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새로운 출생 (BORN TO WIN)

                                                                                     -윌리암맥도날드


                                                     제2과

                                         본문 : 누가복음 10장 30-37절


                           선한 사마리아인

                      (The Good Samaritan)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막 길은 종종 강도들이 출몰하는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아주 위험한 도로였습니다 인적이 드물고, 길가에는 집도 별로 없었으며, 치안경찰이나 군인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도시를 왕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도로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이 사막 길을 따라 여리고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풀 속으로부터 강도들이 달려 나아와 그 사람을 덮쳤습니다. 그에게 가장 값진 것은 그의 옷이었기 때문에 강도들은 우선 그의 옷을 벗기고, 그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들을 모두 빼앗고, 그에게 심한 상처를 입힌 후 그를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강도 만난 그 사람은 피를 흘리며 거의 죽은 상태로 그곳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한 유대인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강도들의 습격을 받고 길가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제사장은 그가 자기 회당의 한 회원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제사장은 그를 외면한 채 빠른 걸음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사람을 보면 돕는 것이 제사장의 임무였지만 그는 광야에서 지체하다가 자신도 강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강도 피해자를 외면한 채 그냥 사라져 버렸습니다. 만일 잠시라도 지체한다면 위험부담도 그 만큼 곱절로 크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어느 한 레위 인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제사장을 돕는 임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그 레위인 역시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였을 때, 신속한 응급조치가 필요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레위인도 그 곳에서 지체한다면 필시 강도들이 자신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레위인도 그 강도 피해자를 보고도 급히 지나가 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한 사마리아인이 나귀를 이끌고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역사적으로 그 뿌리는 같으나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족이라 하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멸시했습니다. 따라서 이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에는 피차 대화조차 꺼리는 사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빠진 사람이 유대인인줄을 알면서도 그에 대한 동정심을 품고 그 곁으로 다가가서 그를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인종적 편견도, 자신의 안전문제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꿇고, 그 사람의 상처를 닦아 주고, 그 위에 약(기름과 포도주)을 바르고, 상처를 붕대로 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나귀 위에 그 사람을 태우고 인근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정성껏 그를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여행길을 떠나기 전,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기를 자신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간호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만일 치료하는데 경비가 더 든다면 자신이 다시 돌아오는 날 대신 갚아 주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 사마리아인의 이와 같은 훌륭한 행동에 대해서 당신의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인종적인 편견을 넘어서 유대인에게 보여준 그 사마리아인의 순수하고 아낌없는 그 큰 사랑에 대해서 경탄을 금하지 못하리라 믿습니다.


   비유를 통해 주는 놀라운 교훈 (Get The Big Picture)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는 언제나 어떤 분명한 교훈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랍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가 이러한 질문을 한 목적은 예수님에게 어떤 교훈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이미 다 아시는 예수께서는 그 율법사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너는 거기에서 무엇을 읽었느냐?" 율법이라면 이미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그 율법사는 의기양양하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네 대답이 옳다" 고 하실 때, 그 율법사는 그 보란듯이 어깨를 으쓱대며 자신의 율법지식에 대해서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다시금 그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그 율법사는 율법 지식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자랑할 수 있었지만 "그 율법대로 행하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영 그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대화의 함정에서 벗어나 보려고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그를 올바로 깨우쳐 주기 위해 예수께서 교훈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이웃"은 인종이나, 신조나, 피부색깔이나 그 어떤 것도 상관없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절망적 상태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사랑과 자비를 주셨는지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금 본 비유의 말씀으로 돌아가 그 속에 감추어진 구원의 놀라운 진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평화의 도성"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요단강 물이 흘러 들어오는 사해 바다 인근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평화의 도시로부터 죽음의 땅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4:12)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 사람은 이 길을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 등을 돌려 죄악된 세상을 향하여 내려 가는 길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범죄 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잠언 14:12)고 하였습니다. 죄는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셋째, 강도들은 이 가련한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의 순결함과, 기쁨, 자유 그리고 그 생애의 가치 있는 모든 것을 강탈당하였습니다. 범죄 한 후의 우리에게 오는 결과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강도들은 또한 그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를 반죽음의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죄가 인간의 삶에 슬픔, 고난, 죄책감, 상처, 그리고 후회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종교의 무력함(You Can't Cop a Plea)


   제사장과 레위는 강도만난 자를 보고서도 도움을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이는 몇 가지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죄인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시편 60:11)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목사, 제사장, 랍비등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요 14:6, 행 4:12).

