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에는

                        2장

                         불신자에게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에게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있는가?" 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 더욱 엄숙하고 진지한 주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곧 "불신자에게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장차 오는 세상의 실제성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회개치 않은 불신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오는 세상은 바로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시 문제는 별개로 하더라도 우리가 확실히 느끼는 것은 그 사랑하는 제자였던 요한이 영원세계에 대해서 말한 것은 모두 그에게 있어서 매우 실제적인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헌신적으로 좇았던 사도 바울도 오는 세상에서 그 신실함에 대한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는 것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했던 다윗이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정죄하고, 구주되신 주님을 높인 십자가의 강도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죄하는 피를 통한 구원으로부터 돌아선 가인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때 마음에 깊은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한 그릇 팥죽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와, 은 삼십에 영원한 축복의 소망과 맞바꾸어버린 배도자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과 또 이와 같은 부류에 속한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한 호흡을 멈추고 묻고 싶습니다.

   과연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하고 끝없는 미래는 무엇입니까?


   욥기 14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ghost)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라는 구절을 대하게 됩니다. "기운(ghost)이라는 단어의 앵글로 색슨족의 고어체 표현은 독일어 "geist"와 유사합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영"(spirit)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죽을 때에는 영이 나가게 되는데, 문제는 바로 그 영이 이디로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몸은 장사되어 매장되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처리될 것이지만, 과연 그 몸 안에 일생동안 거주하며 살았던 영적인 실체는 어떻게 될까요? 욥기 14장 14절에 보면 또 다른 질문이 있는데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그러므로 여기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죽음과 미래의 부활 사이에 있는 사람의 상태와 관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부활하게 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제부터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 즉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장래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임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불신자가 몸이 죽게 되면, 어디로 가게 되며, 과연 그 몸은 무덤에서 다시 부활하게 될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떠난 답변은 아무런 권위가 없습니다. 인간의 사색은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합리적이지도, 온당하지도 못합니다. 성경의 증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무덤 너머의 삶의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100년 전, 곧 소크라테스 시대에 살았던 헬라 철학자들이 생명과 죽음과 불멸에 대해서 논했던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학에서는 플라톤에 대한 연구와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 시대의 사람들은 여전히 영혼불멸에 대한 옛 철학자들의 논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진보가 있었다는 것이 수긍이 가고 또한 사실임에도 여전히 권위 있는 해법은 없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기만 합니다. 영혼의 문제는 여전히 불확실한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에게 명확한 지식을 제시하고 잇습니다.

   우리가 이 궁금한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고자 한다면 성경의 어디를 찾아보아야 할까요? 구약성경은 아닙니다.

   마음을 가다듬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서도 물질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그러한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다양한 분파를 가진 안식일교와 그리스도아델피안,(삼위일체 하나님과 타락한 천사, 마귀, 영원한 지옥불은 비성경적이고 타협과 관습으로 형성된 사상들이라고 주장하는 무리-역자주) 러셀파(여호와의 증인 창설자-역자주)와 및 소규모의 이단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 죽은 자의 무의식적인 상태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가운데는 심판 후에 악한 자의 영혼소멸론(annihilation)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가운데 자신들의 이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을 인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구약성경 구절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구약성경 가운데서도 세 곳, 즉 욥기, 시편, 전도서에서 그 근거 구절을 제시하고 있고, 특히 전도서를 많이 인용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구약성경은 영원미래에 대한 계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로 이생에서 개인적이고 국가적인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구약성경은 다른 성경과 더불어 경험적인 책으로, 우리의 인생에서 겪게 되는 경험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 여기서 사용된 '썩지 아니할 것'(immortal), '불멸'(immortality), '영생'(eternal life)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물론 신약시대뿐 아니라 구약시대의 모든 경건한 자들은 모두가 다 직관적으로 그에 대해 믿고 있었음은 사실이며, 장차 그에 대해 공개적이고 완전히 드러나도록 선언하실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구원 이전에 속죄제사의 필요성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고, 영원에 대한 문제들이 계시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을 드러내신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분명한 것은 이 위대한 진리들이 구약성경에서는 완전히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그에 대해 희미하게 볼뿐입니다. 후에 계시를 통해서 주어진 복음의 충만한 빛을 통해 우리는 확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불멸의 소망을 전혀 가지지 못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도들도 그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성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은 욥기일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욥도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욥은 큰 소리로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족장들을 언급하면서 죽는 것을 자기 조상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말했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실제로 죽여서 제물로 바칠지라도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습니다(히 11:17~19). 이러한 일은 확실히 아브라함에게 영생의 믿음이 없었다면 결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었을 때, 금식기도하고 많이 울었지만, 아이의 죽음을 알았을 때는 눈물을 그치고 숙고한 끝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리라"(삼하 12:23)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다윗은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고 외쳤습니다.

