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천하를 얻고도


             그것을 왜 복음이라 하는가?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고 기사거리도 많습니다.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어떤 것은 슬프고 또 어떤 것은 즐겁고 기쁜 이야기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나 소식을 듣고 싶으십니까?

   절망적이고 슬픈 소식은 듣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죽음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참으로 죽음은 두려운 것이고 아무도 같이 할 수 없는 나만의 마지막 걸음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어떤이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자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않고 죽는 자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전도서를 기록한 전도자는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11:9)고 했고 또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전 12:1) 그리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데 하나님을 모르고 준비하지 않은 채 죽음 저편으로 가는것처럼 두렵고 무서운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쁜 소식! 그것은 복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된 소식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복된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바라시며 바로 당신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당신에게도 영원한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지옥에 떨어지거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이 구원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복음은 무슨 심오한 철학자나 많이 배운 사람들이라야 깨닫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배운자나 못배운자, 부자나 가난한자, 건강한자나 연약한자,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그야말로 모든 사람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쁜 소식이라면 그 기쁜 소식이 쉬워야 하겠습니까? 어려워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 하시고는 그 구원 받는 것을 어렵게 하셨다면 어떻게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왜 이렇게 구원받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부족을 느끼는 사람은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무언가 이루어 놓으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있을 만큼 온전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롬 3:20)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갈 3:11)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4)

   그러기에 사람이 구원 받는 이 일을 사람쪽에서 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사람이 하겠다고 하니까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이 부족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넉넉히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일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예! 바로 모든 사람입니다. 이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도 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끄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4)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딤전 2:6) 당신은 제외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당신도 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죄값을 주님으로부터 충분히 받으신 것입니다. 당신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이 죽으셨는데도 부족함을 느끼십니까? 당신이 주님보다 크신 이 입니까? 당신이 양이나 염소보다는 클지라도 주님보다는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이나 염소로는 부족을 느껴도 주님으로는 부족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직도 부족을 느낀다면 당신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

                                                                                                                     -김우종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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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06 더해가는 고난(11-12장)


요절 : 12장 24절, 요한일서 3장 14절

요점 :

1. 다른 사람에 대해 비난하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2. 성령님을 소유한 것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것은 구원받은 두가지 증거입니다.

3.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좋은 이름입니다.

4. 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우편에 있게 됩니다.

5. 하나님은 기도하고 스스로를 돕는 자들을 도우십니다.

6. 비록 악인이 번영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에게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예루살렘과 안디옥


1.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를 비난함(11:1-3)


10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유대인에게와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게 기꺼이 복음을 전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해 특별한 환상을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식사 하는 것을 매우 악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행한 일에 대해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편협한 시각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비록 베드로 일지라도 그가 특히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도록 주님께 명령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내버리도록 하나님께 직접적인 계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다른 그리스도인이나 주님의 종들을 비난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잘 하는 것입니다. "마귀" 라는 말은 "참소자" 를 의미하고 그가 하는 일은 형제들을 참소하는 것입니다(계 12:10).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자기 백성들을 참소로부터 변호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대언자(요일 2:1)라 불리웁니다. 하나님 한분만이 모든 상황과 마음의 동기를 아시며 하나님 한분만이 자신의 종들을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2.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간 이유를 설명함(11:4-14)


때로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 특히 주님을 위한 어떤 섬김에 대해 우리를 비난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간섭에 대해 화를 내고 원망할 수도 있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하기 보다는 단순하게 이 문제에 있어서 주님께서 처음부터 자기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님은 사람이 말한 무슨 무익한 말이든지 심문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타당한 이유없이 기록된 성경에 무언가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전에 읽은 한 부분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반복에 의해 결국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기꺼이 전하게 된 것이 매우 중요한 걸음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에 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성령님은 구원의 증거임(11:15-18)


주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는 특별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속에 내주하시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이나 정결케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나타내는 증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요7:39)?

   베드로의 마지막 변론은 하나님께서 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주님께서 받으셨음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한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자 유대인 신자들까지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주 예수님 안에서 다른 신자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구원받은 또 다른 표시입니다(요일3:14, 5:2). 당신은 당신이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4.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함(11:19-21)


사울이 구원받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아주 가혹하게 핍박하므로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이일은 비록 유대인들에게 국한 된 것이었지만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셨다는 베드로의 교훈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처럼 아주 편협한 마음이 아니어서 헬라인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었는지를 듣고 기뻐하였으며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의 과정을 되돌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까지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후에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는 빌립과 사도들을  보게 되며 내시가 에디오피아에 복음을 가지고 돌아가게 됩니다. 회심한 후 사울은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베드로는 룻다와 욥바에서 복음을 전했고 그리고 가이사랴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제 이곳 안디옥에서 많은 헬라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성경 지도에서 이 장소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5. 바나바와 사울(11:22-26)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 받는 이 복된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예루살렘에서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사마리아와 가이사랴의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이 때에는 이 복된 소식을 듣고 사도들이 4장과 9장에서 언급되었던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매우 기뻐했고 사람들에게 주님께 계속 붙어있으라고 권했습니다.

