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존 필립스


                                                CHAPTER 8

                                            

                                    어려움들에 적응하는 삶

                                         Coping With Problems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세기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인구수가 증가하자 애굽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자기 나라에 위협적이고 귀찮은 존재가 될 것을 열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정한 게토(ghetto)지역(주- 유대인들만의 제한 거주지역) 안에서만 거주하게 하고 마침내는 그 안에서 모두 멸절시켜버리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계획은 간단하지만 잔혹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여자가 남자 아기를 낳으면 나일 강물에 던져 죽게 하여 결국 한 세대 안에 "유대인 문제"를 애굽 땅에서 깨끗이 종식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위한 한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등장한 사람이 이스라엘 제2의 건국자, 모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위와 능력으로 무장한 모세가 당대 세계 최강, 애굽왕 바로와 맞서 당당하게 싸우는 장엄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출애굽기 서두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는 다만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을 떠나도록 허락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히브리 노예들의 열망은 자신들의 곤궁한 상태를 벗어나 "삼일 길을 떠나 광야 속으로 들어 가는 것" (출 3:18; 8:27)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애굽의 입장에서 그 일은 허락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재앙이 반복되었고, 애굽왕 바로는 번번이 모세의 요구를 거절하였지만, 모세는 그 한 가지 요구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나기 전 날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굽힐 줄 모르던 강팍한 바로왕은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자신의 장자를 비롯한 모든 애굽 사람들의 장자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 "너희 백성들을 이끌고 속히 이 땅을 떠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해방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원수의 손으로부터 구출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4백여 년간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해방과 승리에 감격하며 출애굽의 대행진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흘 간의 여행 끝에 광야 한 가운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토록 열망하던 곳에 이르러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는 그 감격이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이는 곧 실망(disappoint-ment)입니다. 약속의 장소가 실망의 장소로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자, 상상해 보십시오. 사흘간의 광야 여행길에서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이 사막 한 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큰 희망과 기대로 모두 그곳으로 달려갔을까요? 그들은 저마다 급히 물가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기쁨은 곧 큰 실망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들이 마라의 물을 마실 수 없었으니 물이 씀이었더라" (출 15:22-26). 그들 앞에 펼쳐진 끝없는 지평선과 시내 사막의 뜨거운 모래는 끔찍했습니다. 시련이란 장애가 무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고, 위대한 희망을 품고 달려왔건만 그 모든 것은 마라의 실망스러운 최악의 환경으로 인해서 짓밟혀졌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실망 (The Christian and Disappointment)


