셨네."


17. 정말 예수님께 나아가고 싶지만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복음의 단순한 초청 앞에 주저주저한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셨을 때와 똑같이 지금도 살아 게시며, 사랑이 풍성하시며, 하나님이자 동시에 인간이십니다. 그분이 친히 우리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왜 주저하고 멀리 서 계십니까? 그분께 나아가는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기도로 당신의 마음을 그분께 이뢰십시오. 당신이 바로 그분께서 위해서 죽으신 그 죄인이라고 말씀드리십시오. 이제 "오라,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그 분의 은혜로운 초청을 받아들이겠노라고 말씀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을 받아주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분께서 그리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약속을 지키십니다.

   당신은 찬송시 작가인 샤롯트 엘리옷트에 대한 일화를 아마 들으셨을 것입니다. 젊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영혼 문제로 고민했으나 막상 누군가 도와준다고 하면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러 온 한 프랑스 목사가 "예수님께 나아갔습니까?" 하고, 직접 묻자 그녀는 "나아가고 싶지만 어떻게 나아가는지 몰라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프랑스 목사가 간단히 답해주었습니다. "그냥 그모습 그대로 나아가세요." 그녀는 울면서 방에 들어갔다가 후에 구원받은 영혼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그때 그 경험을 아래 인용된 유명한 시로 표현했습니다. 이 시를 당신 것으로 삼지 않으시겟습니까?


   '변명치 말고 그 모습 그대로 나오라 하시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그분이

   그분에게 나오라 부르시네.

   하나님의 어린양이여!

   내가 나옵니다, 내가 나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나오라 하시네.

   그 사랑이 모든 막힌 담을 헐었네.

   이제 나는 그분의 것, 오직 그분의 것이 되었네.

   하나님의 어린양이여!

   내가 나옵니다, 내가 나옵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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