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올바른 분별


                                         제 5 과

                       율법과 은혜


   진리의 말씀 가운데는 크게 두 흐름이 있는데, 이는 율법과 은혜입니다. 사실상 상호 대조를 이루고 있는 이 원리들은 각각 가장 중요한 두 시대, 곧 유대교 시대와 기독교 시대의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물론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은혜와 진리가 없었다거나 모세 이전에는 율법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금한 것은 율법이었습니다(창 2;17).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범죄한 그 죄인들을 찾아 가죽옷을 입히신 그 아름다운 일은 확실히 은혜였습니다(창 3:2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신 것을 잘 상징합니다(고전 1:30). 이렇듯 하나님의 뜻이란 의미에서의 율법과 하나님의 선이란 의미에서의 은혜는 언제나 있었으며 이는 성경이 곳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도처에 언급되어 있는 세세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고, 이는 시내 산 때부터 갈보리 때까지의 온 시대를 지배하며, 또한 그 시대의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은혜가 갈보리에서 시작되어 그 이후 시대를 지배하며 그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은혜의 시대는 교회의 휴거와 더불어 끝나는 것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시대에서도 결코 이 두 원리를 애매하게 섞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율법은 언제나 은혜와 구분되며 성격에 있어서 이질적이며 또한 역사하는 형태도 이질적입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이고, 은혜는 하나님께서 권하시고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정죄하는 일을 하고, 은혜는 용서하는 일을 합니다. 율법은 저주하며, 은혜는 저주에서 속량합니다. 율법은 죽이나, 은혜는 살립니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입을 닫게 하고, 은혜는 모든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미하게 합니다. 율법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큰 거리를 만들어 놓지만, 은혜는 범죄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오게 합니다. 율법은 말하기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고 하고, 은혜는 말하기를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합니다. 율법은 말하기를 "너희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지만 은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율법은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믿어라 그러면 산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션교사를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전파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가장 선한 사람도 정죄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가장 악한 사람이라도 값없이 의롭다고 합니다(눅 23:43 ; 롬 5"8 ; 딤전 1:15 ; 고전 6:9-11). 율법은 시험의 제도 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은총의 제도입니다. 율법은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은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합니다. 율법 밑에서는 양이 목자의 손에 죽습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에서는 목자가 양을 위하여 죽습니다.


* 어느 곳에서나 성경은 율법은혜를 예리한 대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율법은혜가 혼합되면 그 양자가 다 손상됩니다. 율법은 그 엄위성을, 그리고 은혜는 그 무료성(無料性)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언급된 율법이란 대체로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그 율법을 뜻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롬 7;23만 유일한 예외입니다). - 저자는 이 문제를 충분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실은 율법이 모세의 율법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 예들이 많이 있다. 롬 3;27과 갈 6;2도 그 좋은 예들이다-편집자 註.  때로는 모세 율법이 이른바 도덕 율법(롬 6:14 ; 갈 2;16 ; 3:2), 혹은 십계명(롬 3;19 ; 7:7-12). 그리고 의식의 율법 (골 2;14-17)을 총망라한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의식의 율법 가운데는 성막(출 25장-30장)과, 레위기 중의 제사법(레 1장-7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대제사장과 희생 제물이 되신 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아름답게 예시하는, 그 신기한 예표가 간직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예표들은 언제나 신령한 사람들의 경탄과 기쁨이 되어 왔습니다.


   시편의 표현들에서도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儀文)의 직(고후 3:7)으로만 국한하여 생각한다면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나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 대해 언급된 것으로 볼 때는 그뜻이 선명해집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2)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1. 율법과 은혜에 관한 세 가지 오류


   1) 무법주의

   곧 성도들은 이제 어떤 법의 구속도 받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즉, 성도는 자신의 선행없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헤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로도 더 이상 거룩한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4)


   2) 의식주의

   이 주장의 원래 형태는 레위기 중에 나타난 모든 규례를 성도가 다 준행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 ."(행 15:1) 오늘날에 와서 이 오류는 교회의 예식이 구원을 얻는 데 필요 불가결하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3) 갈라디아주의