   사무엘 모양을 한 노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나타난 흥미로운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싶진 않지만, 사울에게 한 그의 말은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서들 가운데는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음에 대해 알려주는 여러 본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인정은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구약성경 기자들의 목적은 이 위대한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으며, 이미 언급했던 경험적인 책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떤 본문들이 그 반대적인 것들에 대해 언급하는 듯 보여도 놀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일은 문맥을 따라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러할 때 전적으로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이제 여기서 진지하고도 냉정하게 한 문장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놀랄 분이 계실지 모르고, 곧 궁금증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지만, 진실되지 않은 구절들이 많이 있다!"

   잠시 이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종종 성경의 어떤 본문이 논쟁을 불러 일으킬만한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맥과 정황에서 벗어난 본문의 일부가 해악한 성경해석 오류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완전히 거짓된 이단의 기본 신조로까지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몇 년 전 유명한 남부출신 변호사가 켄터키 주 판사 앞에서 어떤 소송에 대한 변호를 맡았는데, 곧 그 의뢰인이 자기 생명에 대한 변호를 의뢰했던 것입니다. 검사가 배심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소장을 읽었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한 권한은 바로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판사에게 상당히 인상적인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검사가 바로 성경에서 그 글을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검사가 소장 읽기를 마쳤을 때, 변호사가 일어나 "검사께서 최고한 권한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우리도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을 펴서 욥기 2장의 사단이 말한 부분인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를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극적인 효과를 살리면서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기소한 검사는 최고한 권한에 대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습니다. 물론 사단에게도 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구절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단이 한 말이고, 또한 이것은 많은 경우에 진실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꾼다:는 것이 언제나 사실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 헌신된 허다한 제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일전일획이라도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일은 제가 "성경과 관계된 것들이 다 참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드린 바를 잘 보여주고 잇습니다. 성경에는 마귀가 한 말이 있고, 욥의 친구들과 같은 선인들이 한 말도 있는데, 그들이 한 말 가운데는 성령님의 감동이 없이 한 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인 성경에는 매우 악한 사람이 한 말도 기록되었지만, 그 말이 곧 하나님의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인의 마음속에 있는 사상과 이론들도 때로는 기록되었는데, 전도서가 그와 같은 책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 가운데 특히 경험적인 책들을 읽을 때,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읽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우리에게 죽은 사람들은 아무런 상급이 없다고 말합니다..(전 9:5).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진리로 받게 되면 그것은 곧 전도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감동을 통해 솔로몬이 말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니라"(전 12:13,14)는 구절 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계시를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전도서가 영감 받지 않은 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왜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우리에게 자기의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 것에 대한 기록을 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솔로몬은 사람들이 죽고, 장사되는 것을 보았고, 그 가운데 다시 무덤에서 나온 사람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전 9:5) 라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이 구절이 과연 죽은 자들이 몸을 떠나면 완전한 무의식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생각과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없는 시신은 바로 어제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그 머리에 가득했던 세상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생각이 짧고 피상적인 사색가는 "죽은자는 아무것도 모르며"라는 구절을 가지고, 신약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반박할 것이며, "영혼의 잠"과 같은 교리를 들고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동일한 표현이 사무엘상에서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약조를 맺는 일 가운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들에 숨어 있었고, 요나단은 자기 부친을 살피고 과연 다윗의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돌아갔습니다. 요나단은 동행한 아이를 시켜 그를 들로 보내고 화살을 쏘기로 미리 다윗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앞 편에 있다" 하면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줄로 알도록 했고, 혹시 "보라 살이 네 이편에 있다"고 하거든 다윗이 안전하다는 표시였습니다. 그 계획은 약속대로 진행되었고, 요나단은 아이 뒤에서 외치되 "살이 네 앞에 있지 아니하냐"고 말했고, 다윗은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는 아무런지 알지 못했다"는 글을 보게 됩니다(삼상20:17~42). 그 소년이 무의식 상태에 있었기 때문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아이는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있었던 약조에 대해서 몰랐던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표현들이 사용된 여러 가지 사례들을 일일이 소개하자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여러분이 직접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말라기서의 마지막 장을 보면, 악을 행한 죽은 자들의 운명에 대한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이는 본문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4:1~3).

   말라기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점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말라기 선지자가 여기서 죽은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주님의 재림 시에 있을 이 땅의 악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 예언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심판은 천년왕국 이전에 있을 심판을 말하는 것이지, 천년왕국 후에 있는 심판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사람들이나 그들의 부활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은 바로 주의 날을 가리키며, 죄로 물든 악한 자들은 그 뿌리와 가지가 함께 살라질 것이며, 뿌리와 열매도 모두 다 태워질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러한 심판을 행하시는 그 날에 발바닥 밑에 재와 같을 것입니다.