   셋째,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의 대표적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직임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특히 십계명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계명들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그의 얼굴의 더러움을 보여주지만, 그 더러움을 씻어줄 힘은 없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몇 가지 유사한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고로 말씀드릴 것은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으로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8:48).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께서는 절망 중에 빠져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하늘나라로부터 먼 길을 떠나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시려 죄악의 소굴인 이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인이 곤경에 처한 유대인을 구해 준 사실은 진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빋으시면서도, 경건하지 않은 이 세상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며, 속죄의 피를 흘려주신, 그 희생과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8:9)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부요케 해 주셨습니다.


   희생을 무릎 쓰고 우리를 구원한 사람 (The Man Who Didn't Duck Out)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위험을 무릎 쓰고 강도를 당한 사람을 돕기 위해 그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갈 2:20)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길 가에 쓰러져 있는 피해자의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이보다 훨씬 더 놀랍습니다. 그는 심령이 상한 자를 치료해 주시며, 영적으로 소경된 자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눅 4:18).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의 상처 위에 부은 기름은 하나님께서 그가 구원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부상당한 자의 상처에 부어준 포도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구주께서는 죄로 인해 상처받았던 사람에게 기름(성령)과 포도주(기쁨)를 부어 주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의 새로운 친구를 길가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들을 다른 믿는 지체들 가운데로, 특별히 지역교회의 따뜻한 교제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후, 홀로 떨어져 있으면 위험한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깨끗한 생활과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가 여관을 떠나기 전, 그가 자신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 올 때까지 그의 새 친구를 돌봐주며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줄 것을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리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의 말씀 곧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의 교회를 주시고, 가르침과 성도들과의 교제와 기도 시간과 주의 만찬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날마다 힘을 주시고, 그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 또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친히 그의 나라로 데려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소망을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말미암아 깊은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이루어주신 그의 모든 구속 사역들을 아주 실감나고 정확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세 종류의 현대인의 인생관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무엇이든 네 것은 내 것이고,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빼앗고 말 것이다" 이는 강도의 인생관입니다.

   둘째, "무엇이든 내 것은 내 것이고, 나는 그것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인생관입니다.

   셋째, "무엇이든 내 것은 당신 것이고, 나는 그것을 당신과 함께 나누기를 원 한다" 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인생관입니다.

   당신은 어떤 인생관을 따르고 싶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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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갈라디아서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 허윤욱-

                                           서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하여 십 년 전에 횃불에 연재된 채 묻혀 있었던 이 글이 다시 빛을 보게 됨에 한없는 감사와 눈물이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때는 학자들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략 서기 55년경으로 본다.

   순수하고 깨끗하고 너무도 아름다운 교회가 성령님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나,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했던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에게 사단의 역사가 시작되니, 지도자들이 변질된 교리를 받아들이고 양들이 그것을 좋게 여겨 급속도로 썩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사단이 가라지를 뿌린다고 하신 주님의 예언의 성취였다.

   이 때에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대변하는 대변인이 되어 악을 제거하고 진리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이 서신을 쓰게 되었다. 이 분노는 이스라엘의 음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일어날 때에 창으로 시므리와 고스비를 찔러 악을 제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여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받았던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의 분노와 같다(민수기 25장).

   오늘날은 갈라디아 시대보다도 더 혼탁하여 복음을 듣고자 하여도 정직한 복음을 듣기 힘들며, 진리를 왜곡하여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종교로 만들고, 그 집단 속에서 순응하지 아니하면 이단으로 정죄 당하는 슬픈 현실이 되었다.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성경적으로, 양심적으로 진지하게 믿으려 발버둥쳐도 거대한 종교 집단에 순응하지 아니하면 정죄 당하는 현실 아닌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기도 부끄러운 현실이 아닌가? 성경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서 성경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종파의 헌법을 더 주장하면서 사람의 가르침을 더 따르지 아니한가?