   이는 율법과 은혜의 혼합주의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얼마간의 은혜와 얼마간의 율법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또 다르게는 은혜로 인해 완전히 무력한 죄인이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오류들에 대해서 갈라디아서는 엄숙히 경고하고, 대응할 수 없는 강력한 논리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 3)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8)


2. 율법과 은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율법이란?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4)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2:22)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딤전 1:8)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 ."(갈3;12)


   2) 율법을 법 있게 사용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 13절도 보십시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0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 ."(갈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율법은 오직 "무슨 일이 있어도"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정죄를 뜻합니다. 또한 율법은 "어찌되었든지"라는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이는 오로지 순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고후 3:7) "정죄의 직분"(고후 3: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0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결국 하나님께서 율법 없이 2500년 동안 살아 온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먼저 유죄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고, 또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에 비추어 자신이 완전히 무력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요 1;17 ; 갈 3:17). 즉 율법은 순전히 그리고 오로지 정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3)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1)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히 7;19)


   4) 성도는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은 침례가 상징 하는 바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선언한 후(롬 6;1-10) 계속해서 11절부터 성도의 생활규범, 곧 행동강령들을 말씀하고 잇습니다. 그것이 나머지 열두 절의 주제입니다. 특히 14절은 성도가 죄의 지배 곧 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을 받는 대 원칙을 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책은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된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 6;14)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혹 경건한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괴악한 무법주의에 빠질까 염려하여 성령님께서는 즉각 이런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진정 거듭난 사람들은 이 말씀에 다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한편 로마서 7장은 율법에서 해방을 받는 또 하나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4-6) 이 말씀에 나타난 율법은 의식의 율법이 아닙니다. 이는 7절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 2;19) "믿음이 오기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3-25)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밥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아니요. . "(딤전 1: 8, 9)


   5) 성도의 생활규범은 무엇인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12,13절도 찾아보십시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1, 2)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 ."(엡 5:1,2)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엡 5;15,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에 거하리라"(요 15;10)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2, 23)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이 원리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법률은 부모에게 자녀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규정하고, 자녀를 임의로 방임할 경우 처벌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법률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자녀들을 따뜻하게 잘 보호하는 어머니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왜냐하면 법이 이미 어머니들의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율법 판을 증거궤 안에 두도록 명하신 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그 증거궤 안에는 율법 판과 더불어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습니다.<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광야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산 떡이 되심을 상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양자 모두 은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율법 판은 속죄의 피가 뿌려지던 금으로 된 속죄소에 의해 가리워져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긴 그 율법을 하나님께서는 직접 보시지 않으시고 피를 통해서 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피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하게 변호하며 그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때문입니다(히 9:4, 5).


   현대 율법주의자들은 속죄소와 속죄 피 아래 있던 이 거룩하고 공정하면서도 잔인한 율법 판을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교회안에 세워 놓았습니다.


   6) 은혜란 무엇인가?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4,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헤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7)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7) 은혜를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 9)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1~13)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7)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 ."(롬 5: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6, 7)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은혜는 얼마나 완전하고, 얼마나 포용적입니까! 은혜는 구원합니다. 의롭게 합니다. 세워 줍니다. 열납되게 합니다. 구속(救贖)합니다. 용서합니다. 기업을 줍니다. 하나님 앞에 설 신분을 줍니다. 우리로 담대히 나아가 자비와 도움을 얻도록 은혜의 보좌를 예비하십니다. 은혜는 삶의 태도를 가르쳐 주며, 복스러운 소망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명심할 것은 이상의 여러 가지 원리들이 혼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 5)


   * 갈 3:16~18 ; 4:21-31도 겸하여 읽어보십시오.


   8) 마지막으로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31)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아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18-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말씀하신 것이 도덕의 율법이냐 의식의 율법이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아른 곳은 시내 산이 절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죤-번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는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와 같이 완전하고 복된 의로 가리워 졌다. 그래서 뇌성을 발하는 이 시내 산의 율법도 그에게서는 아주 미미한 허물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것을 가리켜 율법을 넘어선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혹 불신자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가 이미 범한 그 거룩하고 공정한 법이 선고하는 그 참된 선고에 마음을 기울이기 바랍니다.


   ". .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2, 23)


   그러나 그러한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약속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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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주일은 천국, 평일은 지옥 가는 신자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0).