   이 말씀들이 죄 가운데 죽은 사람들의 영혼소멸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말씀은 그 때에 있을 심판이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심판과 성격에 있어서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롯과 그 식구들이 소돔 성을 떠나던 날,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그 성 사람들과 그 땅과 뿌리와 가지를 다 살라버렸습니다. 만일 롯과 그의 삼촌, 아브라함이 심판이 끝난 며칠 후에 소돔과 고모라 성을 돌아보았다면, 그 악한 자들이 그들의 발바닥 밑에 재가 되어버린 것을 친히 목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이 구절들이 영혼소멸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수세기 후에 기록된 유다서에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7절)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주님이 이 땅에 계신 동안 하신 그분의 말씀을 거절한 자들에 대해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0:15)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비록 뿌리와 가지가 살라지고, 의인들의 발바닥 밑에 재와 같이 될지라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또렷한 의식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으며, 심판 날에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구약성경에 머물지 않고, 또한 사도들의 말이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주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저는 바울이나 베드로, 또는 요한의 가르침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려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악한 자의 영원한 심판에 관해 기록된 엄숙한 경고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예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자신들이 바라는 전부라고 말합니다. 곧 자신들에게는 산상설교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친구여! 산상설교에서도 영원한 심판에 대해 가르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없이 죽은 자들의 실제적인 상태에 대해 더욱 많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마 5:29,30). 하나님의 복되신 아들,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곧 이 땅에 살았던 가장 충성된 인자이신 주 예수님보다 더 죄인들 앞에 놓여있는 파멸적인 운명에 대해 심각하고 엄숙한 말을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 곳"에 대해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베드로가 아닙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것"에 대해 말한 사람은 바울이 아닙니다.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49)는 말을 한 것은 요한이 아닙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악한 자의 형벌에 대한 거의 모든 교훈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의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형태를 누가복음 16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이야기는 단지 비유일 뿐이잖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습니까? 성경입니까?

   이 말씀은 비유라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비유란 어떤 진리를 그림처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화 혹은 이야기입니다. 여기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비유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비유는 일반적으로 "비유를 말씀하여 가라사대... "와 같은 식의 표현이 먼저 나오지만 여기 누가복음 16장에서는 그러한 표현이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이것이 비유라 하더라도, 이 말씀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채 죽는 자의 가공할만한 두려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확실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그 시대의 청중들과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난 느낌이나 인상은, 여기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교훈의 목적과 같이 자기 죄 가운데 죽는 일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이 도입되는 부분의 자연스러움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교훈하시는 과정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이 부자가 실제로 있다는 얘기입니까, 아니면 없다는 얘기입니까? 예수님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추측해보자'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러한 사람이 확실히 존재하며, 그 사람이 어떠한 옷을 입었고, 얼마나 값비싼 음식으로 잔치를 베풀었는지에 대해 명확히 선언하셨습니다.

   제가 설교하는 중에 최근에 회심한 아리조나 주에 사는 어떤 인도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제 설교가 끝나는 즉시 여러분은 "설교 중에 말씀하신 그 인도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 그 사람이 회심한지는 얼마나 됐지요?"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 제가 "너무 진지하게 들으셨나봐요 그것은 단지 비유일 뿐입니다. 단지 예화를 든 것 뿐이라구요. 저는 그런 인도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이 제게 "그렇다면 당신이 우리에게 마치 그러한 사람을 실제로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은 참으로 정직하지 못한 것이며,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도 부정직한 일입니다."라고 지적하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확하게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날 모든 청중들에게 믿도록 말씀하신 것은 그 이야기 가운데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언급하시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있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추측해서 말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이름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거지의 이름을 언급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주 예수님이 그 나사로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우리는 과연 심판의 날까지 그 부자의 이름을 알지 못할 것이지만, 그 거지의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믿음에 부요했던 나사로는 그리스도의 양무리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이야기와 관련해서 매우 상세히 언급하셨고, 심지어 나사로에게 와서 헌데를 핥던 개들조차도 언급하셨습니다. 만일 이것이 단지 비유라면 비유적인 부자의 비유적인 집의 비유적인 대문에 누운 비유적인 거지에게 비유적인 개들이 와서 비유적인 헌데를 핥았을 것이고, 거지 나사로를 지켜보며 비유적인 음식을 먹지 않았겠습니까? 종종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청중들은 주님이 설명하시는 일들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믿는 자의 조상으로 낙원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이 구속함을 받은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환영을 받으며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자들이 죽을 때,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 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품속에 들어가는 일은 구약 성도의 분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자의 경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도 죽어 장사되었고, 육체에서 분리된 그의 영은 다른 세계로 들어 가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여! 저는 지금까지 할 수 있는 대로 성경에서 여러 차례 인용해왔습니다. 지금 저는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가 "천국은 가득하게 하시고, 지옥은 텅 비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리차드 백스터가 쓴 책을 탐독했고, 다양한 견해를 가진 신학자들이 쓴 여러 권의 책들도 읽으면서, 자기 죄 가운데 죽은 사람들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는지를 부지런히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 본문에서 그 옛날 앵글로 색슨어인 "지옥"(hell)이라는 단어는 버리고, 대신 헬라어인 "하데스"(hades)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이 "하데스"라는 단어는 형벌의 장소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하데스"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음부(陰府)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 헬라어를 다음 구절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저가 '하데스'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장소의 이름은 바뀌어도,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그 고통은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하데스'를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장소 또는 상태로 본 것은 큰 실수입니다. '하데스'는 단지 무덤의 의미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말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확신하는 바에 의하면 성경은 그 반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말이 나왔으니, 지옥이라는 단어와 무덤이라는 단어를 바꿔서 적용해보겠습니다.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저가 무덤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어를 바꾼 것만으로는 그 고통을 없애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 단어를 무덤으로 불러도 좋고, 단지 "음부"(陰府) 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또는 "영계"(靈界)로 읽어도 좋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그 어떤 말로 불러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가 간 곳이 어디이든지, 또는 그곳의 이름을 무엇으로 부르든지 간에 한가지 엄중한 사실은 그가 고통 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까? 그 두려움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이 필요합니까?