   필자는 썩을 대로 썩어 가는 한국 기독교 현실을 바라보면서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쓰여진 이 글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떼들의 길잡이요 등불이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어 이글을 읽고도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비극은 없었으면 하는 기도와 바람이 있다.

   다소 직설적이고 강력한 책망의 표현이 있을지라도 비느하스가 가졌던 거룩한 분노로 받아서 소화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 글이 다시 빛을 보기까지 기도해 주신 동역자들에게 감사하고 전도출판사 직원들에게 감사드린다.

                                                                                                                             2001년 8월


             사람을 따라 몰려다니는 기독인들이여!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갈라디아서 1:1)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경도 사람이 기록한 책이 아니냐?"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니냐?" "특별한 지능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책이 아니겠느냐?" 하며 근거도 없는 자신의 외고집 생각만가지고 질문하는 것을 보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성경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진실은 하나님이 보장하시고(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증명은 성경이 담당하고 있다. 성경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깨우치심 없이 성경을 깨달을 수 없다.

   우리는 말씀이 하나님 자신인 것을 요한복음 1장 1절을 통해 알고 있다. 또한 말씀은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주체가 된다고 요한복음 12장 48절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모든 신자가 읽고 순종하고 높이고 신앙의 지표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고, 사람 중심으로 모여지며, 사람에 의해서 건설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본래 초대교회는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심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기 시작하심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창세전에 계획되었으며, 구약에서 예언되고 준비되어 신약교회 시작 전에 이루어져 신약교회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이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주님께서는 이 일에 사람을 사용하셨을 뿐이다.

   금일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사람의 이름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종파를 만들어 여기에 소속하면 잘 믿는 것이고 이 종파에 소속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각 종파들은 대부분 불과 3,4백년을 넘지 않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그들만이 순수하고 정통인 것처럼 착각 속에서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렇다면 그들 전에 순수하게 믿었던(종파와 소속없이) 사람들은 무엇이었던가? 초대교회의 12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은 금세기에 있는 아무 종파에도 속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들 모두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인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필자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의 순수한 진리를 잘 설명하여 주어도 자기가 소속한 교회의 목사님의 말은 무조건 따르지만 성경말씀은 따르지 않는다.

   슬프다, 현실이여! 어쩌다 성경의 권위가 이토록 떨어졌단 말인가? 성경이 사람의 말보다 못하단 말인가? 성경을 사람의 말과 가르침보다 푸대접하는 이 세대는 정죄 받아 마땅한 세대다.

   사람을 무조건 따르다가 망한 사람들의 교훈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사무엘하 15장부터는 압살롬의 반역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다윗을 반역한 압살롬이 자기의 세력을 넓히고 다윗을 몰락시키기 위하여 사전에 헤브론으로 사람을 모을 때, "청함을 받은 200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사무엘하 15:11)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왜 가야하는지, 자기를 청한 압살롬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사람만 보고 몰려갔던 것이다. 압살롬은 그 외모가 다른 왕자보다 뛰어났으며, 그는 다윗의 왕자였으니 차마 아비를 배반하랴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생각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외모와 상황과 신분만 보고 바보처럼 따라갔던 이 사람들의 말로가 처참했다. 이 사건은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을 잘 예언하여 주고 있는 한 폭의 그림이요 거울이다.

   금일에도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자로 위장하는 자칭 하나님의 종들 중 거짓 종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오늘날 각 종파들이 만들어놓은 모든 절차를 다 밟아서 정상적으로 목사의 직분에 이르렀으나, 성경은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들 중 거짓 종들이 얼마든지 섞여 있을 수 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복음 7:15).