그후에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으며 사울도 오게 되어 그 사역을 돕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이 일 하기를 기뻐하여 두 사람은 그곳에 1년간 머물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고 주님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그 도시의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람들" 이라는 의미인 "그리스도인" 들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 대한 좋은 이름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됨을 나타내는 다른 명칭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를 칭하고 있는 성도, 제자, 신자, 그리스도인, 형제 이외의 어떤 명칭도 우리에게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6. 한 선지자가 다가올 흉년을 예고함(11:27-30)


그후에 예루살렘에서 몇 명의 선지자들이 오게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약간의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그부조를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보내기 위해 사울과 바나바를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형제에 대한 사랑이 거듭난 것에 대한 진정한 증거임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도움을 받았기에 자신들의 물질로 돕고자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박해


1.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죽임을 당함(12:1-2)


신약성경에는 헤롯이라 불리는 세 명의 왕이 있습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2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통치하고 있던 자로  자신이 왕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 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또 다른 헤롯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실 때 갈릴리를 다스리던 자였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의 목을 베었고 주님께서 죽으실 때 예수님에 대해 빌라도와 합의하게 되었습니다(눅 23:12).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왕은 첫째 헤롯의 손자로써 그리스도 이름에 연관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맹렬한 증오를 앞에 나온 두 헤롯에게 나누어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그가 아무 이유없이 야고보를 칼로 죽인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신약성경에는 야고보라 불리우는 사람이 적어도 세 명이 있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사도들로 마태복음 10장 2-3절에 그이름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장의 17절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야고보(막 6:3)는 야고보서를 기록한 주님의 형제입니다.

헤롯과 야고보가 얼마나 대조됩니까? 이 구절로 인해 당신은 헤롯이 더 강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주님이 오셔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때, 야고보처럼 주님을 따른 자들이 진정으로 우편에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있게 될 것입니까?


2. 베드로가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히지만 천사에 의해 풀려남(12:3-10)


그러나 그 때에 헤롯은 자신이 매우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베드로도 가두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다 죄에 빠졌던가! 헤롯은 아주 확실케 하려고 여섯명의 병사들에게 베드로를 감시하여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므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옥에서 꺼내도록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비록 베드로는 다음날 재판을 받아야 했지만 확신과 평안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깊이 잠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일어나서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쇠사슬이 그에게서 벗겨졌고 큰 감옥 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베드로를 데리고 거리에 나왔을 때, 그제야 베드로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는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의 어떤 권세도 하나님의 뜻에 대적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을 통해 자신의 백성들을 돕는 큰 일을 행하시는 것을 이 단락에서 보게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기를 기대하십니다.


3. 베드로가 형제들에게로 감(12:11-17)


처음에 베드로는 어떻게 된 일인지 거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깨닫게 되었을 때 다시 풀려난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즉시 다른 믿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당신은 직장이나 학교수업이 쉬게될 때 무엇을 하십니까? 당신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며 교제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지금은 한밤중이며 사람들은 계속해서 아주 간절하게 베드로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가 너무나 놀랍도록 하나님에 의해 응답되어 베드로가 문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믿음이  아주 강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귀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구할 때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4. 감옥 파숫군들을 죽임(12:18-19)


죄수를 탈출하게 하는 것은 파숫군에게는 매우 큰 범죄였습니다. 죄수들을 탈출하게 한 것은 죄수에게서 큰 선물을 받은 것으로 의심할 수 있기 때문에 로마제국에서 파숫군이 죄수를 잘 지키지 못하면 사형에 처해집니다. 실제로 헤롯은 이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하나님의 권능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두려워졌습니다. 헤롯은 파숫군의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고는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요셉은 주님을 새 무덤에 장사했고, 빌라도는 제자들이 그 시체를 훔쳐가서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났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봉인했습니다. 그러나 무덤 앞에 있는 돌과 로마 군대 전체 그리고 사단의 모든 세력이 함께했을 지라도 무덤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 파숫군들도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졌지만 제사장들은 그 사실이 누설되지 않으면 그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마 28:11-15).

   하나님을 거역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주님께서 마지막에 이기실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언젠가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잘 알면서도 죄의 길에 계속 행하고 있습니다.