   당신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당신은 이 가련한 사람, 곧 십자가의 구속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은 이 부자가 고통의 수렁에서 애걸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두가지 애처로운 간구를 올렸지만 둘 다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선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바싹 마른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던 생수를 거절했던 그 부자는 이제 영원한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생수가 전혀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 부자의 또 다른 간청은 다섯 명의 동생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내가 만일 지옥에 간다면,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겠소. 그렇다면 지옥에서 그들과 같이 있으니 외롭진 않을 것 아니오."

   그러나 나의 친구여, 이것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여섯명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멋진 가족입니다! 한 사람은 지옥에 가있고, 다섯은 지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옥에서 "할 수만 있다면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그들이 이곳에서 저와 함께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저희에게 경고하여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며 간청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에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그들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들 스스로 직접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고통 중에 외치며,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의 증거를 받아들이시고, 또한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구주를 영접하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영원히 바깥 어두운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냐, 지옥이냐의 선택의 문제로써,곧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에게 "당신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심판 이전에 그 사람이 고통 중에 있다는 말이 되잖아요. 만일 그렇다면 심판의 날은 왜 필요합니까?" 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간단한 예화를 들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러 체포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주립 구치소에 구금되어 있습니다. 어느 일정 기간 동안,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 실제 범죄 사실이 있다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범죄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다가, 또 때로는 그 사실을 격렬히 부인하기도 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마침내 법정이 열리고, 형이 확정되면 교도소로 보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데스'(음부)는 구치소에 해당하고, '게헨나'(지옥)은 교도소에 해당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우리는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는 날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망은 몸을 내어주고, 음부는 영과 혼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의 부활로써, 생명의 부활이 있은지 천년 후에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기록하기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열리게 될 엄청나게 큰 법정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정한 공의(righteousness)를 따라 형벌이 정해질 것입니다. "불못"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이 품고 있는 그 의미에 대해 그 누가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친구여,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스스로 위험을 감당하려 하지말고, 즉시 피난처 되신 그리스도께로 피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도 폴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가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내게 정죄 없으니, 지옥이 없네.

   고통도 지옥불도 이젠 영원히 보이지 않도다."


   죄인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 "많이 맞을 것이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그리고 그 외 여러 말씀들에 나타나 있는 표현 속에서 그 두렵고 끔찍스러운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멀어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그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영원히 사는 것! 그 무서운 운명에 도전하지 마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바로 지금 은혜로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 피하십시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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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에는


                                                         H.A. 아이언사이드


                                               1장

                              그리스도인에게


   신실한 신자들의 마음속에 많은 궁금증을 주고 있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린도후서 5장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4장의 마지막 세 구절은 5장에 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4장 16절부터 5장 10절까지 우선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는 곧 이 본문이 매우 대조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그 가운데 열두 가지 정도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조심스럽게 본문을 분석해보면 몇 가지 차이점들이 드러나게 되고, 제가 언급하고자 하는 몇 가지 사실들은 더욱 세분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가 늘어나게 됩니다.

   첫 번째, 우리는 "속사람" 과 대조되는 "겉사람" 에 대해 보게 됩니다. 이것은 조심스럽게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겉사람은 옛사람(몸)을 가리키며, 속사람은 영혼을 가리킵니다. 여러부류의 물질주의자들은 영혼의 인격성을 부인하지만, 10절은 그에 대해 명백하게 확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후패하다""새롭다" 가 대조되어 있습니다. 겉사람(몸)은 늙고 쇠하여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시작하자마자 곧 죽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영혼)은 날로 새로워져가고 있습니다.