   금일의 기독교 범주 아래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 아래서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쉽게 분별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예수를 믿고 있으며, 죄 용서함 받았으며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아 상당수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그들을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기독교인이 있다면 스스로를 분석해 보고 구원의 문제를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사단은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되 감쪽같이 속인다. 성경에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 아래 있으며" 지옥 자식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누가 자기를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을 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겠는가? 필자가 볼 때에 율법 아래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단에게 철저히 속은 결과이다.

   여기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증상을 철저히 분석해 봄으로 아직 구원받지 못한 독자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자 한다.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일은 천국, 평일은 지옥"이라는 말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어떤 분이 나에게 고백하였다.

   "예배당에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통성기도 시간에 힘을 다하여 기도하면 마음이 기쁘고 하나님의 사랑을 혼자만 받은 것처럼 즐겁고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것 같은 자신감이 솟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시간이 지나고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세파에 시달리고, 또 형편에 따라서 실수가 나타나고, 죄를 짓게 되면 신앙에도 자신감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죽으면 지옥에 갈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해 옵니다. 나는 왜 이럴까요?"

   그는 왜 예배당에서는 천국이요, 집에서는 지옥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들의 양심의 문제인가, 아니면 인격의 문제인가?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양심도 인격도 아니고 그들의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이다. 그리고 잘못된 신앙은 잘못된 가르침에서 온다. 그 가르침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는 진지하게 구원의 문제로 갈등해 본 일이 없다. 오늘날 거리에서 만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개인적으로 상담해 보라. 그들의 대부분은 지옥에서 구원받는 문제를 진지하게 갈등해 본적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의 영혼이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에 지옥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정말 지옥이 있는 것인가?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옥에 가지 아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듭남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나의 죄가 얼마큼 용서 되었으며, 속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갈등의 제목은 얼마든지 있다. 참된 신앙은 진지한 갈등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위하여 이 정도의 갈등도 하지 아니하면서 참된 신앙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떠한가? 진지한 갈등의 시간들이 있었는가?

   예전에 필자는 어떤 성도를 만났다. 그는 현재 캐나다 교포로서 한인교회에 나가는 성도이다. 그가 이민 가기 전에 친구의 권유에 따라서 필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집회에 딱 한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보니 그 때에 구원받았다고 간증하였다. 당시에 교회에 다니지 아니하던 그가 어떻게 딱 한 번 전도집회에 출석하고 구원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의 고백은 이러하였다. 그가 어려서 주일학교에 얼마 동안 나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어떤 주일학교 교사가 지옥에 대해서 실감나게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그 설교를 들은 뒤 그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생각이 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마음의 고통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그 마음에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 언젠가는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참석했던 그 날은 필자가 지옥 갈 죄인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에 대하여 전하고 있었다. 그는 그 날 나도 지옥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훗날 깨달아 보니 그 날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지옥에 대한 갈등이 그를 구원받게 하였다. 다시 말하거니와 구원은 갈등으로부터 시작된다.


   둘째로 진지한 상담의 기회가 없었다. 대부분의 구원은 구원 문제를 진지하게 상담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물론 상담은 구원받은 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생명이 생명을 낳을 수 있다는 원칙에서 말하는 바이다. 여러분 주변에 기독교인들을 상담해 보라. 그들 중에 상당수는 그래도 앞에 말한 갈등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갈등이 있든 없든 그 모든자의 문제점은 누구도 그들에게 구원에 대한 진지한 상담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도 같은 경험을 겪었거니와 필자가 만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이렇게 목사님과 같이 앉아서 진지하게 구원의 문제를 놓고 상담하는 것이 처음있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기독교인들을 만나보라. 그들은 상담은커녕 이와 같은 상담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얼마 전에도 한 교인이 구원받았는데 그는 수 십 년 교회를 다니는 중 이와 같은 상담을 처음 했으며 지옥에 대한 갈등에 대해서 감히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상담의 기회가 없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교회에 출석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잘 듣고 교회생활 충실히 하면, 그리고 성경 공부반에서 배워 나가다보면 신앙이 성장하고 점점 믿음이 자라서 천국에 가게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다니다보면 다 잘되지 않겠는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막연한 것이 아니다. 작은 구멍가게를 열어도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면 안 되는데 그대의 영혼이 영원한 지옥에 빠질 수 있는 문제를 막연하게 처리하지 말라.