   C. S. 루이스의 '스쿠르테잎의 편지' (Screwtape Letters)라는 책은 우리에게 깊은 내적 각성을 일으킵니다. 이 책은 스쿠르테잎이라는 노련한 늙은 악마가 웜우드(Worm-wood)라는 풋내기 젊은 악마에게 유혹의 기술을 지도하는 편지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 편지는 웜우드의 담당 환자가 방금 그리스도인으로 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스쿠르테잎은 웜우드가 담당 환자를 빼앗기게 된 그 실수에 대해서 그에게 상응하는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경고한 후, 그와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 취해야 할 최선의 방법에 대하여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웜우드로 하여금 교회를 주목하게 합니다. 그는 특별히 웜우드의 담당 환자가 새로 출석하기 시작한 교회의 교인들을 주시하게 합니다. 그리고 새로 출석하게 된 그 그리스도인이 완전하지 못한 기존의 교인들에 대하여 깊이 실망하게 만드는 일을 특히 열심히 하라고 일러줍니다. 그는 웜우드에게 하나님은 "믿음의 초기에는 누구에게나 이러한 실망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신다"고 귀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실망의 상황을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시는 궁극적 목적은 그들의 영성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격을 더욱 성장시키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실망에 잠길 때, 정말 심각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 실망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 잠재적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라고 일러 줍니다. 어째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기쁨과 평안을 빼앗기고, 힘 없이 살아가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의 감성적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원리에 의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18). 우리는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더 성숙되어지기 위해 반드시 시험들을 거쳐야 합니다. 실망스러운 상황 너머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물은 그 속에 모세가 나무 가지 하나를 던졌을 때 단물로 변하였습니다. 이 나무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행 5:30), 갈 3;13). 마라는 우리가 실망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 우리를 주님의 갈보리 십자가로 이끄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십자가는 우리 주님께 실망을 넘어 절망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제자들까지도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수치와 극심한 육체의 고통을 모두 참으셨고 마침내 승리하셨습니다(히 5:8-9, 12:2). 이는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본인지요. 그러므로 실망스러운 상황은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다만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결코 우리에게 실망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이러한 실망을 극복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께 자기를 드려 그분을 아는 기회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재난 (The Christian and Disaster)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세상살이의 다양한 재앙들로부터 제외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믿는 자들과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 할 때, 재앙의 시험을 면하리라고 약속받았습니다(신 28:1-14). 만일 그들이 불순종하면 재앙이 임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신 27:11-26, 28:15-68).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복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아니 하신다" (잠 18:22). 라고 하신대로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복은 아주 다릅니다. 저 유명한 산상수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복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결코 행복이나 복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고, 온유한 자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긍휼히 여기는 자와 마음이 청결한 자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마 5:1-12) 이러한 축복들은 천국 시민으로서의 성품을 소유할 때 따르는 상급일 뿐, 이 땅에서의 물질적 풍요나 건강이나 장수나 재앙을 면하는 일 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자동차 사고나, 집의 화재나, 자녀들의 상해를 경험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진이나, 벼락이나, 태풍과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로 손실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주 예수님도 굶주림과(마 4:2), 목마름과(요 4:7), 집 없는 자의 삶(요 7:53-8:1)을 체험하셨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땅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역시 땅에 속한 임시적이고도 지상적인 복들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에베소서에 기록된 대로 하늘에 속한 백성들이기 때문에 신령한 복이 약속 되었습니다(또한 히 12:18-24 참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혀용하시는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합당하게 잘 감당한다면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한 복들이 됩니다. 물론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영적인 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복들이 전혀 없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신구약의 복의 관점의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 측량할 수 없는 높은 뜻을 두고 계시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이 땅에서의 우리 삶 속에 형통함과 함께 역경들을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그리스도인과 배척받음 (The Christian and Disapproval)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 일을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결정을 좋아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모든 면에 그들의 반대편에 섭니다. 어떤 핍박은 심지어 폭력적이고, 어떤 핍박은 보다 은밀하기도 합니다. 가족관계와 사회생활과 경제적 압박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자기 동족 집단으로부터 추방 당하고, 혹은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기존 종교 세력으로부터 배척 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어떤 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거나 공적인 침례를 받을 때, 죽임을 당하거나, 사회공동체로부터 격리 또는 추방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와 같은 일들을 예상하셨습니다. 그분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라"(마 10:34-36). 또한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박해를 받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죽음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순교였습니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이유는 아벨이 가인보다 의로웠기 때문입니다(창 4:1-16; 요1서 3:12).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교회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박해는 종교적인 배후 세력으로 말미암았습니다(행 4:1-21). 두 번째 박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행 5:17-42).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의 종교적인 무리들의 선동에 의한 것이었습니다(행 7장). 그리고 이 박해의 주동자는 당시 가장 엄격한 종교의 영향을 받은 다소 사람 사울이었습니다(행 8:1-3; 9:1-2). 그러나 훗날 사울이 주님의 제자가 된 후, 그는 이전에 자신과 같은 편이었던 예루살렘의 정통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행 13:44-51; 14:2-5,19,13; 18:6; 21:27-32). 사도 바울이 받은 모든 고난의 목록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한 믿음의 역사였습니다(고후 11:22-33).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은 때로는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방인들의 선동에 의한 박해가 두 번 있었는데, 이 두 사건은 복음이 그들 이방인들에게 경제적 불이익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행 16:16-24; 19:23-29). 그런가 하면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설교 때문에 예루살렘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믿음을 위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요 21:18-19; 벧후 1:15).

   그러므로 핍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고난에 있어서 누구보다 풍부한 경험자였던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고 하였습니다. 핍박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오히려 비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핍박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첫째,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옳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핍박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교훈합니다. 그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고 하였습니다.

   둘째,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고 베드로는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의 대부분을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그에 따른 상급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1-12).