   조심하여야 한다. 반드시 조심하여야만 할 것이다. 어린 양떼들이여! 저들이 지극히 거룩하게 보일지라도 거짓 목자이며, 거짓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말씀은 거짓일 수 없으니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이리"라는 말씀을 잘 묵상하기 바란다. 자식된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반할 줄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오늘에도 입만 열면 하나님을 높이고 거룩한 하나님의 종처럼 보이는 그들이 어찌 거짓 종일 수 있느냐고 의심할지 모르나 압살롬을 따랐던 자들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버지를 반역하여 모반한 압살롬과 다윗의 싸움은 18장에 나오는데,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모른다. 2만을 헤아리는 백성이 희생되었으며,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다"는 기록이 주는 교훈이 크다고 생각한다(사무엘하 18:8).

   오늘날 영적인 세계의 혼탁한 상황은 수풀을 가리키는바, 이 영적인 세계의 수풀 속에서 사람을 따라 방황하다가 죽어 가는 불쌍한 양떼들을 말함이 아닌가? 그들은 진리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 이 종파, 저 종파로 몰려다니며 방황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죽어간 것이다. 자신들은 잘 믿는다고 알았는데 왜 지옥에 갔는지 그 이유를 지옥에 가서야 비로소 알 게 될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울며 이를 간다"고 기록하고 있다(마태복음 13;50).

   오늘의 기독교인들이여! 양떼들이여! 사람을 따르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

   "이 땅에 괴이하고도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예레미야 5:30,31).

   이와 같은 일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고 보여진다. 성경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욕심대로 가르치고 인도하여도 사람들은 분별없이 따르니 도대체 어찌 하려는가? 선한 양떼들이여, 불쌍한 소경들이여!

   이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그들의 행위는 괴이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의 가르침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금일의 기독교계서 행해지고 있는 사례들을 보면 기본 상식과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따르고 있다.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육신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운영하여 교회가 물질화, 인본주의화 되어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모습은 지극히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들은 에서의 망령된 길을 스스로 따르고 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처럼 스스로 팔린 사람들이다. 사람의 생각대로 믿으며, 이권을 따라 움직이는 현실은 신구약 여러 곳에서 지적하는 죄악이다.

   둘째로, 그들은 거짓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발표하였다가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아직도 그러한 거짓 것을 따라가는 우매한 교인들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복음 24:36).

   그들이 거짓 것을 예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해방자라 하여 폭력적 권력이나 독재자들로부터, 억압자나 가진 자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날 기독교의 가면을 쓰고 정치운동을 하거나 사회운동을 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예수님께서 해방자인 것은 성경도 가르친다(로마서 8:1,2).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사망(지옥)으로부터의 해방자이시지, 독재자나 착취자로부터 해방자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또 그들은 거짓 것을 가르치되, 열심히 노력하고 교회 제단에 충성하면 은혜 받고 천국에 갈 것처럼 가르치나 성경에는 그런 가르침이 없다. 오직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 구원을 받을 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다만 이 엄청난 구원을 단번에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감격, 감사하여 자의적 충성으로 주님을 섬기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의 무리인 교회가 있을 뿐이다.

   셋째로, 그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옛날 타락된 제사장들은 제사장직을 하나의 권력으로 생각하여 권위주의를 발전시켜 나갔었는데, 금일의 기독교 상황은 목사를 공공연하게 제사장으로 비유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처럼, 가르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마태복음 15장 4절 말씀을 읽지 못하였는가? 성경은 구원 받은 자면 다 제사장이라고 선포하고 있지 아니한가! 루터가 만인제사장주의를 부르짖은 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잊었는가!