   셋째로 상담을 하되 잘못된 상담도 문제이다. 어떤 구도자는 기가 막힌 사연을 필자에게 고백하였다. 성경을 읽다가 지옥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지 아니하는지를 목사님에게 상담을 요청하였다. 목사님은 상기된 목소리로 다니다보면 다 잘 될 것인데 왜 급하게 생각하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가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므로 민망한 생각을 하며 쫓기다시피 나왔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구원의 문제를 물어보니 목사님이 대답하시기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예배당에 나오는 날 믿음으로 나왔으니 그 날을 구원받은 날로 알고 있어라." 그래서 그는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말은 맞지만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고 자꾸 의문이 생겨서 고민하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여야 죄를 용서받는가를 상담하였는데 예수님이 내 죄를 십자가에서 다 담당해 주셨다는 대답을 들었다. 마음이 시원하고 그 목사님의 설교도 은혜롭고 한동안 좋았다고 한다. 죄를 용서받은 기쁨도 있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확신도 있으므로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 설교에 우리는 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죄를 숨기지 말고 통회하여야 한다는 설교를 듣고 난 다음,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사라진 줄 알았던 죄가 자기 가슴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죄는 자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심령은 나날이 죄에 대한 갈등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하시지 않았는가 하고 반문하면서 죄의 고통을 이겨보려 하였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십자가의 속죄는 성경에 있고 2000년 전에 있었고 멀리 있는데 내 마음속의 죄는 현실이 아닌가! 이 밤을 새고 나면 내일 직장에 나가서 나는 또 죄를 지어야 하는데 나는 언제까지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야 하는가?

      주일날 말씀에 죄를 통회하라고 하여서 통곡을 하고 죄를 고백했다. 또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기뻐하고 감사하라. 찬양하고 경배하라. 하염없는 눈물과 함께 찬양하고 또 찬양하였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울고 같이 찬양하고 같이 기뻐하였다. 당장에 죽어도 천국에 갈 것 같았다. 진실로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그런데 오늘이 겨우 화요일이 아닌가. 나는 벌써 죄의 올무에 걸려서 괴로워하고 있지 아니한가. 기쁨은 한 때의 감정으로 끝나고 이틀도 다 지나지 않은 화요일 밤에 나는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주일날의 그 신령한 말씀과 성령 충만한 분위기는 왜 나의 신앙을 이틀도 지탱시켜주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나는 주일날은 천국이요 평일에는 지옥인가? 이 신앙의 틀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금일의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갈등에 잡혀있다. 그 중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포기한 사람도 많다. 한 주간 지은 죄를 주일날에 가서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되지 아니한가. 그 다음에는 또 주일이 있으니 그냥 족하지 아니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서두에 말한 것처럼 율법 아래 있는 것이 문제이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율법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며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주일날 말씀을 듣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며 예배당에 있을 동안에는 죄를 멀리 하고 있다. 그러나 월요일부터는 죄와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하고 있는 동안에는 기쁘고 죄와 가까이 있을 때는 기쁨이 없고 답답한 것이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모습이다. 생각하여 보라. 세상법도 내가 법을 지켰을 때는 담대하고 당당하고 기쁨이 있다 그러나 법을 어기고 죄를 짓는 순간 기쁨과 담대함은 사라지고 불안이 찾아온다. 그런데 일이 잘 되어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면 다시 편안해진다. 다시 말해서 죄와 나와의 관계 속에서 기쁨과 불안이 수시로 교차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법에 의해서 죄인이 되었다가 풀려났다가 하는 과정에 의해서 나의 마음상태가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이처럼 율법 아래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정죄 될만한 죄 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낙심되고 죄를 회개했거나 신앙의 상태가 좋을 때에는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다. 율법 아래서는 대단한 열심을 내고 있는 사람은 천국 갈 수 있는 확신에 차있다. 그는 큰소리로 구원받았다고 우기고 심지어 구원받은 날까지도  주장하지만 그의 실상은 자기 열심에 의한 자기의 의에 잡혀서 교만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열심과 그의 정직과 그의 충성과 그의 성실함이 그가 천국 가는데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 얼마나 불쌍한 모습인가. 구원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고 그 후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인데 본질적인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열심만 내고 있으니 율법 아래서 교만한 모습이다. 그는 교만하여 지옥에 가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또 다른 모습은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열심을 내지 못하고 자주 죄와 타협하고 말씀을 순종하지 못함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 같은 죄인이 무슨 천국인가' 하는 낙심 속에 겸손(?)하다. 그는 그 겸손으로 인하여 지옥에 간다.