   그리스도인과 질병 (The Christian and Disease)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각종 병자와 불구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소경에게 빛을 주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 가 말하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반신불수, 열병, 혈루증 환자, 앉은뱅이, 중풍환자를 낫게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도 살려주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몰아내시고, 질병과 죽음에서 한 남자와 한 여인과 한 어린이를 각각 고쳐주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때때로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사람들을 고쳐주셨는데, 사람들을 직접 만져주심으로 고치기도 하시고, 멀리 있는 자를 말씀으로 고쳐 주기도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시기에도 병 고침의 기적은 흔한 사역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바울 또한 그러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죽은 자도 살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병자는 단지 베드로의 그림자에 의해서 고침을 받았고, 사도 바울의 손수건을 만짐으로써 고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신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항상 병을 지니고 있었고 늘 의사의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12장 5-9절의 바울의 "육체의 가시"란 간질병(epilepsy) 혹은 심한 눈병과 같은 육체적 질병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또한 "연약함들" (infirmities)이란 무기력, 쇠약하게 됨, 혹은 미약함, 병듦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물 대신에 포도주를 약으로 사용할 것을 충고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딤전 5:23) 공중위생이 전무하거나 극히 미미하던 시대에 참으로 놀라운 충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그의 동역자 가운데 드로비모가 병들어 밀레도에 남겨 둔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딤후 4:20).

   그리스도인이 병 들었을 때 의사를 찾아가는 것은 상식적으로 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어떤 병은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버림으로써,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4-15절의 말씀은 이와 같은 종류의 병과 그 치유방법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병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요 9:1-3). 그러나 대부분의 질병은 죄의 결과로서 이생에서 감당해야 할 인간 운명의 한 부분이며,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면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도록 해주며,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도록 해 줍니다. 질병은 종종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살펴보도록 해주며, 또한 예전에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태도와 성격을 돌아보며 각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질병들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을 때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에게 지혜로우신 선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병을 고쳐주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모든 때에 다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건강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매번 하나님께서 모든 병을 고쳐 주신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암이나, 심장마비나, 폐결핵이나, 혹은 기타의 다른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질병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병으로 말미암아 그릇된 일을 중지하게 되며, 영원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창하는 몇몇 위대한 찬송가들은 윌리엄 쿠퍼(William G. Cooper)나 화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와 같은 병자나 신체 불구자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죽음 (The Christian and Death)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1). 더욱 그는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 "더 좋다" ( far better) (빌 1:23)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고후 5:8)고도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음에 대해서 놀라운 기대와 확신이 있었습니다.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소망인지요!

   이제 죽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으로 인해 두려움 없이 죽음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믿는 자들의 "땅의 장막 집(육체)은 무너지리라." (흙으로 다시 돌아감)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죽음에 대하여 '간절히 사모하는 것" (고후 5:1-2) 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죽어야 할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리라" (고후 5: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후의 문제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들처럼 충분한 빛에 이르지 못했던 구약 시대의 다윗까지도 죽음의 실체에 대해서 "사망의 음침한(shadow)골짜기를 지날찌라도 주님은 나의 목자시라" (시 23;1,4)고 놀라운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음침한 골짜기의 개들이 우리를 물지 못하며 음침한 골짜기의 칼날이 우리를 상치 못할 것입니다.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는 결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결코 막거나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음침한 골짜기는 필연적이고 실제적인 과정이며, 동시에 빛으로 향하는 관문입니다. 실제적으로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한 다윗의 시편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 22: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셨습니다(마 27:46). 그가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담당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야만 했습니다.

   이제 불신자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불신자들의 죽음은 생명으로부터의 분리이며, 모든 인간관계로부터의 분리이며,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로서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과 동행하고,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서는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잠4;18)라고 하셨듯이 완전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나와서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잠4:19,;유 13절).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나와서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인간의 원수입니다. 바울도 죽음은 인간의 마지막 원수라고 말하였고(고전 15;26), 스펄전도 "이제까지 죽음은 마지막 원수였다. 그러나 그의 종말까지 그냥 내버려 두라." 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 이후, 그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즉시 인도될 것이라는 소망 뿐만 아니라, 장차 부활하리라는 소망도 가지고 있습니다(고전 15장 전체를 읽을 것).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살아 있는 믿는 자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그 몸이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살전 4:13-18).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의 복스러운 소망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원수인 사망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정복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확실한 소망이 있고 또한 우리의 모든 어려움들을 아시는 인자께서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며, 항상 우리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의 완전하신 뜻에 따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Posted by 행복자
,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윌리암 맥도날드

                                      13장

                     구원받고 만족하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스코틀랜드의 루이스 섬입니다. 때는 1922년입니다. 제시 맥도날드와 그녀의 두 아들, 이언과 윌리암이 남편이 일자리를 잡기 위해 메사추세츠로 돌아가고 없는 동안 세 독신 여동생을 찾아가 함께 1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에 그 지역 목사의 사택으로 사용되던 집에 기거했습니다.