   "너희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베드로전서 2: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베드로전서 2:9).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있는 대로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닌가?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제사장처럼 가르쳐 교인들 위에 군림하여 자신을 잘 섬기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며, 자신의 말을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저주 받는다고 협박하여 양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무서운 죄악이 백주에 자행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섬기면 복 주고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저주해 버리는 독재자인가? 무서운 심판자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모습인가? 물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양면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공포에 사로잡혀 성수주일 안 하고 십일조나 기타 헌금실적이 부실하면 당장에 저주를 퍼붓는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보이게 하는 현실은 탄식할 일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기독교를 병들게 한 권위주의, 즉 일인목회주의는 반드시 타파되어야 한다. 성경은 그와 같은 가르침을 동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중보이시다. 이 일에 필요하다면 사람이 쓰임 받을 수 있겠으나 중보는 한 분 예수님뿐이시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사함에 대한 중보이시다. 그분은 인간 편을 바라보실 때 죄 속에서 죽어서 죄값으로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딱한 처지를 보셨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죄 문제와 싸우다 죽어 가는 슬픈 존재인 것을 주님이 보셨던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하나님의 편을 바라보실 때 인간을 사랑하시나 죄는 사랑하실 수 없고, 인간과 같이 계시고 싶으시나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으신 거룩하신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보셨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을 천국에 데려가고 싶으시나 죄와 한 덩어리가 되어있는 죄인을 데려가실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을 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에 해결하셔서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을 다 충족시켜주신 완전한 중보자(중재자)가 되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영원한 속죄! 독자여, 이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깨달은 적이 있는가! 만약 그대가 마음속 깊이 이 말씀을 깨달았다면 그대는 구원 얻은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다. 그대의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지을 미래의 모든 죄가 영원히 해결 되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를 씻었다! 말끔히 씻었다! 이제 그대가 할 일은 이 십자가의 속죄를 단순히 감사하여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았으며, 거룩해졌다고 성경은 이미 선포하고 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내)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이 말씀으로 의로워졌고 구원받았기를 바란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중보가 되신 것은 천국의 하나님과 우리를 만나게 해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주님은 공중에 오셔서 우리를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데려가셔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4:15~18).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비록 어떤 성도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구원받은 모든 자가 이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복스러운 영생의 소망이다. 주님은 친히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2~3).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동참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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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경  개 요


                                             제3과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사사기


   사사기를 상고하게 되면 여호수아의 염려에는 상당한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백성들은 거듭거듭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국 군대에게 압박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사라 불리는 군사 지도자를 일으켜 압박하는 나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구원자를 통하여 겨우 평화를 누리게 되면, 이스라엘은 이 역사적 교훈을 잊어버리고 다시 우상숭배에 빠지곤 했습니다.

   한편 사사기라는 책명(冊名)은 이 책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위태로운 시대에 그 민족을 구원한 탁월한 지도자들의 이름과 행적이 기록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처럼 간략하게나마 살펴 본 사사기의 배경을 통해, 독자는 앞으로 드보라나 기드온이나 삼손과 같이 유명한 인물의 이야기를 읽을 때에 이들과 이스라엘 민족 역사와의 관계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드보라는 총사령관으로서의 놀라운 담력과 승전의 노래로 유명하며, 기드온은 그가 어떻게 소명을 받았는가 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더불어 그가 어떻게 나팔과 햇불과 항아리로 무장된 300명의 군사만으로 대승리를 거두었는가 하는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또한 삼손의 경우는 그의 초인적인 체력에 경악을 금할 수 없지만, 그의 도덕적인 약점에서는 서글픔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사사기는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상태가 매우 타락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다음의 한 마디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룻기


   룻기는 사사시대에 있었던 사건의 기록입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어 나오미라 이름한 여인이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으로 가면서 시작됩니다. 그 곳에서 나오미의 아들 둘이 각기 모압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그 중의 한 여인이 바로 룻이었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후에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한 여인의 남편이 죽으면 가까운 친족이 그 과부와 결혼하여 그 가문을 잇고 재산을 보존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룻의 전 남편의 친족 중 보아스라 이름하는 아주 인자한 사람이 룻과 결혼할 의사를 밝힘으로써, 그는 룻의 친족 구속자(kinsman redeemer) 되었습니다.

   그후 룻이 아들을 낳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룻은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마 1:5).