   그렇다면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다음 말씀에 답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갈라디아서 3;13).

   예수께서 저주받을 죄인을 위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죄와 저주의 지옥에서 해방시키셨다. 죄가 죄인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후로는 그를 죄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라 부른다. 십자가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해결하셨으므로 이 후로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 갈 번민에서 해방받았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 그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다. 죄를 절제하는 것도 지옥이 겁나서가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함이요 헌금을 내는 것도 벌을 겁냄이 아니요 체면문제가 아니라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행동이 십자가의 은혜와 관계가 있는 것이니 이것을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한다.구원의 문제,

   오! 그대여 그대는 율법 아래 있는가, 은혜 아래 있는가?

   신앙의 상태와 관계없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였는가? 그대의 모든 죄가 십자가상에서 온전히 해결된 사실을 그대의 양심이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같이 살게 될 것이다. 종파와 인종과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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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의 올바른 분별

 


                                    제2과

 

                     일곱 경륜 (세대)


   성경은 때(여기서 '때' 라 함은 아담의 창조로부터 요한계시록 21:1의 "새 하늘과 새 땅" 까지의 전 기간을 뜻한다)를 불균등한 일곱 주기들로 구분합니다. 이 주기들을 가리켜 흔히 경륜(엡 3:2) 혹은 세대(엡 2:7) 라고 부르며, 또한 주의 날 과 같이 날들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주기들은 죄와 인간의 책임이라는 두 문제와 관련해서 인류 전체 또는 그 일부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의 변화를 근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세대는 하나님의 측면에서 볼때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험 기간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전세대는 심판으로 종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매 세대마다 완전히 실패했음을 뜻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주기들 곧 이세대들 중 다섯은 이미 만료되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제 육 주기, 아마도 여섯번째 세대의 말기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일곱번째 세대를 맞게 될 것인데, 마지막 세대인 천년왕국 세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1.  무죄 세대

   이 세대는 아담의 창조로부터(창 2:7)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될 때까지입니다. 아담은 처음 창조될 때 죄없이 창조되어 선과 악을 몰랐습니다. 아담은 그의 아내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에 거처하면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무죄 세대는 인간의 첫 실패와 이에 따른 가장 비참하고도 광범위한 결과를 낳고 끝났습니다. 이 세대는 다음과 같은 심판으로 종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참조요절 : 창 1:26 ; 2:16,17 ; 3:6, 22~24


   2.  양심 세대

   아담과 하와는 타락함으로써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스스로 습득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 인류에게 유전시켰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류는 양심으로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부터 인류는 선을 행하며, 악을 멀리해야 하는 책임 한계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에덴으로부터 노아의 홍수 때까지 이르는 양심 세대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이 때에는 인간의 정부의 정치제도의 법률제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땅에서 모든 혈육있는자의 행위가 패괴해지고" (창6;12).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제 2의 시험기를 홍수 심판으로 끝내셨습니다.


   * 참조요절 : 창 3:7, 22 ; 6:5, 11,12 ; 7:11, 12, 23


   3.  인간의 치리 세대

   하나님은 그 무서운 홍수 심판에서 여덟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물이 걷힌 후에는 이들에게 정화된 땅과 그것을 다스리기에 충분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즉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게는 그 땅을 다스릴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날 평야에서 인류는 하나님을 떠나는 악한 음모를 꾸몄고, 마침내 인간의 치리 세대는 언어 혼동이라는 심판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 참조요절 : 창 9:1, 2 ; 11:1-4 ; 11:5-8