   이제 17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명백히 대조적인 세 가지 내용을 보게 됩니다. "경한 것""중한 것", "환란""영광", 그리고 "일시적인 것""영원히 있는 것" 이 그것입니다. 환난은 시련 중에 있거나 고난 속에 있는 성도에게 매우 버겁고, 오래 지속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것을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 이라고 부르시는데, 이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는 것으로서, 그 결과가 가져올 복된 결말을 깨닫게 됩니다. 곧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장차 올 여러 세대 가운데 우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대조는 18절에 있는데, 곧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자는 일시적인 것으로, 그리고 후자는 영원한 것으로 선언되어 있습니다. 이 여섯 번째 대조는 현재 다루고 있는 논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종종 조건적인 불멸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몇몇 물질주의 체제 아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는것은,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영원하다" 는 말이 꼭 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시적이라는 말은 분명히 그 끝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이라는 말은 그 끝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만일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몇 가지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면, 하고 있는 말의 진실성과 엄중성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영원한 성령, 영원한 구속, 그리고 영원한 유업에 대해서 읽습니다. 또 한편 영원한 형벌,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도 읽고 있습니다. 과연 성경의 영감성과 그 권위를 믿고 있는 사람이 영원하다는 한가지 말이 때로는 선하다는 의미로, 또 때로는 신성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더군다나 악한 자의 형벌에 관해서 쓰일 때는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감히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대조는 5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 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과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전자는 "무너지는" 것으로, 그리고 후자는 "영원히"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 주목할만한 대조에서 "영원하다" 는 단어가 여기서 세 번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이 단어는 '사라져 버리다'. 혹은 '끝에 이르다' 라는 단어와 완전히 대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일시적인 것은 무너지게 되지만, 영원한 것은 결코 무너지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죽음과 관련된 '벗다" 라는 말과 분명히 부활과 관련된 "입는다"는 말 사이의 대조를 보게 됩니다. 죽을 것은 장차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세 가지 쌍은, 이제 제가 여러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를 바라는 것인데, 곧 6절부터 9절가지 나옵니다. 6절부터 9절까지 살펴보면 우리는 "몸에 거하다" "몸을 떠나다". "믿음으로" "보는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와 함께 거하다""주를 떠나" 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 가르침 받기를 소원하는 진지한 성경학도들이 이 연속적인 대조 내용들을 진지하게 살펴보게 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알고 믿는 자들의 장래 상태에 대하여 분명한 결론을 얻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전체적으로 주의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저는 우리가 "겉사람" 과 "속사람" 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리고자 합니다. 제 자신과 제 몸은 다릅니다. 사람은 독특하게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몸은 겉사람입니다. 영과 혼은 모두 속사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은 지적인 존재의 자리이며, 독특한 실체로써, 우리가 이 특별한 주제를 따로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혼은 사람의 감정적인 본성이 자리한 곳입니다. 이 둘, 즉 영과 혼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경만이 이 둘 사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그 둘이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본성을 받았는데, 이 새로운 본성을 가리켜 "영" 이라고 부릅니다. 영이야말로 속사람의 주요한 특징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6).


   우리가 만일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께서 그의 성도를 모으시기 위한 호령과 함께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는 날까지 살아있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모두 육체를 떠나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무너지게 될 것이며, 우리의 몸은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신자의 상태는 어떻게 될까요? 나의 몸이 죽음으로 인해 자게 된다면, 나 곧 속사람도 몸과 같이 자게 될까요? 아니면 몸을 떠나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모호하게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몸은 곧 속사람이 거하는 장막입니다. 장막은 무너질 수도 있고, 또 살던 사람이 이사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분명히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바이며, 동료 사도인 베드로도 이에 대해 베드로후서 1장 13~15절까지에서 확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다음을 주목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이 땅에 아직 남아있는 동안 그의 몸이라고 하는 장막 집에 있었고, 임종시에 베드로는 그 장막을 "벗는 것" 으로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죽음" (decease)이라는 단어는 "세상을 떠남" 또는 "벗어남"(exodus)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표현은 성경의 두 번째 책(출애굽기)의 제목과 같습니다. 그 책을 출애굽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벗어남"은 그 속 사람이 땅에 있는 장막 집을 벗어날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우 놀라운 성경인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빌 1:21~25).


   이제 동일한 진리를 약간 다른 방식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이 땅에서의 삶은 육신 가운데서, 곧 몸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죽음은 "떠나는 것"으로, 곧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 위해 더 좋은 곳으로 이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삶에 대해 사도 바울은 몸 안에 사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요점은 바로 사람 그 자체와 몸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살아 숨쉬는 진흙 덩어리"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실제로 살아있는 영이 잠시 동안 이 진흙집에서 살다가 죽을 때, 빠져나가게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그 몸이 영광 가운데 하늘나라에 살기에 적합하도록 부활하게 될 때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때에 부활의 몸은 우리의 혼과 영의 영원한 거처가 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제 매우 쉬운 예화 하나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수년 전에 제가 전도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역에 마중을 나왔고, 우리는 함께 마을을 지나서 집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막 보수공사(補修工事)를 시작하는 건물 한 동을 보게 되었고, 그 건물 전체의 상점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모든 상점의 주인들은 공사를 위해 일시적으로 이사간 상태이지만, 건물수리가 마치게 되면 곧 다시 입점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창문마다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건물이 완전히 수리가 되고 새로 단장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

   저는 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신자의 죽음에 대한 이 얼마나 멋진 그림인가!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하늘 집으로 부름을 받는다면, 나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새겨주길 바라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헨리 아이언사이드는 새롭게 단장하고 수리가 될 때까지 잠시 이사했노라.'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전부라오."