5. 헤롯이 심판을 받음(12:20-23)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가지고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이 악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임하게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왕에게 호의를 구하러 오자 왕은 큰 연설을 했습니다.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왕에게 아첨하려고 그 말이 단순한 사람의 소리가 아닌 신의 소리임에 틀림없다고 크게 부르짖었습니다. 헤롯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며 자기는 단지 사람일 뿐이라고 시인하는 대신에 이 거짓된 칭송을 크게 즐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쳐서 충이 먹는 굴욕적인 죽음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 의 의 심판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이 번영하고 그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이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명백해 질 것입니다.


6. 바나바와 사울과 마가(12:24,25)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는 박해는 하나님께서 악한 헤롯을 심판하시자 끝났습니다. 사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며 더하여 갔습니다. 고난의 시간 후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된 행복한 시간을 주십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약간의 부조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11:30). 그들이 이일을 마치고 젊은 청년 마가 요한과 함께 안디옥으로 돌아옸습니다. 마가의 가족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일 수 있는 큰 집을 소유했습니다(20절). 마가는 이러한 일들에 의해 크게 감동되어 있었으며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진실한 갈망도 있었습니다. 그는 바나바의 조카였으며(골 4:10), 안디옥까지 사도들과 함께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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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12과 그리스도인의 상급

                                                (15장 14절 ~ 16장 27절)


       결론 및 문안


   1. 사도 바울은 본 서신 서를 쓰게 된 동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14~21절).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한 일이 하나님께 열납돠게 하기 위하여 이상의 위대한 진리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고자 합니다.


   2. 사도 바울은 이후의 그의 여정에 대한 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22~33절). 그는 서바나로 가는 길에 로마에 들리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연보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여정계획을 고려하여 그들에게 그의 여정이 성공적일 수 있도록, 유대의 불신자로부터 해를 받지 않도록, 또 로마에 이를 때 그의 사역에 풍성한 축복이 임하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3. 성도들에 대한 문안(16장)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우리가 영적 의미라든가 흥미를 별로 발견하지 못하는 글이라고 생각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깊이 상고해 본다면, 이 16장은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여기에 기록된 그리스도인들은 본 서신서가 가르치고 있는 진리의 산 증인들입니다. 본 서신서가 역동적인 진리의 확신으로 막을 내리고 있음은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2)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성장했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또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 가운데 쫓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형제자매들에 대해 이와 동일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어떤 분들은 이 장을 가리켜 그리스도 심판의 축소판이라고 흥미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주님께 충성한 모든 일들에 대해 칭찬하고 있습니다.


   4) 16장 전체는 기독교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장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세상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영원히 간직 될 것입니다.


   5) 그들 이름 가운데는 흥미와 교훈을 주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에배네도는 '칭찬할 만 하다' 라는 뜻이며, 빌롤로고는 '말씀을 사랑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두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가진 뜻에 부응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6) 편지를 쓰는 일은 큰 사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을 돕고 격려하기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편지를 쓸 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런지 알 수 없습니다.


   7) 하나님은 그의 이름으로 행한 모든 선한 일에 대해 상을 내리십니다. 이 16장은 이같이 작은 행위를 하나님이 보시고 기록하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8) 16장은 성도들이 한 지역 교회에서 다른 지역 교회로 방문할 때, 천거서를 지녔던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1절). 이것은 지역 교회의 친교 속에 불신자들이나 거짓된 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9) 이 16장에 여자들의 이름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나 있는 것은, 그들이 주님 앞에서 봉사할 수 있는 폭 넓은 범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1,3,5,7절 등등). 단에 서서 하는 봉사만이 하나님께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10) 이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인이 예의범절을 훌륭히 나타내 보인 곳입니다. 이것은 성도로서의 합당한 예절을 말합니다.


   11) 16장은 성도들 사이에는 신분상 계층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입니다.


   12) 성도들 간에 친밀한 교제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실로 그들의 삶은 기독교 신앙에 의해 강하게 끌렸으며, 이와 같은 공동의 열정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연합시켜 놓았습니다.


   13) 신약교회의 단순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5절에 " 그 집에 있는 교회" (영역)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무리의 성도들이 가정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며, 교제하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14) 17~19절의 말씀은 분쟁을 야기시키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15) 끝으로, 접대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언급이 빈번하게 나타날 뿐 아니라 또한 접대에 대한 칭찬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서신 서를 마침에 있어서 우리는 바울의 기도를 인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20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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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기본진리


                   제 7 과  중 생(2)


1.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중생이 이루어 지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셨

습니다. 


   1)  중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이루어 집니다(요 3:5).