   4.  약속세대

   하나님은 이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아브람이라는 한 사람을 불러 그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에게 준 약속들 가운데 어떤 것은 순전히 은혜요, 무조건적이었습니다. 이 약속들은 글자 그대로 이미 이루어졌거나 앞으로 이루어질 것들입니다. 한편 어떤 약속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실함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여 맺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조건들은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족속의 실패로 인하여 마침내 약속의 세대는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이라는 심판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 . 창조하시니라" 는 장엄한 말로 시작된 창세기는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는 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 참조요절 : 창 12:1-3 ; 15:5 ; 26:3 ; 28:12,13 ; 13:14-17 출 1:13-14


   5.  율법세대

   무력한 인간을 구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은혜를 베푸사 선민을 압박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내광야에서 그들에게 율법의 언약을 제시하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은혜의 관계를 지속해 달라고 하나님께 겸손히 간구하는 대신에 이렇게 오만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광야 및 약속의 땅인 선지(選地)에서 계속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흉악하고도 끊임없는 위법의 긴 기록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무수한 경고 끝에 율법세대를 심판으로 종결시키셨습니다. 즉 북이스라엘을 선두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백성들은 다 선지(選地)에서 쫓겨나와 현재까지 유랑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 연약한 잔존자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휘하에 귀환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자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 오셨습니다.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서 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은 공모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 참조요절 : 출 19:1-8; 롬 3:19,20 ; 행 2:22,23 ; 롬 10:5 ; 왕하 17:1-18 ; 행 7:51,52 ; 갈 3:10 ; 왕하 25:1-11


   6.  은혜세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순수한 은혜의 세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받을 수 없는 중에 받는 은총, 혹은 율법하에서 처럼 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온전하고도 영원한 구원이 이제는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값없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29)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7,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 9)


   예언상에 나타난 이 은혜세대의 종결은 불신 세상과 배도교회에 대한 심판입니다(눅 18:8 ; 17:26~30 ; 계3:15,16 ; 살후 2:7-12). 이 은혜세대의 종결 시에 일어날 첫 사건은 하늘로부터 주께서 오시는, 주님의 공중재림입니다. 그때 잠자던 성도들은 일으키심을 받아 당시에 생존하고 있는 신자들과 함께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살전 4:16, 17) 있을 것입니다. 그 후 "대 환난" 이라고 불리 우는 짧은 기간의 환난시대가 따릅니다(마 24:21, 22 ; 단 12:1 ; 습 1:15-18 ; 렘 30:5-7). 이 후에 큰 능력과 영광으로 오시는 주 예수님의 지상 재림과, 일곱 번째 세대이며 마지막 세대인 천년왕국을 소개하는 심판들이 있을 것입니다(마 24:29, 30 ; 25:31-46).


   7.  그리스도의 통치세대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시에 있을 정화(淨化)의 심판이 있은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회복된 이스라엘 민족과 전 세계를 천년 동안 다스릴 것입니다. 이 세대를 가리켜 흔히 천년왕국세대라고 합니다. 그의 권좌(權座)는 예루살렘이 될 것이며, 또 은혜세대에 구원을 얻은 자, 곧 교회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은 그와 함께 그의 영광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참조요절 : 행 15:14-17 ; 계 19: 11-21 ; 사 2:1-4 ; 계 20:1-6 ; 사 11장


   그러나 사단이 잠시 풀어 놓이는 때가 있는데, 그는 그때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이 전과 같이 악에 치우치는 것을 발견하고 열방 중에 자신의 세력을 손쉽게 규합하여 주님과 그 성도들을 대적하여 싸웁니다. 이 마지막 세대도 다른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심판으로 끝납니다. "크고 흰 보좌" 가 설치되고, 죽은 악인들이 일으킴을 받아 그 앞에서, 마침내 심판을 받습니다. 그때 새 하늘과 새 땅, 곧 영원의 상태가 시작됩니다.