                                                    사무엘 상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지 약 280년 쯤 지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상 최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제사장이 타락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대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었는데, 이렇듯 이들이 불량자로 드러나자 이스라엘 민족은 영적인 지도자를 대망(待望)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사무엘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의 출생을 기점으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대신 선지자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사무엘은 최초의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백성들에게 죄에서 돌이킬 것을 경고하고, 때로는 백성들이 순종하거나 불순종함으로 당하게 될 분명한 사실을 예언하는 일 등을 하였습니다. 최초의 지자였던  사무엘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여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는데, 그들 중에는 사무엘이 세운 학교에서 배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처럼 내부적으로 연약해 있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외부적으로는 블레셋 군대로 인하여 괴로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사무엘에게 나아가 다른 민족처럼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신정국가(神政國家) 였는데, 이제 그들은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거절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울 통치의 초기에는 서광(瑞光) 이 비치는 것 같았으나, 그는 참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점 점 죄에 깊숙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가 행한 실정(失政) 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울은 아론의 자손이 아니면 할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2. 사울은 불필요한 맹세를 함으로써 그의 아들인 요나단의 생명을 잃을 뻔했습니다.  

   3. 사울은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명하셨던 아각이라고 하는 적국(敵國) 의 왕을 살려 주었습니다.

   4. 사울은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였습니다.

   5. 사울은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죽임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청년 다윗을 시기하여 거듭거듭 죽이려 했습니다.

   6. 사울은 점장이를 찾아가 장래의 길흉(吉凶) 을 물어 보았습니다.

   사울이 세 번째로 과오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를 버려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어 그 대신 다윗이 후계자로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는 했지만, 사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을 다스리기는 고사하고 사울의 마수를 피해 수 년 동안이나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사울은 블레셋에 패하여 그의 세 아들을 비롯한 수 많은 군대를 잃고, 블레셋 사람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차라리 자살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최후를 맞았습니다.


                                                          사무엘 하


   사무엘하의 대부분은 다윗의 통치에 관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도 다웃은 칠년 반 동안이나 유다만을 다스렸습니다. 이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북쪽에 있는 지파들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두 세력 사이에 전란(戰亂) 이 일어나게 되었고, 마침내 이스보셋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비로소 다윗은 이스라엘 전국을 통치하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왕 위에 오르자마자 이스라엘 주위에 있었던 적국들, 그 중에서도 블레셋을 쳐부수는 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 삼았으며, 그 곳에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장군으로서 전쟁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보좌가 영원무궁하리라는 것과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그 좌에 앉게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한편 11장에는 다윗이 추악한 죄를 짓게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건이 있은 뒤. 일 년쯤 지나서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를 책망했을 때 다윗은 회개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가정에 가혹한 환난을 보내사 그를 징계하셨습니다. 그 징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범죄의 열매였던 그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2. 그의 아들이었던 암논이 또다른 아들 암살롬에게 살해당했습니다.

   3. 암살롬이 반역하여 다윗이 도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암살롬은 죽임을 당했고, 다윗은 무사히 예루살렘에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뒤 다윗은 그의 통치가 끝나게 될 무렵, 주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교만하게도 이스라엘의 부강과 국력을 과시하려고 인구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염병을 통해서 이스라엘인 70,000명을 멸하셨습니다. 이에 다윗이 회개하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셔서 그 재앙을 멈추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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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개요


                                  제2과 가나안까지의 여정


                                                           레위기


   레위기는 제사장들의 지침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머물구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해 주신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레위기의 주요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다섯 가지 제사 곧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죄제와 속건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을 통해서, 이러한 제사의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제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여러 면에서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2. 제사장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거쳐야 하는 여러가지 예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정한 동물과 돼지와 같이 먹어서는 안되는 부정한 동물에 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4. 남자나 여자의 정결케 되는 규레와 정절에 관한 율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 문둥병의 진단과 치료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6. 이스라엘 민족이 엄수해야 할 성일들 곧

     <1> 안식일          <2> 유월절          <3> 무교절

     <4> 초실절          <5> 칠칠절(오순절)<6> 나팔절

     <7> 속죄일          <8> 초막절

     등에 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이미 살펴본 대로 민수기 1장에서 10장 11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모든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머물 때 일어난 것입니다. 실제로 이 대목의 말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장을 꾸려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시내 산에서 어떤 채비를 하고 있는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그들이 질서 있게 행진 하기 위해 해야 할 최급선무는 백성들을 계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시내산에서 약 일 년간 유진한 후 백성들은 다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광야 여행은 원망과 반역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들의 패역은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을 때 절정에 달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대해서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해 주셨으므로, 그들은 오로지 확신을 가지고 그의 대적들을 추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정탐꾼들은 가나안에 있는 적을 이길 수 없다고 보고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같은 불신의보고와 이에 따른 백성들의 원망은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케 했습니다. 그 징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40년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유랑하게 되었습니다.