   몇 달이 지났고, 저는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여행길에 올랐고, 제가 돌아올 즈음에 다시 한번 이 건물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전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물론 같은 건물이고 벽이나 바닥도 같은 것이었지만, 건물 안팎이 너무도 놀랍도록 바뀌어 있었으며, 모든 상점들은 예전의 자리에서 같은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았을 때, "이것은 참으로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사는' 놀라운 부활에 대한 그림이구나. 그리고 속사람은 새로워진 몸, 곧 동일한 몸이지만, 허물어진 이전의 몸과는 전적으로 다른 몸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의 장막의 속사람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입고 있는 일종의 영과 몸의 연합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러나 다음의 구절들은 이러한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현재 우리가 이 장막 가운데서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며 간절히 갈망하는 것은 죽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공중으로 끌어올리게 될 때,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집을 덧입고자 함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첫째 부활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어나고 변화될 때 우리는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은 구원문제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 곧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게 될 것입니다(요 5;29). 부활의 몸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몸을 입게 될 것이며, 그 날에는 지금은 가난하고, 불쌍하고, 소경되고, 궁핍하고, 그리고 헐벗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일지라도 탄식하는 일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 우리는 우리 죄짐으로 인해서 고통 가운데 탄식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신자는 그러한 탄식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현재 삶의 쇠퇴와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상황으로부터 건짐 받기를 탄식하며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구속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 몸이 종종 우리의 영적인 갈망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까? 따라서 우리가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님의 몸과 같은 몸으로 덧입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죽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울과 같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덧입게 될 복된 시간을 갈망하고 있으며,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고, 우리 몸이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죽을 몸 속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복된 순간에 그분의 살리시는 말씀이 바로 우리 몸 속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이 순간까지 우리 속에서 역사해 오시고, 그 부활의 날에 우리에게 주실 축복의 보증으로 우리 속에 거하시도록 성령님을 주신 것도 바로 이것을 위해서입니다. 그 때까지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몸에 거하는 동안은 주님과 따로 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몸을 떠나라는 부름이 있게 되면, 우리는 우주 속을 떠다니게 되거나, 무의식 속에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즉시 주님과 함께 하늘 집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에 뿌리내린 믿음으로 행하되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확신은 바로 바울처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이여, 아무도 여러분이 가진 특권인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 이라는 네 글자의 귀중함을 빼앗지 못하게 하십시오. 더 나은 번역은 "주와 함께 사는 것" 이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장막 집(몸)에서 살고 있으며, 주와 따로 거하고 있지만, 장차 우리는 장막 집(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간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고무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편히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지금 집에 있습니다. "집이라!" 아, 이 얼마나 감미로운 단어입니까! 그들은 이 땅에서 순례자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된 이름을 위하여 그들은 자발적으로 세상에 속한 모든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시험과 환난 속에서 광야 여정을 마치고, 이제 집에서 안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일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무의식적인 상태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그처럼 냉담한 생각이 참된 것이라면, 어떻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더욱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확실한 것은 바로 바울은 영혼의 무의식적인 잠에 대한 것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바울은 죽음을 잠으로 묘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잠을 잔다는 것은 곧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몸이 잠을 자게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에수님의 몸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신 것처럼, 우리 몸도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리실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다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4절에 사용된 "에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라는 표현은 "예수에 의해서 잠자게 된 자들도" 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보채다가 피곤하여 지친 어린아이를 어머니가 품에 안고 부드럽고 다정하게 잠재우듯이, 주 예수님도 그 사랑하는 백성들을 잠자게 하시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주께서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주님은 그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때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18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누군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하늘 집에 가있는 사람들이 과연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최고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입니다.

   "과연 성경은 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에 대해 추측하거나 상상하는 것은 전혀 지혜롭지 못한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으면서 적어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이 성경에 암시라도 되어있지 않을까요?

   누가복음 15장에는 이와 관련된 매우 귀중하고 아름다운 본문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에서 우리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저는 개역성경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이와같이"라는 표현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사람은 그 벗들과 이웃을 불러모아 다시 찾은 기쁨을 나누고 싶어합니다. '이와 같이" 선한 목자도 한 영혼의 구원에 대한 그 기쁨을 나누고자 친구들을 초청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부자가 온전한 정신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낙원에, 그리고 부자는 음부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부자는 서로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을 사이에 두고서, 비록 영적으로 분리된 상태에 있었으나 대화를 나누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고 하늘에 있는 자들의 경우에는 상호 교제와 사귐 뿐 아니라 그들의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이 얼마나 풍성하겠으며, 더욱이 한 죄인이 회개할 때 주님의 기뻐하심과 같이 그들은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천사들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모두가 다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가졌던 집회 끝 무렵, 허랑방탕한 삶에 빠졌던 한 청년이 그리스도께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우리 몇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 자신의 죄악된 삶으로 인해 애통해 하며 큰 번민 가운데 있었지만,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단순함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완성된 속죄사역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게 되었고, 그의 영혼 속에는 평안이 찾아들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기쁨과 비통의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저를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어머니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오늘 제 자신이 그리스도께 드려진 이 사실을 전보로라도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머니는 저를 위해 수년간 기도해오셨습니다. 저의 죄악이 어머니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마침내 응답되었다는 이 소식을 어머니께 알릴 수만 있다면 제 마음이 얼마나 기쁠까요?"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그렇게 근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확신하는 바로는 형제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한 순간, 형제의 어머니는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은 회개한 죄인으로 인해서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성경말씀들을 통해서 확신하는 것은 죽음을 맞아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신자가 무의식적인 상태에 있다는 그 어떤 암시도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몸을 떠나는 순간, 신자는 주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게 되며, 그 가운데서 주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나게 될 첫째 부활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의 그 날에 잠자던 성도들의 몸은 다시 일어날 것이며, 살아 남은 자도 일순간에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영원세계 내내, 성도의 몸은 영화롭게 되어, 복된 주님과 같이 온전하게 될 것이며, 성도는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끊임없는 행복과 지극한 기쁨을 누리며, 성도의 집인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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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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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길