   * 참조요절 : 계 20:3, 7~15 ; 21장과 22장


   편집자 주(註)


   이상 살펴 본 스코필드 박사의 세대 분류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만이 유일하게 정확한 분류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특별히 세대를 분류하지 않고 그대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성경학자들 가운데 다음과 같이 세대분류를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1) 아담으로부터 노아 때까지의 세대

   2) 노아로부터 아브라함 때까지의 세대

   3)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의 세대

   4) 현 은혜의 세대

   5) 대 환난의 시대

   6) 천년왕국 세대

   7) 영원의 상태


   어느 분류를 받아 들이든지 언제나 구원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또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럴 것입니다. 이 중요한 진리는 꼭 명심해야 합니다. 구약의 사람들도 앞으로 올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은 1900여년 전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역의 근거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미국 엠마오 성경학교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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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제 7 과

                       어린 자녀들과 아들들(4:1-16)


   4장의 첫부분에서 바울은 계속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자녀와 장성한 아들이라는 두 부류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4:1, 2 이것은 자기의 재산권을 그 아들이 어떤 성숙한 나이가 되면 넘겨주려고 하는 부유한 아버지의 어린 자녀에 대한 묘사입니다.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그러나 어린 자녀인 때에는 아직 미성년자로서 마치 종과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와 그의 인격을 책임지고 있는 후견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 유산이 분명히 그의 것이지만, 그가 자랄 때까지는 그것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4:3 이것은 율법 아래있는 유대인의 상태입니다.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그들은 어린 자녀들이며, 마치 종들처럼 율법에 의해 혹사 당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매여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유대 종교의 초보적인 원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예식과 의식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계획된 것입니다. 조각들을 사용하여 산술계산의 기초를 배우거나, 그림들을 사용하여 사물을 알아 맞추거나, 알파벳을 배우는 어린 아이에게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완전한 그림자요, 묘사이며, 육체적이고, 외적인 것을 사용하여 영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할례가 한 예입니다. 유대교는 육체적이요, 외적이며, 일시적인 것이고, 기독교는 영적이요, 내적이며, 영구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외적인 것들은 "자녀들" 에 대한 "속박" 의 한 형태입니다.

4:4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는 2절의 예화에 있는 "아버지의 정한 때" 에 해당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요컨대, 여기에서 우리는 구주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주님은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단지 사람이셨다면, 주님께서 여자에게서 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람으로 나실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경우에는 그 표현 자체가 주님의 독특한 인성과 주님의 탄생의 독특한 방법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주님은 율법 아래에서 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으로서 주 예수님은 결코 율법 아래 계신 분이 아니시며, 율법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시는 은혜로 주님의 생명 안에서 율법을 존중하며, 주님의 죽음 안에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만드신 율법 아래 자신을 놓으셨습니다.

4:5 율법은 그것을 어긴 사람에게 그 삯을 요구하는데 그 삯은 사망입니다.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삯을 치루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그 놀라운 아들의 신분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인류의 한사람으로서, 유대 민족의 한사람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율법이 요구하는 삯을 치루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은 무한한 가치가 있으므로 아무리 많은 수의 죄인일지라도 충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대속자로 죽으실 수 있었습니다. 고벳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인자(사람의 아들)가 되심으로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교체인가!" 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종이 된 동안은 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아들로 받으시기 위하여 그들을 율법의 구속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의 차이점에 주목하십시오(롬 8:14과 16을 비교하십시오). 신자는 어린 자녀로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납니다(요 1:12을 보십시오).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아들로서의 특권과 책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탄생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아들로서 가족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즉시 아들이며 후사(상속자)로서 유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있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가르침들은 성도들 사이에서 아무도 어린자녀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모두는 성숙한 아들들로 다루어집니다.

   영적인 의미에서의 양자됨은 현대 생활에서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양자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다른사람의 자녀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녀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양자됨의 의미는 신자들에게 성숙한 아들들이라는 신분과 함께 그 신분에 어울리는 모든 특권을 주는 것입니다.

4:6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신분의 위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님은 아들됨에 대한 자각을 하게 하시고 성도들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문안하게 하십니다. "아바, 아버지" 는 다정한 문안의 형태이며, 아버지에 대한 아람어와 헬라어를 결합시킨 것입니다. 어떠한 종도 한 가정의 가장에게 이러한 방법으로 문안하지 않으며, 그것은 오직 가족 구성원들만의 것으로 사랑과 신뢰에 대한 표현입니다.

4:7 신자는 더 이상 종이 아니며,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제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재산에 대한 후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하나님이 소유하신 모든 것은 믿음으로써 그의 것입니다.