   2. 20세 이상된 사람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40년이라는 기나긴 광야 방랑의 역사에 대해서 성경은 별반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두 가지 주요 사건을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1. 모세는 므리바에서 불순종한 대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한 죄로 불뱀의 재앙을 받았습니다. 그때 모세가 장대에 달아놓은 놋 뱀을 쳐다 보는 자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수십년의 지루한 방랑 끝에 그들은 다시 가데스바네아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모압 평지를 향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모압 평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 그들이 마지막으로 진을 친 곳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마지막  인구조사를 실시했고, 가나안에서의 토지 분할에 관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신명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가 임박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철저하게 한 가지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만이 약속의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의 과거사를 회고하며 세세한 율법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즉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것을 강권하는 한편 우상을 멀리하라고 역설했고, 이방 민족들과 교류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당시 가나안을 향해 행진을 시작한 이 백성들은 새로 태어난 세대였으므로 그들 선대(先代)의 실수와 그들이 받았던 율법에 대하여 정식으로 배울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밖에도 모세는 그들에게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율례와 교훈을 들려 주었습니다. 이는 우상 숭배, 거짓 선지자나 왕의 선출, 전쟁 등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또한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상이(相異)한 결과도 상세하게 일러 주었습니다.

   한편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스라엘의 장래가 예언되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는 마지막 순간에 열 두 지파들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시체를 모압지방의 어느 알려지지 않은 무덤에 장사되게 하셨고, 여호수아가 그를 대신하여 지도자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서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에 쳐들어가 원주민을 진멸하고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토지를 분할해 줌으로써 이 백성들을 정착시켜야 하는 중대한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그 예비 단계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기업이므로 그 땅을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은 가나안 족속, 헷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등이었는데, 이들은 그들이 행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죄의 대가로 마땅히 진멸되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을 그들과의 통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도 그들은 진멸되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가나안을 공격하기 위해 먼저 여호수아는 정탐꾼 두 사람을 여리고에 보냈습니다. 여리고는 첫 공격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곳에는 라합이란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비록 죄인이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선대하였습니다. 결국 라합의 이런 처사는 마침내 자신과 그녀의 가족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한편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강물을 막아 이들로 마른 땅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먼저 가나안의 심장부를 강타한 후에 여세를 몰아 남방을 정복하고 최후로 북방을 공략하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최초로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반면 아이 성은 여리고 성보다 작았으나 이스라엘 진영에 죄가 있었기 때문에 함락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죄를 밝혀내고, 이에 응징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남방을 공략하려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의 다섯 왕들과 접전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패하여 후퇴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박을 내리시고 낮 시간을 연장하셔서 이스라엘로 적군을 완전히 진멸케 하셨습니다.

   북방 공략은 하나님께서 적군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셨던 메롬 물가를 중심으로 벌어져 이스라엘이 그들을 완전히 전멸시키지는 못했지만 일단 전략대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정복 후 토지를 어떻게 분할하였는가는 성경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강 동쪽에 있는 땅을 기업으로 받았고 나머지 아홉 지파 반은 요단 강 서편의 본토를 기업으로 분배받았습니다. 요셉 지파의 기업은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기업으로 분배되었고, 레위 지파에게는 분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족속이므로 여호와께서 직접 그들의 분깃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보는 대로, 요단 강 양쪽에 각각 세 개의 도피성이 있었는데, 이는 불의의 사고로 살인하게 된 자를 안전하게 도피시키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42성읍을 성막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에게 따로 구분해 주셨습니다.

   이 책 마지막 부분인 여호수아가 임종을 앞두고 백성들에게 행한 연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 교류함으로써 우상 숭배에 빠질까 영려하는 여호수아의 심정이 역력히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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