믿음,신앙 2016. 2. 20. 18:32

구원의 길


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영원한 생

명과 참된 평안을 주시기를 원

하시며 당신이 진정한 행복 속

에 살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사람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사귀며 복된

삶을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

음대로 살면서부터 하나님과

의 사귐이 끊어졌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사야 59;2).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막고 있

는 죄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

이 주시는 축복들을 누리지 못

하고 오히려 허무와 죽음과 심판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23).

인간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씁니

다. 그러나 인간의 방법으로는 죄의 문제를 절대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해결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3.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당신 사이

를 막았던 죄를 처리하셨습니

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

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

니라"(요한복음 14:6).


4.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십시오.

이제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하

나님의 모든 축복들이 예수님

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

안과 소망 가운데 삶의 보람을 찾았습니다.


5. 예수님을 믿는 당신은 영생을 얻었고(요한복음 5:24),

죄사함을 받았으며(히브리서 10:17), 하나님의 자녀가 되

었습니다(요한복음 1:12).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

활이 시작됩니다(고린도후서 5:17).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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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 새로운 출생 (BORN TO WIN)

                                                                                                         -윌리암 맥도날드

                                                                     제 7 과

                                                     본문 : 요한복음 8장 2-11절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             

             (The Woman Who Was Caught in the Act)


   예수님께서 산에서 밤이 맞도록 이슬을 맞으시면서 홀로 기도하신 후, 이른 아침, 그가 종종 하시던 대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셔서 그의 주위로 몰려든 군중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언제나 예수님께 대해서,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관심을 나타내는 군중들을 볼 때마다 시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백성들 앞에서 예수님을 나쁘게 보일 수 있는 계교를 꾸미고 실행했습니다.

   그들은 간음 현장에서 잡아 온 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와 세웠습니다. 그들은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 고 한 율법을 예수님에게 상기시켰습니다 (레 20:10 ; 신 22:22). 그리고 예수님의 판결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대답하기를 돌로 여인을 치라하면 그는 자비로우신 분이 아닙니다. 만일 그 여인을 놓아 주라 하면 그는 율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어떻든지 간에, 모두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대답 하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몸을 구부려 그의 손가락으로 땅 위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쓰신 이 글에 대해서 수많은 추측이 제기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모든 상상은 추측일 뿐, 그것은 영원한 신비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쓰신 글을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참소자들은 이 여인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계속 그의 대답을 재촉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천천히 그의 몸을 일으키시며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혹은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은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그는 몸을 구푸리고, 다시 땅위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역시 아무도 알 수 없는 신비한 글을 남기셨습니다. 그가 쓰신 글을 추측하려는 노력은 모두 쓸데없는 일일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두 양심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빠뜨리려는 그들의 함정에 오히려 자신들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젊은 이로부터 노인에게 이르기까지 그들은 손에 들었던 돌을 내려놓고, 소리 없이 모두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갔느냐? 너를 정죄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여인은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아무도 없나이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죄를 지어도 괜찮은가? (Is Sin Okay With God?)


   본 대목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신중하지 않은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실제로 용납하신 것으로 쉽게 오해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두 번째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성적 차별 행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그녀의 죄악을 사람들 앞에 공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간음은 남 녀 두 사람간의 합동범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자는 내버려두고, 여자에게 모든 비난과 수치와 죄를 뒤 집어 씌웁니다. 이런 현상은 이 사건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법은 주로 남성들의 입장에서 세워지고 여인은 벌하고 남자는 자유롭게 방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간음죄에 대해 범죄자들은 돌로 쳐 죽일 것을 명령합니다. 이 이야기에 주의하여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사건에 있어서 율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그는 율법을 옹호하셨으며, 그 율법의 요구대로 시행하라고 그들에게 판결하셨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무시하거나 율법을 개의치 않는 것처럼 행동을 취하셨다면 그는 의롭지 못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인정하셨습니다.