   해리슨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녀여, 만유는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상상을 능가하는 재산의 실제에 대해 당신을 깨우기 위해 주님께서 고린도전서 3:22, 23에서 이것을 당신에게 말씀하셨다. 우주를 생각해 보라. 그것이 누구의 것인가, 주님의 것이기에 당신의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왕답게 살아가라" 고 말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어리석음(4:8-11)


   갈라디아인들은 우상과 신화적인 신들에 대한 속박 아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다른 형태의 속박에 속하였는데 그것은 율법의 속박입니다(4:8-11).

4:8 그들은 회심하기 전에 나무와 돌로 만든 거짓 신들인 우상을 섬기던 이교도들이었습니다.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4:9 그러나 지금 갈라디아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혹 그들이 깊은 체험적인  방법으로는 주님을 몰랐을 지라도 최소한 그들은 주님께서 알게 하신 자들 즉, 구원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능력과 부 (그들이 상속받을)로부터 약하고 천한 일들로  돌아섰으며, 그일은 율법에 관련된 것으로, 할례나 성일, 식사에 대한 규칙들입니다. 그들은 다시 그들 자신을 구원하지도 부유하게 하지도 못하는 일에 속박시켰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그 모든 예식들을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으로 분류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다른 곳에서 이 율법을 거룩하고 선한 것이라고 주장한(롬 7:12) 그 율법을 강한 어조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 설명은 율법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보여진 것처럼 어떤 목적과 어떤 시대를 위해 의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서 율법을 사용하려는 것은 구원과 거룩의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 대치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을 그리스도와 견주어 본다면 그 율법은 약하며, 무익하고, 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정하신 율법은 그들의 시대와 장소에서는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주 예수님으로 대치하려할 때 분명한 장애물입니다.

4:10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율법으로 돌아서는 우상숭배입니다.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유대인의 안식일과 명절과 절기를 지켰습니다.

4:11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아직까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려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했습니다.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날과 달과 해를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쁜 얼굴을 구하기 위해 그들의 힘으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강한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 범위에서는 그들에게 구주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이러한 태도로 기록하였다면 오늘날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에 도달하려고 하는 고백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떻게 기록했겠습니까?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들어온 유전-사람이 임명하는 제사장, 제사장의 구별된 의복, 안식일 준수, 거룩한 장소, 초, 거룩한 물 등등-을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개인적인 호소(4:12-16)


4:12 분명히 갈라디아인들은 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여준 바울에 대한 감사를 잊었던 것입니다.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실패와 그들에 대한 근심 대신에 그들에게 "형제들" 이라고 문안했습니다.

   바울도 율법아래 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에서 구출되었고 더 이상 율법아래에서 살지 않는 "나와 같이 되" 라고 말했습니다. 이방인인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아래 있던 자들이 아니며, 지금도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유대인이었던 내가 너희와 같이 되어 이제는 이방인들이 늘 누리고 있었던 율법에서의 자유를 즐기고 있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지 아주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갈라디아인들이 자신을 대우한 것에 어떠한 개인적인 침해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로부터 거짓 선생들에게로 돌아선 것은 바울에게 개인적인 타격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타격을 준 것으로 그들 자신에게 해를 입힌 것입니다.

4:13 이 구절은 "육체의 약한 것으로" (다비역)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복음은 처음에 육체의 약한 것으로 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약한 것, 멸시받는 것, 가난한 것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님의 일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4:14 여기에서의 시험(temptation)은 시련(trial) 또는 검사(test)를 의미합니다.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의 병은 그 자신과 아마도 그에게서 듣는 사람들에게 시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바울의 육체적인 모습이나 언변 때문에 그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즉, 하나님의 보내신 전도자로서, 그리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전하는 말씀을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전도자들을 대우하는 것에 관한 교훈이 됩니다. 우리가 그들을 진심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주님을 그렇게 영접하는 것입니다(눅 10:16).

4:15 그들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이 그들의 영혼에 얼마나 부요한 복인지 깨달았습니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들의 감사가 너무도 커서 할수만 있었다면 그들의 눈이라도 바울에게 주었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육체의 가시" 가 안질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감사의 정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아침 이슬과 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4:16 바울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는 지금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정직하게 복음의 진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그들의 대적이 되었다면, 그들의 위치는 사실상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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