   반년쯤 지났을 때 다섯 살 난 윌리암이 치명적인 전염병인 디프테리아에 걸렸습니다. 오늘날은 다행히도 알려지지 않은 질병으로, 유아에게 놓은 면역주사 덕택에 단 한 건도 발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주 치명적인 질병이었습니다.


   윌리암의 상태는 매우 위독했습니다. 근처에는 병원도 의사도 없었고, 치료에 도움이 될만한 약도 없었습니다. 다섯 살배기의 상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목구멍에 점액질의 막이 형성되어 공기가 폐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절망 중에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바로 그 때 노크 소리가 났습니다. 이웃 마을에 사는 그녀의 형부인 머드 맥도날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여호와의 친밀함을 알고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시 25:14).


   그녀는 경황이 없었지만 스코틀랜드 가정의 손님 접대 예를 따라 서둘러 차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식탁에 앉아 그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습니다. 아침에 난롯가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91편 끝에 이르러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란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


   그는 믿음으로 마지막 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했습니다.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시 91:14).


   그 당시는 윌리암이 장수를 누리거나 언젠가 구원을 받는 것이 인간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죽을 때가 임박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멀도는 믿음이 견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윌리암이 디프테리아를 극복하고 장차 거듭날 것이라고 그의 어머니에게 확신 있게 말해주었습니다.

   그가 과연 살아서 거듭났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무 의료적인 도움 없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료로 그는 그 치명적인 질병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13년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습니다. 그는 지금 83세의 나이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장수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장수함으로 나를 만족케 하고 그분의 구원을 내게 보여주셨습니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십니다



* (윌리암 맥도날드는 2007년 12월 25일, 만 91세의 생일을 불과 약 12일을 앞두고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이 에비되어 있는 주님곁으로 가셨습니다. 형제님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 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사실 그것이 그분의 바램이었습니다. 형제님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영광스러운 신약교회의 성도로서 일생을 신약교회 진리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실천해온 성경교사로서 참된 모본을 보였습니다. 형제님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길 원하여 살아 생전에 약 84권의 성경주석 등에 관한 책을 쓸 때에 처음에는 대부분 익명으로 쓰고 후에 그분이 저자인 것을 밝혔다고 합니다.

   또 사도 바울이 권면 한 것처럼 평생 홀로 침대 한개만 있는 단칸 아파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 행복과 참 자유와 참 안식을 누리며 살아오셨습니다.

   형제님은 19세기에 있었던 신약교회 운동이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거치면서 오늘날 정통 기독교 교리의 훌륭한 토대를 닦아놓은 기초 위에 20세기까지 이어서 이때까지 발견된 모든 신약교회 진리를 체계화 하되 평이하면서도 그 진리의 깊이를 훼손함이 없이 문서화함으로서, 그 빛을 더욱 발하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분이십니다.


1917년: 1월 7일 미국 매사츠세츠 레오민스터 출생.

1924년: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이주했다가 다시 메사츠세츠로 돌아옴.

1935년: 18세에 구원을 얻음.

1938년: TUFT 대학 졸업(21세).

1940년: HAVARD 대학 경영학 석사(MBA) 취득.

1940~42년: 보스톤 FIRST NATIONAL BANK 투자분석가 재직.

1942~46년: 제2차 세계대전 미 해군으로 복무.

1947~65년: 일리노이 오크 파크의 엠마오 성경학교 봉직.

1959~65년: 엠마오 성경학교 교장.

1965년~72년: 미국, 유럽, 아시아에서 순회하며 성경을 가르침.

1973~99년: 캘리포니아 Fairhaven Bible Chaple DITP(the Disicipleship Intern Training Program)제자 훈   련       교육 프로그램 진행. 현재는 캘리포니아 South Bay에 있는 Grace Bible Chaple과 Hillview Blble Chaple 계속 진행중.