   "죄(간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처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만일 너희 중에 이 여인과 같은 죄를 범한 자가 있다면, 그 또한 반드시 돌로 침을 받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은 자만이 그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그 여인보다 더 의로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아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죄인은 다른 죄인을 정죄할 수도, 그 죄를 처벌할 수도 없습니다.

   11절을 주목해 보면 여인이 예수님께 주(Lord)라고 고백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녀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고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주님을 향해 "저는 제 자신이 죄인임을 압니다. 저는 범죄 현장에서 잡혀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죄인은 예수께서 약속의 구주이심을 믿고, 저의 주와 구주로 영접합니다. 저는 주께서 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참된 회개와 믿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우리 심령을 감화시켜 줍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 죄를 범치 말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하심은 은혜입니다. "가서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심은 그의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은혜와 함께 하시고, 그 위에 소금을 치십니다. 첫째 부분은 은혜고 둘째는 진리(소금)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라" 하신 구주의 말씀은 누구든지 그를 찾는 자에게 주시는 그의 죄 용서함(forgiveness)과 사죄(pardon)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 그는 누구든지 자신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 믿는 자들에게는 결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 5:24). 역시 요한복음 3장 17-19절을 읽어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가라, 그리고 다시 죄를 범치 말라'고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참된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들의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날마다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을까요? 물론 그는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새로 구원함을 얻고 새 생명을 얻은 그 여인을 주님이신 그 자신의 완전한 기준 앞에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의 뜻은 우리들이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하십니다(요 1서 2:1).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가라 그리고 다시 죄를 조금만 짓도록 하라." 고 말씀 하셨다면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어떠한 죄도 용납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하박국 1:13).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르는 것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가라 그리고 다시 죄를 범치 말라" 하신 말씀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벧전 1;16)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너희 몸은 성령의 전" 이라고 하였습니다.

   간음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용서하시고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변화시키는 역사가 바로 놀라운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속이고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바르게 하지 않을 경우? (What Happens When You Don't Go Straight)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삶 가운데 죄를 범하고, 그 죄를 바르게 해결하지 않을 때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이들은 "만일 그리스도인이 구원함을 받고 다시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인가?" 라고 물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실제적인 여러 가지 중요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죄 없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죄를 덜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6;14).


   2.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할 때 그의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구원의 기쁨을 잃게 됩니다(시 51:12).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과의 그의 관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행복한 가족으로서의 하나님과의 그의 교제는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3. 모든 믿는 자들의 죄의 형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에 의해 지불되었습니다(이사야 53:6).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는 미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해 그가 죽으셨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내 죄의 빚을 갚아주셨다면 내가 갚을 빚은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중 지불서를 요구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거기에 이중 유죄판결이란 없습니다.


   4.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할 때 그 결과에 따른 징계에서도 자유로워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범죄 한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믿는 자로서 그의 구원에 대한 보장을 잃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땔감을 위한 그의 장작 헛간(woodshed)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그의 자녀들에 대해서 그의 징계를 위한 대비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 값이 이미 다 치루어 졌다는 의미는 나는 결코 지옥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지만, 그가 범한 죄는 그의 생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믿는 자의 범죄는 하나님의 징계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질병, 슬픔, 사고나 혹은 심지어 자신의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참고 고전 11:27-32).


   5. 믿는 자의 생활 가운데에서 고백하지 않은 죄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상급을 잃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고전 3:12-15). 또한 죄로 인해 잃게 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공백기간은 곧 자신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 가운데 그 일부를 잃는 것입니다.


   6.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범죄 했을 때를 위한 대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요한 1서 2:1 이하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변호사)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믿는 자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변호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들의 죄를 "내게로 계산하라." (Charge that to my account)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죄를 범한 믿는 자들을 위한 대언자로서, 죄를 자백하는 그의 자녀들을 위해 끊임없이 은혜의 보좌 앞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참고 잠 28:13 ; 히 4:14-16).


   7. 믿는 자가 그의 죄를 고백하는 순간 그의 죄는 사함을 받고, 다시 영적인 하나님의 행복한 가족으로서 회복이 이뤄집니다. 성경은 이렇게 약속의 말씀을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고 의로우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며, 또한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다"(요한1서1:9).


   8. 한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때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와 함께 거하게 되십니다(고전 6;19). 그리고 성령은 믿는 자에게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믿는 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라던가 혹은 "사탄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라고.

   성령은 믿는 자가 시험하는 자에게 "아니다." (NO) "물러가라"라고 거절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만일 그가 불같은 시험의 순간에도 주를 부르면, 주께서는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반드시 그에게 주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언 18;10).

  

   간음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 속에는 흥미로운 역설적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참소를 당했던 여인은 하늘나라에 가게 되고, 반면에 여인을 참소한 자들은 지옥을 가게 된 것입니다(만일 그들이 후에 회개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는 언젠가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은 멸망 받을 자로 태어났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죄에서 자신을 돌이킨 후 그녀는 구원받은 자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She probably thought she was a born loser. As it turned out, she was born to win.)

   여러분에게도 오늘이 이런 구원함을 얻고 다시 태어나는 날이 될 수 있습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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