요 3:5 말씀에서 '물' 은 모든 사람이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

을 상징하는 것입니다(엡 5:26 ; 요 15:3 ; 시 119:9 참조). 그것은

세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입니다. 다른 많은 성경 말씀들도

중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진다는 것을 대단히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벧전 1:23-25 ; 약 1:18). 물로 눈을

씻으면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던 오물이 씻겨 나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가운데 들어올 때 그것이 사람

의 길 잃은 상태(롬 3:10-19)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에 나타난 그의 사랑( 요 3:16) 과 죄인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밝혀 깨닫게 하여 주는 것입니다(롬 10: 1-17).


   2)  중생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안에 거하심으로 이루어 지

는 것입니다(요 3:5).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자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

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며, 믿을 때

믿는 각 사람안에 내주하시며, 영적인 일들을 깨닫게 하기 위하

여 영적 성품, 곧 하나님의 성품을 주시며, 또 거듭난 각 사람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요 16:7-15 ; 엡 1:13,14 ; 벧후

1:3,4 ; 갈 5:22-26 참조).


   하나님의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질 때 성령님은 그 진리를 적

용하여, 죄인에게 그의 무력하고 절망적인 상태를 깨닫게 하여

찔림을 받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 때 그는 말씀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완성하신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길

을 나타내십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님은 믿는

그사람 안에 내주하심으로 그를 그리스도께서 사신 기업으로

인치십니다. 이것은 느낌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입니

다. 우리는 중생을 느끼지 않습니다.


   3)  중생은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것을 믿음으로

이루어 집니다. 요한복음 3:14-16 을 찾아 읽어 보십시오. 이

말씀들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새 생명이 죄인에게 어떻게

임할 수 있는 지를 수정같이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

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한 사건

을 실례로 들어 중생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지를 말씀하셨습

니다.

   이제 민수기 21:4-9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이 사건은 일곱 단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씀을 조

심스럽고 세밀하게 관찰하여 봅시다. 이것은 죄인이 어떻게 거

듭날 수 있는 지를 설명하신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실례입니다.


   <1> 죄(민 21:5) -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한 것과 똑 같이 모든

         사람은 다 그들의 언행심사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2> 심판(6절) - 그들의 죄가 하나님의 당연한 심판을 자신들

          에게 초래시켰던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죄에 대한 그의

          진노를 나타내셨습니다(롬 1:18 ; 6:23 ; 욥 36:18 참조).

   <3> 회개(7절) -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죄를 깨닫고 자백하

          며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에서 태도의

          변화로, 태도의 변화에서 행동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입니

          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기를 요구하십니다(눅 13:3 ;

          행 17: 30,31 ; 20:21 ; 막 1:15 참조).

   <4> 계시(8절)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하나님께서는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모세에게 구원의 길을 나

         타 내셨습니다(딤후 3:15-17 ; 롬 10:8,9).

   <5> 구원의 길을 예비(8, 9절) - 이스라엘 진영에서 다 보이도

         록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이제 요한복음

         3:14와 비교하여 보십시오. 모세가 놋 뱀을 든 것같이 그

         리스도께서도 죄에 물린 인생들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 달리셔야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심판을  받

         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죽으심으로 죄인에 대한 하나님

         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 자

         신의 아들을 대속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아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사

         53: 5,6 ;고전 15: 1-4 ; 롬 5:7.8 참조).

   <6> 조건(8절) -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놋 뱀이 장대 위에

          달렸다는 사실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각기 살기

          위하여서는 그것을 쳐다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기에 필요한 모

          든 일을 다 이루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를 믿고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주께서 "누구든지 저를 믿

          으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고 하신 말

          씀의 뜻입니다.

          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고

          결심하고 선한 일을 해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온전히 신

          뢰하여 그를 구주로 마음 가운데 모셔야만 되는 것입니다(요

          1:12 ; 행 13: 38,39 ; 엡 2:8,9 참조).

   <7> 결과(9절) - "살더라"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던)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장대 위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는 순간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말하자면, 거듭난 것입니다. 마찬가지

          로 길 잃고 범죄한 죄인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죽으

          셨다는 복음의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를 그의 마음가운데 모시

          는 순간에 영생을 얻는 것이며, 그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시

          며, 또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중생 곧 거듭나

          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거

          나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대로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중생' 의

          의미입니다.


   2.  사람이 언제 거듭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이 순간에 얻을 수 있습니다. 중

       생은 범죄한 죄인이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그를 믿는 순간에 이

       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현 상태 그대로 바로

       그곳에서 지금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당신

       을 위하여 이미 구원을 완성해 놓으신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하

       신 일을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고후 6: 1,2 ; 히 4:7 참조).


          "그리스도는 너의 수치를  담당했다. 그대여!  죄인 그대로 와

       서 그를 믿으라. 그러면, 그대는 성령님으로 인하여 말씀으로

       거듭난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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