1996~2007: 성경 가르침과 저술 활동.

                 생전에 약 84권의 책을 씀.

                 수 많은 잡지와 설교, 방송 강연록 있음.

                  2007년 12월 25일 21:20분 주님의 부르심을 받음).

                                                                                       -엠마오 성경학교 교재에서 발췌함-

Posted by 행복자
,

              믿어도 죄인인가?


                 사랑을 사려느냐?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한다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가서 8:7).


   저는 주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중심에 심한 아픔과 근심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장면을 생각할 때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그들은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시간과 정열과 재물을 드려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천국을 사모하여 기쁨도 있었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연민의 정으로 인하여 눈물과 찬양과 감사가 있었던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순교적 차원의 헌신과 죽음을 무릅쓴 봉사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사랑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알고 주고받는 가운데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방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슬픈 사실은,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입으로 또는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사랑을 하거나 자기 자신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짝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짝사랑은 슬픈 것입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상대방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혼자서 사랑을 퍼붓고 있는 것이니, 그의 사랑이 헛된 것을 깨달을 때의 절망감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열심히 순종하고 지키고 따름으로 혹은 교회의 직분과 봉사에 충성을 다함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인정받아 천국에 가보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늘 평강이 없고 부족하고 부끄러울 뿐인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질문하면 "믿음이 부족해서", "더 노력해야지요" 혹은 "내가 이만큼 주님을 섬겼는데 갈 수 있지 않겠어요" 하고 대답하니, 전자는 낙심과 연약에 싸여 망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기 교만에 파묻혀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의 근본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자신의 그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할 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자가 과연 있겠습니까? 있다고 한다면 착각에 빠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그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물질주의자로,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려는 처사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자녀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는데 부모 된 나에게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돈 몇 푼이나 선물을 들고 와서 환심을 사서 해결하려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모습이겠습니까? 인간의 세계에서도 사랑을 돈이나 기타 물질로 계산하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될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임에야... .

   초대 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하나님과 천국을 향한 당당한 소망은 착각이나 자기 열심으로 인한 자만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랑의 선물을 받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내린 결과인 것입니다.

   그대여!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가를 먼저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요한일서 4:8).

   둘째로, 사랑은 상대적이며 계약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상대적인 계약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성경)의 뜻을 명백히 알고 그 약속에 합한 실제적인 사실로 인한 평안과 기쁨이 선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의 생각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3절을 보면 육체를 따라난 이스마엘과 약속을 따라 난 이삭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데, 두 언약으로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두 종류, 두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따라 난 이삭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으며 이스마엘은 아랍 족속의 조상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쟁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출생 내력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본 부인인 사라를 통해서 후계자를 세우고 대를 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몸이 점점 늙어가도 약속에 대한 성취의 징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이를 낳을 소망을 가질 수 없는 늙은 몸이 되었습니다. 이때 조급해진 사라가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고 아브라함을 충동질하여 그의 젊은 몸종 하갈을 통하여 육신적인 계획과 방법으로 자녀를 생산하기로 합의합니다. 이 계획이 진행되어 하갈을 통하여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사실 이 사건은 이 가족의 불행과 다툼의 시작이었고 오늘날 아랍 전쟁의 출발이었으니, 인간이 육신적으로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이며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일인가 생각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이 일로 사라와 하갈 사이에 다툼이 시작되었으며, 이스마엘과 후에 태어난 이삭과의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오늘날 짝사랑 속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육적인 기독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구원받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또는 자기 경험, 즉 병 고침, 방언, 신비체험, 꿈, 직분, 충성, 물질 헌신 등, 자기의 것을 가지고 천국에 가려고 노력하는 무지한 교인들이며, 성경보다는 자기가 소속한 교회 지도자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맹신자들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것은 마치 상대방과 약속한 사실도 없이 자기 혼자 공원에 가서 친구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나님 앞에서 일방적인 맹신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기 마음만 상달시키려는 억지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하나님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알고 싶지 않습니까? 깨닫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당신의 모든 죄, 당신이 받아야 할 죄의 벌을 대신 당하게 하시기까지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은 그분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하나님은 당신을 알고 계셔서 당신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경건치 않은 자(죄인)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로마서 5:5,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9).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당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당신의 죗값을 아들을 통해 대신 치르게 한 위대한 사랑의 증표입니다(로마서 5:6~8).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죄의 벽을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헐어버리고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0:17).

   당신의 율법적 행위와 종교적 열심과 공로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사려는 망상을 속히 버리고 무릎을 꿇고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을 단순히 받아들이시고 영생을 얻으십시오. 이미 주신 사랑, 이루어 놓으신 속죄, 닦아놓으신 영생의 길을 믿음 하나로 당신의 것으로 만드십시오. 만약 당신이 모든 죄를(과거, 현재, 미래) 용서받은 사실을 믿고 의인이 된 사실을 깨달았다면 영생을 얻었다고 성경은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한복음 6:47).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요한복음 3:36).

                                                    

                                                                                                                                             - 전도자 허윤욱-

'믿음,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고보서 - 제11과 기도와 병고침 (야고보서 5:13-15)  (0) 2015.11.10
믿어도 죄인인가? - 믿어도 죄인인가?  (0) 2015.11.08
호루라기  (0) 2015.11.06
인생의 종착역  (0) 2015.11.05
최고의 줄타기 선수  (0) 2015.11.04
Posted by 행복자
,

      온 천하를 얻고도


                    영혼의 닻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히6:17-19)

   하나님께서도 보증을 서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보증을 서셨거나 또는 보증을 부탁하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보증이 무엇일까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은행에서 천만원의 대출을 받는데 당신이 그의 보증을 선다고 해 보십시다.그가 다행히 약속을 지켜서 제때에 돈을 갚으면 별일이 없겠으나 만일 갚지 못하면 보증인인 당신이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보증을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보증을 서셨습니다. 누구에게 보증을 서셨습니까? 본문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서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그 뜻(약속)이 변치 않을 것을 맹세로 보증을 서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일까요?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딛1:2)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일 2:25)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13)

   하나님의 약속은 영생입니다. 구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값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얻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이 약속에 보증을 서신 것입니다.

   우리의 보증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든든합니까? 보증인은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보증을 설 수 있습니다. 하나는 확실히 갚겠다는 약속을 해야 하며, 또 하나는 갚을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를 보증인으로 세우지 않죠. 그가 약속은 할 수 있어도 능력이 없습니다. 또 능력이 있어도 약속을 하지 않으면 보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과 영생에 대해서 맹세로 보증을 서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보증인이신데 무슨 걱정이 필요 하겠습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롬 8:33,34)

   히브리서 6장 18절에 보면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최초의 거짓말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그 후 주님은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 부르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참된 것)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참된 것)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또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자들을 싫어하셔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21:8)

   이렇게 거짓말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에서 변치 못할 두가지 사실은 맹세로 보증을 서신 것과 거짓말 하실 수 없는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 19절에는 이것을 "영혼의 닻"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닻! 저는 배를 자주 보는데 배마다 닻이 있습니다. 이 닻은 배를 항구에 정박시키거나 또는 고정할 때 배 밖의 단단한 구조물에 걸어 놓는 기구입니다. 배를 단단히 고정 시키고자 할 때 이 닻이 배 안에 있어야 합니까? 배 밖에 있어야 합니까? 물론 배 밖에 있어야 하죠. 만일 배 안에 있는 어떤 구조물에 닻을 거는 어리석은 자가 있다면 그 배는 한없이 흘러가 폭풍이나 암초를 만나 침몰하게 될 것입니다. 배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닻을 배 밖의 단단한 곳에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영혼의 닻은 어디에 걸으셨습니까? 저는 맹세로 보증을 서시고 거짓말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에 걸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배안에 닻을 거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자기 안에 닻을 걸고 있습니다. 선행이나 자선사업, 또는 무슨 고행이나 도를 닦는 것에 영혼의 닻을 걸어 놓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결심이나 양심에 닻을 걸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무슨 꿈이나 환상, 이적에 자기의 영혼의 닻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것은 다 하나같이 배 안에 닻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 이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닻을 걸어 봅시다. 영원히 요동치 않고 변하지 않는, 그리고 거짓말 하실 수 없는 이 하나님의 약속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닻' 을 걸어 볼만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10:28,29)

                           -김우종 著-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